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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색일

한강과 임진강은 국토를 동서로 가로 지른 뒤 김포만 어귀에서 합류하여 사이좋게 서해로 흘러내린다. 하지만 남북을 이은 긴 하류의 두 강둑에는 쌍방 병사들이 각각 총구를 남녘과 북녘으로 겨냥한 채 낮과 밤을 지키고 있다.

38선, 휴전선이 그어지기 이전, 이 강둑에는 바지저고리를 입은 선남선녀들이 밤이면 어른들의 눈을 피해 사랑의 밀어를 속삭였으리라. 그러나 분단 이후 이 강둑에는 그런 낭만적인 정경은 하나 찾아볼 수 없고, 무장한 군인들의 행렬이 아침저녁으로 한 차례씩 있을 뿐, 그밖에는 고요와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 측 삐라(왼쪽) 그리고 동 시기 유엔군 측 삐라(오른쪽)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 측 삐라(왼쪽) 그리고 동 시기 유엔군 측 삐라(오른쪽)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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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 1, 3주 수요일은 수색일이다. 아마도 상급부대 담당 참모가 수색일을 기억하게 좋게 수요일로 정한 모양이었다. 그날은 2개 소대씩 돌아가며 수색을 나갔다. 1개 소대는 부대 뒷산 심학산 기슭을, 다른 1개 소대는 강변 수색이었다. 그날 우리 소대 담당구역은 강변이었다.

수색의 목적은 숲이나 동굴, 계곡같이 은폐된 곳에 숨어 있는 무장 공비나 간첩을 색출하는 일이지만 강변 수색의 경우는 거의 노출된 곳이라 주로 살포된 '삐라'를 줍는 일이었다.

1년 열두 달 웬 삐라가 그렇게나 많이 쏟아지는지 사방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북한에서 풍선에 실어 띄운 삐라는 줍는 즉시 마대에 담아 중대로 가져 와 소각하거 나 대대로 보내지만 줍는 순간 보지 않을 수 없다.

유치한 선전문구

그 삐라들은 유치하고 상투적인 선전문구들이었다.

'우리 민족의 태양이신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
'미제의 주구 박정희 파쇼도당'
'국방군 장병이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기다'

문체도 딱딱하고 지질도, 사진도 조잡했다. 평양 만수대의 김일성 생가 모습, TV 수상기가 놓인 평양 시내 어느 아파트 방안의 모습, 백악관 뜰에서 존슨 대통령 부부와 박정희 대통령이 나란히 포즈를 취한 사진, 월북자의 기자회견 장면 따위들이었다.

어떤 때는 줍고 보면 우리가 북으로 보낸 삐라들도 더러 있었다. 아마도 풍향을 잘못 가늠한 탓에 우리 쪽으로 떨어진 모양이었다. 삐라의 내용은 북의 것보다는 한결 수준이 높았다.

'자유대한은 국민들이 대통령을 직접 뽑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박정희, 윤보선 두 후보가 대통령선거전 때 장충단 공원에서나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수십만 군중을 상대로 유세하는 장면을 앞뒷면에 똑같은 크기로 인쇄한 것이다. 어떤 날은 터진 풍선과 함께 미처 흩날리지 못한 삐라 뭉치가 박스째로 떨어진 걸 줍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는 참 삐라도, 구호도 참 많았다. 내 어렸을 때는 6.25 전후로 비행기들은 많은 삐라를 쏟았다. 그리고 거리마다 건물마다 벽보도 늘 너절하게 빼곡히 게시돼 있었다. 무슨 행사 때마다 구호도 지천으로 많다. 어느 정치평론가는 후진국일수록, 독재가 심할수록 삐라와 벽보, 구호가 많다고 했다. 그날 수색 소득은 삐라 세 자루였다.

파월 명령

중대 행정병 오 병장이 연대에서 문서수발을 하고 돌아왔다. 그가 나에게 보여준 인사 명령지를 보니 우리 소대 김홍기 일병에게 파월 명령이 났다. 나는 깜짝 놀라 점심식사가 끝난 그를 내 막사로 불렀다. 김 일병은 충북 괴산 출신으로 충북대 2학년 재학 중에 입대했다.

파월 직전의 김홍기 일병(1969. 12.). 그도 살아있다면 이제는 일흔이 넘었을 것이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냐요?
 파월 직전의 김홍기 일병(1969. 12.). 그도 살아있다면 이제는 일흔이 넘었을 것이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냐요?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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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대원 가운데는 대체로 학벌이 높을수록 눈치도 빠르거나 요령도 좋았고, 빤질빤질하게 말만 앞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김 일병은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순박한 '충청도 촌놈' 티가 물씬한 녀석이었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몸매가 가냘픈, 눈이 유난히 큰 녀석으로, 전입 초부터 소대원의 식기를 한 마디 불평도 없이 자기가 도맡아 닦는 성실함을 보였다.

그가 나에게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파월 지원을 한 게 몹시 서운했다.

"어떻게 된 거야. 김 일병?"
"지가 중대 서무계 편에 연대 인사과로 파월 명령을 내려 달라고 손 좀 썼어유."

"뭐? 김 일병이 손을 썼다고?"
"어디 맨 입으로 되나유."

참 재미있는 나라다. 처음 파월이 시작될 때는 서로들 안 가겠다고 돈과 백을 썼다.

얼마 후 파월 장병들이 많은 전투수당을 받고, 귀국 때는 일제 캐논 카메라, 소니 녹음기 등을 갖고 와서 거드름을 피웠다. 그러자 그 무렵에는 파월지원자가 몰려 경쟁률이 높았다.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

그래서 그 즈음 상급부대 인사 담당자는 한 철인 모양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펜대 놀리는 사람은 이래저래 뇌물이 들어오게 마련이었다.

"왜 지원을 했나?"
"이참에 외국 구경도 하고, 부모님에게 송아지 한 마리라도 사드릴려구유. 그동안 지 대학 입학금 마련한다고 집에서 기르던 황소를 팔았시유."

이미 쏜 화살이었다. 나에게는 그의 파월 명령을 취소할 힘도 능력도, 그의 집에 송아지를 마련해 줄 수도 없었다.

"김 일병, 몸조심해라. 죽으면 말짱 헛일이다."
"네, 소대장님 염려해 줘서 고맙구만유. 꼭 살아서 돌아올 게유."

정부의 파월 명분은 '한국전쟁 당시 우방의 파병에 대한 보답과 세계 평화에 기여함'이었다. 하지만 파월 지원자들의 대체적인 동기는 그런 거창한 명분보다 촌놈이 언제 해외로 나들이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개중에는 이 참에 외국 구경도 하고, 내심으로는 한밑천 벌어 오겠다는 그런 물욕도 숨겨져 있었다.

게다가 당시 인기 가수 김추자가 부른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도 한몫 거들었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이제서 돌와왔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너무나 기다렸네
굳게 닫힌그 입술 무거운 그 철모 웃으며 돌아왔네
어린동생 반기며 그 품에 안겼네 모두 다 안겼네
말썽 많은 김총각 모두 말을 했지만
의젓하게 훈장달고 돌아온 김상사
동네사람 모여서 얼굴을 보려고 모두 다 기웃기웃
우리 아들 왔다고 춤추는 어머니 온동네 잔치하네
폼을 내는 김상사 돌아온 김상사 내 맘에 들었서요
믿음직한 김상사 돌아온 김상사 내 맘에 들었서요

월남 경기

그들은 귀국길에 미군 P.X.에 들러 일제 카메라나 전자제품들을 아귀처럼 구입하여 휴대하고 부산항으로 귀국했다. 그때 그런 카메라나 전자제품을 구입치 않고 귀국한 병사는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일본인들은 중간에서 피 한방을 흘리지 않고, 이 땅의 젊은이의 핏값을 가로챘다. 참 어처구니없었던 그 당시 월남 경기였다.

예로부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데 누가 거저 우리의 국군 장비를 현대화시켜 주고, 고속도로 재원을 조달해 주고, 가난한 농민에게 송아지를, 이 땅의 젊은이 어깨 위에 일제 카메라를 메어 주랴.

하지만 단순히 돈 때문에 남의 나라 전쟁에 끼어드는 것은 비극이었다. 그 누구든 생명은 그 고귀하고 존엄한 것 인데….

나는 지금도 파월참전용사 얘기만 나오면 키가 후리후리하고 몸매가 가냘픈, 눈이 유난히 큰 김홍기 일병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는 그때 과연 무사히 귀국했을까? 

산남리부대에 근무할 때 소대원들과 함께 한강 하류에서 북한을 배경으로(왼쪽부터 유 하사, 최 상병, 김홍기 일병, 기자다. 한 사람 건너 이발사 임 상병 등이다. 1969. 12.).
 산남리부대에 근무할 때 소대원들과 함께 한강 하류에서 북한을 배경으로(왼쪽부터 유 하사, 최 상병, 김홍기 일병, 기자다. 한 사람 건너 이발사 임 상병 등이다. 1969. 12.).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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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글에 계속)


태그:#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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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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