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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로는 임진왜란 발발시 영천의 주요 의병장인 정세아 창의군에 가담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데 앞장섰다. 사진은 정세아 의병장이 종전 이후인 1599년(선조 32)에 지어 제자들을 기르고 학문에 전념했던 강호정(경북도 유형문화재 71호)이다. 이 건물은 1974년 자양댐 건설로 본래 건립지 일대가 수몰되는 바람에 현재 위치로 이건되었다.
 박인로는 임진왜란 발발시 영천의 주요 의병장인 정세아 창의군에 가담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데 앞장섰다. 사진은 정세아 의병장이 종전 이후인 1599년(선조 32)에 지어 제자들을 기르고 학문에 전념했던 강호정(경북도 유형문화재 71호)이다. 이 건물은 1974년 자양댐 건설로 본래 건립지 일대가 수몰되는 바람에 현재 위치로 이건되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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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분의 기일(忌日, 돌아가신 날)에 음식을 차려놓고 그 분의 명복을 빌면서 추모하는 행사를 제사 또는 기제사(忌祭祀)라 한다. 즉, 제사는 특정한 개인을 기려 치른다. 그에 비해 차례는 설이나 추석 등 명절에 지내는 제사로, 개인에 대한 제사가 아니라 한 해 동안 기제사로 모셔온 모든 조상을 한꺼번에 모신다. 특히 밤중에 지내는 기제사와 달리 차례는 오전에 진행된다.

차례는 기제사에 비해 절차가 비교적 간소하다는 차이도 있다. 모시는 조상들이 많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을 법하지만, 축문(祝文, 제사 때 읽은 문장)을 읽지 않으며 술도 한 번만 올린다. 음식도 밥과 국을 올리는 기제사와 달리 설날 떡국, 추석 송편 식으로 가볍게 준비한다.

절차도 많이 간단하다. 물론 기제사의 절차가 집집마다 다르듯 차례 역시 마찬가지인데, 대략 향을 피운 다음 제주(祭主, 제사의 주체)가 술을 올리고 두 번 절하는 강신(降神, 신이 나타남), 참가자들이 함께 두 번 절하는 참신(參神, 신께 모두 절함), 제주가 술을 올리는 헌주(獻酒)를 거쳐 숟가락과 젓가락을 음식과 반찬 접시에 얹고, 함께 묵념하고, 수저를 거둔 뒤 모두 두 번 절하는 일, 마지막으로 지방(紙榜, 죽은 분의 이름을 쓴 종이)을 사르는 순서로 진행된다.

기제사와 차례 때 떠올릴 만한 시조


충북 진천군 문백면 송강사(정철 사당 영역) 경내의 정철 시비
 충북 진천군 문백면 송강사(정철 사당 영역) 경내의 정철 시비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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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제사나 차례를 지낼 때 떠올릴 만한 시조로는 정철의 '훈민가'와 박인로의 '조홍시가'가 대표적이다. 훈민가(訓民歌)는 이름 그대로 백성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정철이 지은 시조이다. 훈민가는 지난 날 국정 국어 교과서에 많이 실려 있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어버이 살아실 제 섬기기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달프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

정철(鄭澈, 1536~1593)은 대략 '어버이가 살아계실 때에 정성을 다하여 섬겨라. 두 분께서 돌아가시고 나면 아무리 슬퍼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사람은 절대 효도를 할 수 없다. 이 일만은 사람이 평생에 걸쳐 다시 할 수 없는 일이다' 정도의 주제를 노래하고 있다.

아바님 날 나흐시고 어마님 날 기르시니
두 분 곳 아니면 이 몸이 살아시랴
하날 같은 가업슨 은덕을 어디 다혀 갚사올고

훈민가의 또 다른 한 수인 이 시조는 대략 '아버지께서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께서 나를 기르셨으니 두 분이 아니었으면 이 몸이 어찌 이렇게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늘만큼이나 끝없는 은혜를 어떻게 다 갚을 수 있으랴' 정도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정철의 훈민가는 너무나 내용이 직설적이어서 교훈을 잘 전달하기는 하되 감동적이지는 못하다. 이는, 논설문이나 설명문이 주제를 전달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시나 소설보다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약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정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독자들은 충분히 알지만, 그렇다고 독자들이 훈민가를 읽고 큰 감동을 받지는 않는다는 뜻이다(관련기사 : 잘 익은 홍시 가져간들 소용없다네).

도계서원 앞의 주차장과 강당 건물 사이에 세워져 있는 노계시비
 도계서원 앞의 주차장과 강당 건물 사이에 세워져 있는 노계시비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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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ᅵ 아니라도 품음직도 하다마는
품어 가 반길 이 없을새 글로 설워하나이다 

노계 박인로(朴仁老, 1561∼1642)의 '조홍시가(早紅柿歌)'이다. 이 노래 역시 교과서에 많이 실렸기 때문에 웬만한 국민들이 다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조홍시가는 훈민가와 달리 '지나간 후면(부모가 타계한 후면)'이나 '두 분 곳 아니면(두 분이 아니었으면)' 같은 직설적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훈민가처럼 '부모가 돌아가시고 나면 이제 자녀는 더 이상 효도를 할 수 없다'라거나 '두 분이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을까?' 식으로 사실을 전달하는 말투를 쓰지 않는다.

'품어가 반길 이 없을새'라는 표현은 박인로의 감칠맛나는 언어 구사력을 보여준다. 박인로는 '바구니에 담긴 홍시가 너무나 예쁘고 맛있어 보인다. 비록 값비싼 유자는 아니지만 가슴에 품어서 집으로 가져가 부모님께 드리고 싶다. 하지만 그것을 집에 가져간들 무엇하나. 어여쁜 홍시를 가져가도 그것을 보고 반가워하실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데……. 나는 그것이 슬프다'라고 말한다. 딱딱한 직설적 표현 일색의 훈민가와는 비교를 할 수 없을 만큼 박인로는 문학적 언어를 구사한다는 뜻이다.

정세아 의병 부대의 일원이 되어 임진왜란에 참전한 박인로

박인로는 32세 때 임진왜란을 맞이한다. 영천에 살고 있던 그는 이미 13세 때부터 이름을 떨친 시인이었지만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의병 전쟁에 뛰어든다. 정세아 의병장 부대의 간부가 되어 왜적들과 싸운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조라포(통영시 광도면 용호리) 만호 등을 지내며 수군으로 활동한다.

하지만 그는 일반적으로 정철,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 3대 시인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가 고향 영천에서 의병으로 종군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학교에서도 그 점을 언급해주는 수업은 거의 하지 않는다. 문학작품과 작가의 생애가 가지는 연관성을 생각할 때 이는 안타까운 일이다.

도계서원 전경
 도계서원 전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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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로의 대표 가사 작품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사이에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가사 '태평사'와, 종전 후 전쟁의 비애와 평화에 대한 갈구를 담은 가사 '선상탄' 등이다. 그의 가사는 단순히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거나, 임금에 대한 충성을 읊은 조선 전기의 가사들과 내용이 판이하다. 그의 가사는 사회성이 짙다. 그런 점에서 박인로는 한국문학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박인로는 어릴 때부터 그 같은 경향의 문학 작품을 창작해낼 기미를 엿보였다. 열세 살 때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대승음(戴勝吟)'도 사회비판적 경향의 한시였다.

午睡頻驚戴勝吟 낮잠 자주 깨우는 뻐꾸기 울음
如何偏促野人心 어째서 들사람만 애타게 하나
啼彼洛陽華屋角 저 서울 화려한 집 처마에서 울어
令人知有勸耕禽 밭갈이 권하는 새 있는 것을 알게 하여라

1707년(숙종 33), 후대 선비들이 마음과 힘을 모아 박인로를 모시는 도계서원(道溪書院)을 세웠다.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 383번지 도계서원 앞에는 연못이 있어 서원의 전경과 그 앞에 붉게 핀 배롱나무를 황홀하게 비춰준다. 연못은 서원과 박인로 묘소의 사이에 또 다른 경치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도계서원 앞 작은 연못 건너편 산비탈에 있는 박인로 묘소
 도계서원 앞 작은 연못 건너편 산비탈에 있는 박인로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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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풍농월 아닌, 현실 세계의 애환을 노래한 박인로의 문학

박인로는 9편의 가사와 67수의 시조, 그리고 110수의 한시를 남겼다. 그 중 가사 '태평사'를 읽어본다. 박인로는 자신의 최초 가사 작품인 '태평사'를 통해 전쟁에 지친 병사들을 위로했다. 이 가사는 전쟁이 끝나면 모두가 태평성대를 구가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노래한 4·4조, 72절 146구의 운문이다. 특히 마지막 부분은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한국인들의 마음에도 절실히 와 닿은 간절한 기원인 듯 여겨져  여기 옮겨본다.
  
하나님아
우아방국(佑我邦國)하샤 만세무강(萬歲無彊) 눌리소셔
당우천지(唐虞天地)예 삼대일월(三代日月) 비최소셔
어만사년(於萬斯年)에 병혁(兵革)을 그치소셔
경전착정(耕田鑿井)에 격양가(擊壤歌)를 불니소셔

박인로 가사의 바람직하지 못한 특징인 한자어 남용이 두드러져 읽어내기가 어렵다. 뜻으로 읽어보면 '하느님이시여 / 이 나라를 도우시어 만세무강 누리게 하소서 / 요순 같은 태평시에 삼대일월 비추소서 / 천만 년 동안에 전쟁을 없게 하소서 / 밭 갈고 우물 파서 격양가를 부르게 하소서' 정도의 내용이다.

박인로는 노년에 장현광과 교유하면서 포항시 죽장의 입암서원과 많은 인연을 맺었다. 그래서 지금도 입암서원 앞 개울가에는 박인로 시비가 세워져 있다.
 박인로는 노년에 장현광과 교유하면서 포항시 죽장의 입암서원과 많은 인연을 맺었다. 그래서 지금도 입암서원 앞 개울가에는 박인로 시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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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백성들에게 태평성대가 오기를 문학적으로 기원한 박인로

격양가는 태평성대를 의미하는 고사성어이다. 중국 고대의 요 임금이 길을 가던 중 어떤 한 노인이 길가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한 손으로는 배를 두들기고 다른 한 손으로는 땅(壤)을 두드리며(擊) 노래를 부르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

노인은 '해 뜨면 일하고(日出而作) 해 지면 쉬네(日入而息). 우물 파서 물 마시고(鑿井而飮) 밭 갈아 밥을 먹네(耕田而食). 임금이 내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帝力于我何有哉)'라고 노래를 불렀다. 임금의 존재를 백성이 못 느끼는 상황, 그때가 가장 태평성대라는 뜻이다. 노인은 요 임금의 정치가 바로 그런 시대를 낳았다고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요 임금은 노인의 노래를 들으며 "과연 지금이 태평성대로구나!" 하며 스스로 크게 만족하였다. 그런 세상, 모든 사람들이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좋은 시절이 오기를 갈망했던 박인로의 도계서원을 찾아 올바른 정치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태그:#박인로, #도계서원, #조홍시가, #태평사, #선상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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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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