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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의 한 전철역사 안 오래된 카페에서 먹은 아침식사. 일본에서는 어느 식당을 들어가도 맛이 없거나 실망스러운 적이 없었다.
 고베의 한 전철역사 안 오래된 카페에서 먹은 아침식사. 일본에서는 어느 식당을 들어가도 맛이 없거나 실망스러운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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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6일 월요일. 새벽녘 잠결에 폭우가 쏟아지는 소리를 들었는데, 아침이 되자 날씨가 말짱히 개었다. 오늘은 일본의 3대 온천 중 하나라는 고베의 아리마 온천에 가는 날. 근처의 사쿠라가와 역에서 고베 방향으로 가는 한신 난바선을 탔다. 한 시간 가까이 달려 도착한 고베의 신카이치역. 고베 전철로 갈아타려는데 역사 안에서 작은 카페 겸 밥집을 발견했다.

코를 찌르는 카레라이스 냄새. 아침식사를 못해서 배가 몹시 고팠던 터였다. 여기서 아침을 먹고 가기로 했다. 이 식당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실린 적이 있었나보다. 신문 스크랩이 내걸린 입간판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이든 할머니들이 주문을 받고 서빙을 하는 곳이다. 식당 안 손님들도 대부분 노인들이었다. 어쩐지 옛날 다방 느낌도 풍겼다.

바에 걸터앉아서 아침 정식(朝定食, 아사 고항)과 채식 카레라이스를 하나씩 주문했다. 가격은 각각 500엔. 보통 8%의 세금이 붙는 다른 가게들과 달리, 세금 포함 500엔이니 참 저렴하기도 하다. 아사 고항은 도시락 용기 같은 식판에 밥과 된장국, 구운 연어, 두부 조림, 쯔게모노, 계란말이, 연근조림 등이 옹기종기 담겨 나왔다.

가게 소개가 실린 신문 기사, 식당 메뉴, 주인의 활동 사진 등이 어지럽게 붙어있다. 세련되지 않지만 포근한 느낌이 드는 옛날식 카페.
 가게 소개가 실린 신문 기사, 식당 메뉴, 주인의 활동 사진 등이 어지럽게 붙어있다. 세련되지 않지만 포근한 느낌이 드는 옛날식 카페.
ⓒ 임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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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라이스도 맛있었다. 슈퍼에서 파는 에스엔비 카레에 감자와 채소를 아낌없이 넣었다. 에스엔비 카레는 우리로 치면 오뚜기 카레만큼 많이 먹는 것인데, 색깔과 향이 더 진하고 풍부하다. 이 카레맛을 잊지 못해 한국에 돌아온 뒤 슈퍼에서 한 봉지 사다가 집에서 해먹었다.

식당 안에서 다시 자세히 보니 아까 신문 기사는 이름난 문인이 이 식당과 관련된 추억을 소개한 칼럼 같은 것이었다. 비록 전철 역사 안 작은 가게지만, 오래되고 단골 손님도 많은 곳 같았다. 녹차를 가져다주면서 '뜨거우니 조심하라'는 말을 잊지 않는 친절한 점원 할머니. 주인의 취미가 등산인지, 활동 모습을 찍은 사진을 여기저기 걸어놓은 벽면.

집밥을 먹으러 온 것처럼 푸근한 기분이 들었다. 밥을 다 먹었는데 조금 모자란 것 같다. 앞에 걸린 메뉴 사진을 보고 420엔짜리 샌드위치와 커피 세트를 추가로 시켰다. 마요네즈에 버무린 삶은 계란과 오이가 들어간 샌드위치는 어릴 때 먹던 그 맛이다.

신선한 원두를 사용해 향기가 좋은 커피에 연유를 부으니 딱 옛날 다방의 밀크 커피다. 맛있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고베 전철에 몸을 실었다. 이번에도 교토에 갈 때처럼 맨 앞 칸의 맨 앞자리에 앉았다.

고베 교외선 전차는 꼭 잘 손질된 골동품을 타고 달리는 기분이 들게 했다.
 고베 교외선 전차는 꼭 잘 손질된 골동품을 타고 달리는 기분이 들게 했다.
ⓒ 임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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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 전철은 교토행보다 더 구식이다. 교토행 전철은 그래도 계기판이 디지털로 되어 있었는데, 이건 아날로그 계기판에 수동 손잡이가 달려있다. 몇 십 년은 된 것 같은 열차지만, 잘 달리기만 하면 그만이다. 조금만 낡으면 새것으로 갈아치우는 통에 '오래된 것'이 별로 없는 한국이 떠올랐다.

번드르르한 겉모습보다 내실을 추구하는 일본의 국민의식을 엿보는 듯했다. 일본의 거리에서도 비슷한 것을 느꼈다. 빚을 내서라도 크고 좋은 차를 몰아야 하는 한국인과는 달리, 남녀노소 누구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일본인들.

여기서부터는 진짜 시골길이다. 전차 내부에는 '토지 급모(土地 急募)'라는 광고가 걸려있었다. 농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서 알기 쉽게 만화로 되어 있다. 이 나라 사람들의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이런 것들이 나를 웃음짓게 한다.

고베 교외선 타고 아리마온천 가는 길. 벽과 천장이 나무로 된 오래된 역사가 정겹다.
 고베 교외선 타고 아리마온천 가는 길. 벽과 천장이 나무로 된 오래된 역사가 정겹다.
ⓒ 임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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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마 온천 마을로 가는 마지막 환승. 앞에 보이는 선로 위 건널목을 건너 옆에 기다리고 있는 열차로 갈아타면 된다.
 아리마 온천 마을로 가는 마지막 환승. 앞에 보이는 선로 위 건널목을 건너 옆에 기다리고 있는 열차로 갈아타면 된다.
ⓒ 임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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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시골 풍경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지역의 특성상 넓은 논밭보다는 한적한 전원주택을 연상케 하는 작은 마을들이 많았다. 가게들도 있고, 조금 큰 마을에는 마트도 있다.

그중에서도 제일 매력적인 것은 벽과 천장이 나무로 지어진 오래된 전철 역사들이다. 한국에서는 보지 못했던 '느림'의 미학, 오래된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온천이 있는 아리마에 가까워질수록 열차는 점점 고도가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좌우는 초록색 풀과 나무가 우거진 숲이다. 터널도 여러 개 통과했다.

아리마구치역에서 아리마 온천 마을로 가는 열차로 마지막 환승을 했다. 작은 역이라 지하 환승통로 같은 것도 없었다. 그냥 열차에서 내려서 선로 위로 건널목을 건너 옆에 서 있는 열차로 갈아타는 것이다.

이번 것은 아리마 온천까지만 왕복하는 아주 작은 열차다. 레일은 두 줄도 아니고 딱 하나 놓인 단선. 좌우로 나무 전봇대가 늘어선 좁은 산길을 오르고 또 오른다. 아침까지 비가 내려 촉촉이 젖어있는 초록의 숲속으로 열차는 자꾸만 들어갔다. 일본에 와서 이런 경험을 할 줄이야.

▲ 아리마 온천 마을로 들어가는 길. 비에 젖은 초록의 숲길을 오르고 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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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마 온천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주 다녀서 유명해진 온천이라고 한다. 여기서도 도요토미 얘기를 듣게 되다니. 마을 중심가에 도요토미와 그의 부인 네네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부부상인데 나란히 있지 않고 멀찍이서 서로 마주보도록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이했다.

한 바퀴 둘러보니 온천수가 나오는 '원탕'에 세워진 목욕탕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작은 마을이다. 관광객이 많이 방문하는 덕에 작은 관광안내소도 있고 기념품 가게와 식당가도 있다. 이 작은 마을에 절만 대여섯 개가 있는 것도 신기했다.

아리마의 대표 상품은 온천의 탄산수를 이용한 탄산 전병이라고 한다. 우리는 전병 대신 역 근처의 가게에서 '아리마 사이다'를 발견하고 마셔봤다. 역시 온천의 탄산수를 사용한 것인데, 설탕과 향료를 넣어 일반 사이다와 맛이 비슷했다.

아리마 탄산수를 넣었다는 아리마 사이다. 박물관에 전시될 법한 생김새지만 엄연히 현재 시판중인 제품이다.
 아리마 탄산수를 넣었다는 아리마 사이다. 박물관에 전시될 법한 생김새지만 엄연히 현재 시판중인 제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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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를 구입한 목욕탕 '다이코노유'를 찾아가 유가타로 갈아입고 온천욕을 즐겼다. 유가타는 아주 좋은 것은 아니고 찜질방에서 입고 돌아다니기 편하도록 면으로 만든 것이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는 다이코노유는 최근에 새로 지은 목욕탕인 것 같다.

중심가에 위치한 제일 유명한 목욕탕 '킨노유(금탕)'는 작고 시설이 오래된 반면, 다이코노유는 커다란 3층 건물에 넓은 욕탕과 찜질방, 식당가, 기념품점, 휴게시설까지 갖춘 큰 상업시설이었다.

바로 옆에 다이코노유와 연결된 고급 호텔 아리마뷰는 간사이 지역 대기업인 한큐에서 운영하는 것이다. 며칠씩 쉬어가는 휴양객이 많은 지역 특성상 이곳저곳에 호텔과 숙박시설이 많았다. 손님들은 젊은 사람도 있었지만 중년 이상의 노인들이 훨씬 많다.

깔끔하고 현대적인 시설로 꾸며져 있는 다이코노유 내부.
 깔끔하고 현대적인 시설로 꾸며져 있는 다이코노유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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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과 암염, 자수정 베드 등이 설치된 암반욕장(찜질방)에서 30여 분 땀을 빼니 몸이 좀 개운해졌다. 추가 비용을 내고 들어가야 하는 곳이라서 사람이 거의 없었다. 둘만의 개인실처럼 쾌적하게 찜질을 하고 각자 남녀탕으로 헤어져 몸을 씻었다. 목욕탕의 위층은 오사카의 나니와 온천에서 본 것처럼 역시 노천탕으로 되어 있다.

물론 여기가 시설은 훨씬 더 좋았다. 하늘을 바라보며 홀로 몸을 담글 수 있는 1인 욕조와 나무 바닥에 편히 누워서 족욕을 할 수 있는 족욕실, 노란 색깔의 물이 나오는 금탕(킨노유)과 투명한 은탕(긴노유) 등 훨씬 넓은 공간에서 다양한 목욕을 즐길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금탕은 진짜 금이 섞인 물은 아니고 철과 황 성분이 물에 녹아 누런빛을 띤다고 한다. 물이 졸졸 흘러나오는 바위 틈이 미네랄 성분 때문에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아리마 온천 마을을 가로지르는 하천 건너편에 '원탕'이라고 표시된 조형물이 서 있다. 마을 곳곳에 원천수가 흘러나오는 '원탕'이 몇 군데 자리하고 있다.
 아리마 온천 마을을 가로지르는 하천 건너편에 '원탕'이라고 표시된 조형물이 서 있다. 마을 곳곳에 원천수가 흘러나오는 '원탕'이 몇 군데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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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마 온천 마을을 둘러보다 발견한 '네네교'. 오른쪽 동상의 여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 부인 네네다.
 아리마 온천 마을을 둘러보다 발견한 '네네교'. 오른쪽 동상의 여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 부인 네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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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쯤 목욕탕을 나와 오사카로 돌아가는 길에 고베 시내에 들렀다. 고베산노미야역에 내려 근처의 유명 관광지인 기타노이진칸을 찾아갔지만 해가 진 뒤라 무엇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다. 이곳은 19세기 개항기에 고베항으로 들어온 서양인들이 모여 살던 동네다.

수십 년 이상 된 고풍스런 서양식 이층 주택이 늘어선 거리는 유럽의 어느 마을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동네 초입에 위치한 스타벅스 카페 건물만 들어가서 구경하고 사진을 찍었다. 마을의 서양식 주택 한 채를 통으로 개조해서 카페로 쓰는 이 집도 유명한 관광 포인트라고 한다.

고베시 기타노이진칸의 스타벅스 내부. 개항기 서양인이 살던 옛 주택을 그대로 살려 카페로 운영하고 있다.
 고베시 기타노이진칸의 스타벅스 내부. 개항기 서양인이 살던 옛 주택을 그대로 살려 카페로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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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노이진칸의 스타벅스 카페 내부
 기타노이진칸의 스타벅스 카페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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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중심가로 내려오는 길에 임안과(林 眼科)를 발견하고 신기해서 카메라에 담았다. 어머, 나랑 성이 똑같잖아. 나중에 알아보니 임(林)은 일본에서 흔한 성 중 하나로, '하야시'라고 읽는다고 한다.

고베산노미야 역 근처 번화가는 한 집 건너 하나가 스테이크집이다. 고베를 여행하는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메뉴가 바로 고베산 와규(和牛)인 '고베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기를 그리 즐기지 않는 나는 그냥 눈요기만 하기로 한다.

한신 난바선을 타고 사쿠라가와역으로 되돌아왔다. 바쁘게 돌아다니다보니 저녁식사도 못했다. 숙소 근처의 편의점에서 사과 한 알과 2리터짜리 생수 한 병을 사서 저녁을 대신했다.

이날 먹은 사과는 이제 우리나라엔 나오지 않는 '골든 델리셔스' 비슷한 약간 퍽퍽한 식감을 가진 품종이다. 가격은 108엔. 원래 가격은 100엔이지만 무엇을 사든 8%의 세금이 붙는 일본에서는 물건값이 대개 이런 식이다. 때문에 물건을 살 때마다 1엔짜리 잔돈이 아주 많이 생겨서 좀 불편했다.

고베 산노미야역 번화가에 위치한 고베규 스테이크 전문점. 근처에 이런 가게가 수십 군데 이상 밀집해있다.
 고베 산노미야역 번화가에 위치한 고베규 스테이크 전문점. 근처에 이런 가게가 수십 군데 이상 밀집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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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atree12fly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일본여행, #고베여행, #고베온천, #아리마온천, #기타노이진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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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사람들을 무의식적인 소비의 노예로 만드는 산업화된 시스템에 휩쓸리지 않는 깨어있는 삶을 꿈꿉니다. 민중의소리, 월간 말 기자, 농정신문 객원기자, 국제슬로푸드한국위원회 국제팀장으로 일했고 현재 계간지 선구자(김상진기념사업회 발행) 편집장, 식량닷컴 객원기자로 일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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