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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95km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는 것보다 거실에서 현관문을 나서는 것이 더 힘들다."

달리기하는 사람들 사이의 우스갯말이다. 무엇이든 아무리 마음을 단단히 먹어도 실천은 어렵다. 좋아서 시작한 오지 레이스이지만 때론 나도 멈추고 싶을 때가 있다. 편하게 즐기고 싶은 욕구가 살아날 때, 극한을 넘어야하는 한계에서는 그만 나도 주저앉고 싶다. 하지만 이보다 더 무서운 건 이따금 고개를 드는 망각이다. 내가 지금 달리는 이유를 잊는 것이다.

감악산은 경기 5악중 하나다.
▲ 파주 감악산 정상에서 감악산은 경기 5악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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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더워 등산객이 없다
▲ 범륜사 지난 너덜지역 너무 더워 등산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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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주말은 산행에 푹 빠졌다. 그렇다고 기왕 시작한 국내 명산 100곳의 정상 등반을 서둘러 마치고 싶은 건 아니다. 매번 사막이나 오지 레이스를 앞두고 벼락치기 운동을 하는 내 자신이 싫어서다.

폭염경보가 내려진 지난 7월 첫째 주말, 경기 지역이 37도를 웃도는 열기 속에 파주 감악산으로 향했다. 범륜사 입구를 들머리로 숯 가마터 흔적이 간간이 보이는 급경사의 너덜지역을 따라 정상까지 단박에 올랐다. 산행 길에 서면 잊었던 과거를 회상하고, 내가 가는 길을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다.

2013년 6월, 나는 6일 동안 20개국 38명의 선수들과 함께 여전히 베일에 싸인 부탄의 산야 200km를 달렸다. 부자를 꿈꾸지 않지만 행복 지수가 최상위권인 나라, 첫 눈이 오면 휴일인 나라. 세상에 그런 나라가 있을까 싶지만 광대한 히말라야 동쪽 끝 은둔의 왕국, 부탄이 바로 그곳이다.

레이스 첫째 날 저녁, 가까스로 도착한 캠프에서 자포자기의 심정이 요동쳤다. 무너져 내리는 어깨, 근육 경련 후 간신히 자리를 잡은 전신의 근육이 다시 불룩 거릴 때 마다 찢어지는 통증이 되살아났다. 히말라야를 가장 가까이에서 올려다 볼 수 있는 호사는 나와 거리가 먼 얘기였다.

부탄은 국민 75%가 라마불교를 믿는 국가다
▲ 부처님의 미소 부탄은 국민 75%가 라마불교를 믿는 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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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나카종에서 탁상곰파종까지
▲ 부탄레이스 200km 동선 푸나카종에서 탁상곰파종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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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계곡에서
▲ 결승선 보이는 호랑이 둥지(탁상곰파종) 파로계곡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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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 시간 전, 푸나카 종(Dzong)을 출발해 수목 빼곡한 주변 산야 30.7km를 달리다 온 몸의 근육을 뒤트는 경련을 뿌리치기 위해 발버둥쳤다. 흙바닥에 고꾸라져 온몸을 비틀다 원주민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면했다. 임시 캠프인 초르텐 닝보(Choryen Nyngbo) 수도원에 도착하자마자 요사채(승려가 기거하는 방)에 쓰러져 몸을 움크린 채 깊은 잠에 빠졌다. 완주는 고사하고 목숨까지 내놓을 뻔했던 아찔한 순간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는 선수 여러분을 존경합니다. 여러분의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일상에 안주하기보다 도전의 선도자로 이곳에 모였기 때문입니다. 레이스를 못한다고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모든 선수가 자신의 한계를 경험할 수 있도록 돕고 지원할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나는 여러분을 기다릴 것입니다. 부탄의 6월은 나무 거머리가 득실거립니다. 주변 환경도 위험합니다. 그러니 달리다 힘들면 쉬어가십시오. 다만 내일 레이스에 지장이 없도록 너무 지체는 마십시오. 최선을 다하십시오. 행운을 빕니다."

매일 아침, 레이스가 시작되기 전에 대회 운영자인 독일의 스테판이 브리핑을 할 때 어김없이 반복되는 말이다. 그는 늘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주고 손을 굳게 잡아 주었다. 순위 경쟁에 익숙한 나는 그의 말에 번번이 놀라곤 했다. 선수 개개인의 능력을 존중하는 운영방식에 존경스런 마음까지 들었다. 인간은 각자의 능력이 다르다. 다름을 인정하는 다양성과 포용의 정신이 밴 경기운영 방식이 멋졌다. 그의 격려는 매번 내가 다시 출발선상에 서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의 배려는 모두를 감동시켰다
▲ 스테판의 경기 브리핑 그의 배려는 모두를 감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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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탄은 불교와 일상이 공존한다
▲ 선수의 역주 부탄은 불교와 일상이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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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기원과 악귀를 쫓는 풍습이다
▲ 생활에 스민 남근 숭배 벽화 출산기원과 악귀를 쫓는 풍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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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km의 레이스 둘째 날, 물안개 속에서 종아리에 들러붙는 거머리를 때내며 CP1을 통과했다. 설사와 고산증을 안고 해발 3700m의 CP2를 넘었다. 그리고 결국 9시간 만에 2495m에 위치한 마을 공터의 농장에서 밤이슬을 피했다.

저녁 7시 15분, 마지막으로 캐나다의 여자 선수 샌디가 들어왔다. 호랑이가 득실거리는 산야에서 12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런데 잠시 후 그녀의 찢어지는 비명소리에 캠프가 발칵 뒤집어졌다. 영문도 모르고 그녀 주위로 몰려갔을 때 '오 마이 갓!' 모두가 경악했다. 산거머리 대여섯 마리가 그녀의 배꼽에 들러붙어 뒤엉켜있었다. 처절했던 하루의 여정을 위로 받기에 이 밤은 너무 짧았다.

승리, 완주, 환희 뒤의 좌절과 실패 그리고 가난.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맛보기 위해서는 가장 거칠고 힘든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종일 내리던 비가 멈췄다. 캠프 바로 옆으로 흐르는 강물 소리가 더 요란하게 귓전을 때렸다. 행복해지기 위해 서두르지 않지만 국민의 97%가 행복하다고 하는 나라. 그 곳에 내가 누워있다. 자신의 몸을 태워 의미 있는 성과를 이루고 거기에서 새로운 희망을 볼 수 있다면... 아~ 졸음이 몰려왔다.

산거머리
▲ 선수들을 공포에 떨게 한 산거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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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거머리 제거 장면
▲ 선수 배꼽에 들러붙은 산거머리 제거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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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도 그 다음날에도, 절대 고독과 극한의 상황에서 음습한 수풀과 질컥이는 진흙탕 길을 달렸다. 매일 3천 미터 이상을 오르내리며 두통과 구역질로 여러 차례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을 뻔했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레이스는 대자연과 겨루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나를 흔들어 깨우는 채찍질의 연속이었다. 하마터면 영영 못 일어날 뻔 했던 악몽에서 깨어났다. 레이스 6일째 날 정오, 짙게 낀 물안개 사이로 해발 3430m 파로 계곡 정상 언저리의 결승선인 탁상곰파 종(The Tiger's Nest Monastery)이 장엄한 모습을 드러냈다.

파로계곡에서
▲ 호랑이 둥지(탁상곰파종)가 보이는 파로계곡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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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한줌 에너지까지 모두 태웠다
▲ 마지막 결승선을 향하여 내 한줌 에너지까지 모두 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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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선수 조와 함께
▲ 결승선 통과 후 환희 독일 선수 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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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탄에서 우리만의 전설을 남겼다.
▲ 완주후 인증샷 나는 부탄에서 우리만의 전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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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념들이 쌓일수록 할 수 없는 핑계가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하기 싫은 이유를 들이댈수록 목표는 서서히 잊혀진다. 내 안의 열정을 잠재우는 망각 때문이다. 나도 때론 멈추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다'는 분명한 한 가지 이유가 나를 다시 일어서게 했다.

삶의 목표가 분명하면 길은 보인다. 너무 비장하지 않게, 지치지 않고 목표를 향한 끈을 놓지 않으면 가던 길은 마저 갈 수 있다. 혹시 목표를 잊고 살았다면 그건 당신에게 도전의 열정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일상의 무게에 가려진 것이다.


태그:#사막, #오지, #김경수, #부탄, #직장인모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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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을 핑계삼아 지구상 곳곳의 사막과 오지를 넘나드는 조금은 독특한 경험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오지레이서라고 부르지만 나는 직장인모험가로 불리는 것이 좋다. <오마이뉴스>를 통해 지난 19년 넘게 사막과 오지에서 인간의 한계와 사선을 넘나들며 겪었던 인생의 희노애락과 삶의 지혜를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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