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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 한눈에

  • 세탁소가 전성기를 누렸던 때는 1980년에서 1990년대까지다. 바쁠 때는 새벽 2시 넘어까지 일을 했고, 월수입 200만원 이상을 벌었다니 호황기였다.
정은량 사장이 대성세탁소 앞에 서 있다.
 정은량 사장이 대성세탁소 앞에 서 있다.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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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역에서 역전사거리(아리랑로) 방향으로 몇 발짝 걷다 보면 '대성세탁소'라고 쓴 허름한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전화번호가 두 자릿수 국번인 것을 볼 때 적어도 20년 넘게 간판을 새로 달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세탁소 문을 밀고 들어서자 은은한 묵향이 먼저 맞는다. 세탁소 안에서 '묵향'이라니…. 게다가 옷이 널려 있어야 할 다리미판 위엔 화선지가, 다리미가 있어야 할 자리엔 벼루가 번질번질한 먹물을 담고 있다. 점입가경이다. 그 자리에 40년 경력의 세탁장인 정은량(68) 사장이 서예 삼매경에 빠져 있다.

10평 남짓한 세탁소 안은 옷과 세탁과 수선을 위한 물건들로 발 들이밀 틈이 없다. 세탁을 끝낸 양복 저고리, 바지들은 천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이 걸린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벽 한쪽을 차지한 옷장과 드라이크리닝 기계, 이불 등을 빠는 대형세탁기와 탈수기, 발로 굴러 돌리는 재봉틀, 그 재봉틀 앞에 놓인 등받이가 없는 둥그런 의자까지 정 사장의 인생과 함께 나이가 들었다.

재봉틀만 해도 구입한 지 30년이 넘었단다. 그 때 중고를 샀다고 하니 어쩌면 가게보다도 더 세월의 때가 묻어 있다.

"처음 세탁소를 시작한 게 1974년이니까 벌써 42년이 흘렀네. 클 '대', 이룰 '성', 대성세탁소라고 내가 상호를 짓고 간판을 걸었어. 원래는 한기네닭집하던 이한기씨가 이 자리에서 금마세탁소라고 하고 있었는데 그걸 인수 받았지."

육상선수 꿈 접고

천장에 걸린 옷들과 아주 오래된 재봉틀, 세탁기계, 그리고 얼마나 많이 앉아 일했는지 닳다 못해 갈라진 간이 의자.
 천장에 걸린 옷들과 아주 오래된 재봉틀, 세탁기계, 그리고 얼마나 많이 앉아 일했는지 닳다 못해 갈라진 간이 의자.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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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군 고덕면 사리가 고향인 그는 6살 때 부모를 따라 역전시장통으로 이사를 온 뒤 예산을 떠나지 않았다. 국민학교 때부터 육상에 소질을 보여 고등학교 때까지 선수생활을 했다. 그냥 '논두렁 달음박질' 수준이 아닌 충남대표로 전국체전에 출전해 결승까지 갔을 정도의 실력이다.

예농 토목과(54회)를 졸업한 뒤 가정형편상 대학에 가지 못했다. 그 때 서울 고명상고에서 육상선수로 키우겠다고 데리러 와서 갔는데, 6개월 하고 그만뒀다. 그 때만 해도 배고팠던 시절이었고 운동선수로 성공한다는 게 전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0년도에 군에 입대해 월남에 다녀온 뒤 1973년 제대했다. 그리고 이듬해 세탁소 문을 열었다. 명문인 예농 토목과를 졸업하고 체육특기까지 가진 전도유망한 청년이 세탁소 주인이 됐다니, 왜 그랬을까?

"관공서 등 오라는 곳이 여러곳 있었지. 그런데 그 때 공무원 월급이 3만4000원 밖에 더했간. 한달에 7만 원도 더 번다는데 이거(세탁소) 해야지. 솔직히 처음엔 창피하기도 했어."

정 사장의 예측은 적중했다. 직장인들은 너도나도 양복을 입던 시절이었고, 옷이 귀하니 수선 일감도 많아 문전성시를 이뤘다.

"내가 기술이 없으니까 처음엔 기사를 두고 했어. 어깨 너머로 배웠지. 그 때만 해도 요즘같이 세제가 있길 하나, 약품(세제)을 만들어 쓰던 시절인데 그 기술을 쉽게 가르쳐 줬겠어? 그래도 내가 고등과라두 나와서 이해가 빨랐지. 양잿물 덩어리하고 이것저것 섞어서 만드는데…. 별거 아녀. 모든 기술이 알고 나면 쉬운 거지. 재봉질하고 옷수선하는 건 양복재단사인 친구에게 배우고 그랬어."

요즘과 같이 세탁기계와 세제가 다양하게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함석판에 기름 부어놓고 대솔로 밀어가며 세탁을 했고, 무쇠다리미를 연탄불 위에 올려 놨다가 물에 식혀가며 온도를 조절해 다림질을 했다. 다림질을 한참 하다보면 연탄가스 때문에 어지럼증이 생기기도 했고, 온도를 잘못 맞춰 옷이 눋기도 했다.

"실크 옷이 제일 까다롭고 가죽 옷도 많았는데, 특히 송아지 가죽은 다림질 한 번 잘못하면 절단나지. 옷을 맡길 땐 보통이었는데 태우기만 하면 비싼 옷이 돼 버리네. 허허…. 연탄스팀다리미가 나오고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중고세탁기 들여놓고 하며 조금씩 쉬워졌어. 지금이야 좋은 약품이 얼마나 많어."

20년간 못 올린 가격

정은량 사장이 세탁물을 맡기러 온 손님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정은량 사장이 세탁물을 맡기러 온 손님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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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소가 전성기를 누렸던 때는 1980년에서 1990년대까지다. 바쁠 때는 새벽 2시 넘어까지 일을 했고, 월수입 200만 원 이상을 벌었다니 호황기였다. 그 때 번 돈으로 지금의 건물도 올렸다. 다 찌그러진 함석지붕 세탁소가 번듯한 2층 건물로 변했다.

"이 건물 지을 때가 최고로 좋았지. 1986년도에 3000만 원 들여 지었어. 그 때 일당이 7000원쯤 했을 거야. 건물 짓고 애들 가르치고 그만하면 됐지. 뭐."

1990년대 말로 접어들며 세탁업은 하향곡선을 그린다. 공장형 세탁소가 생기고 옷도 흔해져 수선일이 줄고 기성복이 유행했다. 게다가 IMF가 터지니 세탁소가 늘기 시작했다. 창업하기 쉬운데다가 양복점들도 장사가 안되자 세탁·수선에 손을 댔다. 찾아가지 않는 세탁물도 1년이면 몇 보따리씩 나왔다.

'드라이크리닝·신사복 상의 5000원·하의 3000원, 원피스 8000원, 스커트 3000원… 허리수선 5000원, 신사복단 3000원…' 옷장 한 편 누렇게 빛바랜 세탁요금표 내용이다. 20여년 전에 붙여놓고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니 가격을 안 올렸다는 얘기다. 아니 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경쟁업소가 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한달에 100만 원 벌이도 안 되지만 "노는 심 잡고" 한단다. 그래도 취재를 하는 동안 간간이 세탁물이 들어 온다. 근처에서 식당을 하는 아줌마에서부터 멀리 대흥, 오가에서도 수십년 동안 대성세탁소만을 찾는 알짜배기 단골들도 여럿이다.

정 사장은 지역사회를 향한 애정도 남다르다. 지금까지 보람있는 기억으로 남는 것이 있다면 '역전청년회'를 조직한 일이다. 1980년대 역전 주변은 시장통에 숙박업소와 술집들이 몰려 있어 분위기가 험했다.

"여러 후배들이 젊은 혈기에 툭하면 쌈박질들이나 하고 사고 치고 그랬는데 그 때 청년회를 조직해야겠다고 생각했지. 강경문씨가 회장, 내가 총무를 맡아서 경로잔치도 열고 정화활동도 하고 그랬어. 6년 동안 새마을지도자도 해봤고 얼마전엔 중앙지역번영회를 재건해야겠는데…. 어뜩혀? 내가 비대위원장을 맡았지."

"추사체 선양이 꿈"

다리미판 위에 화선지를 펴 놓고 붓글씨에 몰입하고 있는 정 사장.
 다리미판 위에 화선지를 펴 놓고 붓글씨에 몰입하고 있는 정 사장.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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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소 일이 한산해지기 시작한 20여년 전부터 취미로 붓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각종 전국대회에서 여러차례 특선을 했고 작년에는 추사 김정희 선생 추모 전국휘호대회에서 '차중'을 했을 정도로 기량을 닦았다(* 보통 휘호대회 순위는 장원, 차상, 차중, 차하 순).

어떤 때는 다림질하는 시간보다 붓글씨 쓰는 시간이 많을 정도니 세탁소에서 묵향이 날 수밖에 없다.

"예전엔 지방·축문 써달라고 많이들 왔어. 집 지을 때는 상량보문 써주기도 하고, 가훈도 지어주고, 또 한 때는 꽃집에서 축하화분 리본글씨 부탁도 많이 들어오데. 그러다 보니 서예에 관심도 생기고 문화원에 가서 배우고 그랬어."

다리미와 세탁재료들이 한쪽으로 밀려나고 그 자리를 벼루가 차지하고 있다.
 다리미와 세탁재료들이 한쪽으로 밀려나고 그 자리를 벼루가 차지하고 있다.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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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받은 세탁물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여전히 신문지에 서체연습을 하고 있는 그에게 앞으로 꼭 해보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으니 "운동은 근력 떨어져 못하고, 산악회도 만들어 전국 안 다녀 온 산없이 다 가봤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꼭 이루고 싶은 일이 있다면 "추사체를 연마하고 보급하는일"이란다.

평소에 좋아하는 글귀를 부탁하니 깨끗한 화선지 한 장을 펴놓고 일필휘지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뒤 하늘의 뜻을 기다림)'이라 쓴다.

청·장년기엔 오롯이 지역사회를 지켰고, 이제는 예산의 자랑인 추사문화보급에까지 열성인 대성세탁소 정은량 사장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 자리에서 후배들을 지켜주길 기원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와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세탁소, #대성세탁소, #재봉틀, #역사, #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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