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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탄광마을에 위치한 초등학교에서 4학년 친구들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아침 시간, 수업 틈틈이 짬을 내어 그림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림책 같이 읽으며 나온, 아이들의 말과 글을 기록합니다. - 기자말

"나도 오빠가 있으면 좋겠다."
"야! 말도 마, 오빠는 그냥 조용히 있는 게 도와주는 사람이야."

교실이 때아닌 오빠 논쟁으로 뜨거웠다. 나도 여동생 하나를 둔 오빠로서 귀가 솔깃했다. 가까이서 들어보니 발단은 영지네 오빠였다. 영지가 자상하고 라면 잘 끓여주는 자기 오빠를 언니만 있는 진서 앞에서 자랑했나 보다. 진서는 자기 멋대로인 언니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영지 이야기를 듣고 오빠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그러자 악덕(?) 오빠를 둔 연서와 금빈이, 성희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정신 차리라고 반박하던 상황이었다.

세 명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오빠의 만행은 끝이 없었다. 억울하고 속상한 일들은 어찌 그리 많은지 주변 사람들은 그저 듣고 있어야만 했다. 갑자기 오만 가지 이야기를 듣게 된 진서는 갈수록 얼굴이 창백해지며, 오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취소하겠다고 하였다. 영지도 은근슬쩍 오빠가 짜증 날 때가 있다며 꼬리를 내렸다. 여동생파의 완전한 승리였다.

오빠와 여동생, 이 두 사람은 절대로 친해질 수 없는 것인가? 이런 고민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앤서니 브라운의 <터널>은 영국도 한국과 별반 차이 없음을 잘 보여준다. 뜨거워진 오빠-여동생 논쟁을 식힐 겸 아이들과 <터널>을 읽었다. 물과 기름 같은 로즈와 그녀의 오빠를 만나보자.

달라도 너무 다른 두 남매
 달라도 너무 다른 두 남매
ⓒ 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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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 때도 없이 우당탕! 외국 남매의 등장


로즈와 오빠는 비슷한 데가 하나도 없는 남매다. 동생이 자기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공상할 때, 오빠는 밖에서 친구들과 웃고 떠들고 뒹굴며 뛰어놀았다. 밤이면 오빠는 곤히 잠들었지만, 동생은 밤에 들려오는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말똥말똥 깨어있었다. 둘은 언제나 얼굴만 마주치면 티격태격했다.

"나도 우리 누나랑 맨날 싸우는데."
"넌 누나지? 난 동생이 때려."

투닥거리는 대목이 나오자 역시나 우리 애들도 할 말이 산처럼 많아졌다. 형제자매와 투닥거린 경험담은 언제나 흥분과 고성을 동반하기 마련이라 이내 반이 시끌벅적해졌다. 자극적인 소재의 그림책은 약간의 소란을 감수해야 한다. 어쨌든, 어느 날 아침 로즈 엄마는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아들 딸에게 버럭 화를 낸다.

"같이 나가서 사이좋게 놀다 와! 점심때까지 들어오지 마!"

둘은 동네 어귀에 있는 쓰레기장으로 향했다. 오빠는 동생이랑 같이 놀기 싫은 눈치다. 연서가 저 표정 하며 태도가 꼭 자기 오빠라며 큭큭거렸다. 자꾸 로즈가 뒤를 따라오자 오빠가 투덜거렸다.

"왜 따라왔어?"
"누가 오고 싶어서 왔어? 나도 이렇게 끔찍한 데 오기 싫어. 너무 무섭단 말이야."
"어휴. 겁쟁이! 뭐든지 무섭대."

로즈는 낯선 곳이 두려웠는지 나무 상자 위에 앉아 가지고 온 책을 펼쳤다. 독서가 취미인 다영이는 그 장면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문자의 세계를 즐기는 사람은 책 한 권이 주는 위안을 아는 법이다. 로즈가 책장을 넘기는 사이 오빠는 혼자서 여기저기 살피러 다녔다. 조금 있다가 오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리 와 봐!"

오빠를 기다리다 지쳐 터널 속으로 들어가는 로즈
 오빠를 기다리다 지쳐 터널 속으로 들어가는 로즈
ⓒ 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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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와 오빠를 알 수 없는 공간으로 인도하는 터널

동생은 조심스레 오빠가 있는 데로 다가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이 뚫려있었다. 함께 들어가 보자는 오빠의 제안에 로즈는 괴물이나, 마녀가 있을지도 모른다며 거절한다. 오빠는 어린애처럼 징징거리지 좀 마라면서 성큼성큼 들어가 버린다.

"저거 봐, 저거 봐 오빠들이 원래 저래."
"뭔솔(무슨 소리냐의 줄임말)? 나는 안 그런데."

아까부터 기가 오른 여동생파 인원들이 자꾸 드세게 나오자, 여동생을 둔 남학생들이 발끈했다. 그림책 한 편 읽으면서 이렇게 수시로 으르렁거린 건 처음이었다. 줄거리 끊지 말라며 호통 한 번 치고서, 불안하게 터널 밖을 서성이는 로즈에게 집중했다. 로즈는 오빠가 나오기만을 기다렸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소식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지만 로즈는 할 수 없이 터널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터널 속은 컴컴하고, 축축하고, 미끈거리고, 으스스했다. 터널 반대편으로 나가 보니 고요한 숲이 있었는데 오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숲은 갈수록 컴컴하고 울창해졌다. 동생은 자꾸만 늑대와 거인과 마녀가 떠올라 당장에라도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무에 늑대 있어. 지팡이 같은 거 잡고 있어."
"어디? 어! 진짜다. 집이랑 사람 얼굴도 있어. 몬스터 나무네."

아이들은 나무줄기 곳곳에 숨은 형상들을 귀신 같이 발견했다. 나도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서 눈을 크게 뜨고 살폈는데 늑대까지만 보이고 나머지는 못 찾고 헤맸다. 관찰력 떨어지는 담임이 안쓰러웠는지 경성이가 팔을 쭉 뻗어 하나하나 찍어주었다. 신기했다. 분명 아까는 없었는데 설명을 듣고 나니 이해가 되었다. 활자에 익숙한 어른보다 아이들은 화면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깊은 숲에 등장하는 나무. 어떤 형상들이 숨어있을까?
 깊은 숲에 등장하는 나무. 어떤 형상들이 숨어있을까?
ⓒ 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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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물보다 진하다, 겁쟁이 로즈의 대활약

"혼자 돌아가 버리면, 오빠는 어떻게 될까? 흑흑"

마침내 로즈는 겁에 질려 마구 뛰기 시작한다. 빨리빨리, 빨리빨리... 그러다가 숨이 차서 멈추어 서자, 빈터가 나타났다. 그런데 거기에 돌처럼 굳어버린 오빠가 서있었다. 동생은 차갑고 딱딱한 돌을 와락 껴안고 운다.

"흐흐흑. 어떻게 흐흑. 내가 너무 늦게 왔나 봐 으으."

그러자 돌은 서서히 색깔이 변하면서 부드럽고 따스해졌다. 돌이 아주 조금씩 움직이더니 어느새 오빠로 바뀌었다. 꺄아아~ 이 감동적인 순간에 난데없이 여자애들이 비명을 질렀다. 남매끼리 꼭 붙어서 안고 있는 모양새가 영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얘들아, 꼭 너희 같지 않아? 매번 싸우고 화해하고."
"아니요. 쟤들이 우리보다 더한대요?"

돌로 변한 오빠를 살려내는 로즈
 돌로 변한 오빠를 살려내는 로즈
ⓒ 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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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누이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방식

어둠이 무서워 쉬 잠들지 못하는 로즈를 깊은 숲 속에 이르게 한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민영이는 '가족사랑'이라고 했고, 진원이는 '모험심'이라 했다. 답이 그 어느 것이든 나는 로즈야말로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용기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성립된다. 그녀가 괴물과 마녀가 나올지 모른다고 칭얼거리거나 나무가 늑대처럼 보인다고 울먹여도 결국 그것은 말일 뿐이다.

붉은 옷을 입은 소녀는 축축하고 미끈거리는 터널을 기고, 으스스한 숲을 지나 오빠를 구했다. 요란한 내적 갈등을 이겨내고 가족을 구한 소녀는 용감하다. 영우는 이제 다섯 살 먹은 여동생이 로즈처럼 자랐으면 좋겠다고 했다. 정균이도 영우와 완전히 같은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그럼 반오빠파 여학생들은 어땠을까? 당연히 오빠가 위험에 처하면 구하겠다고 했다. 이건 다투는 것과 다른 문제라고 못 박았다. 오빠와 여동생은 '애증의 관계'라지만 겉으로 드러난 '증'보다 속에 숨은 '애'가 더 컸다. 성희의 단호하게 다문 입술에서 두터운 애정이 느껴졌다. 오누이의 사랑은 이런 식이었다.



터널

앤서니 브라운 글 그림, 장미란 옮김, 논장(2018)


태그:#터널, #남매, #오누이,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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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미래의창 2024>, <선생님의 보글보글, 산지니 2021> 을 썼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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