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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야독, 자발적 가난. 생태적 삶, 이 세 가지를 실천하기 위해 무작정 귀농해 만 평 벼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이 있다. 민주노총 <노동과 세계> 편집국장이었던 차남호.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직책을 맡고 있었던 사람이 무작정 귀농해, 자기 땅도 아니고 남의 땅을 만 평이나 빌려 벼농사를 짓는 이유는 뭘까. 서울에서는 주경야독을 할 수 없고 자발적 가난을 선택할 수 없었다는 말인가? 그리고 왜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려는 것일까.

범생이가 데모꾼으로

차남호가 논에서 피를 뽑아 살펴보고 있다.
▲ 차남호 차남호가 논에서 피를 뽑아 살펴보고 있다.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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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호 고향은 전북 익산이다. 부모님은 농사꾼이었다. 논이 6천 평 정도 돼 생활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차남호는 2남 2녀 중 맏이다.

"기억을 떠올려보면 시골에서 중상층 정도로 산 거 같다."

차남호는 어릴 때부터 농사일을 돕느라 바빴다. 차남호는 순둥이였다. 일을 시키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다. 중학교 2학년 다닐 무렵 아버지가 서울로 유학을 보내 할머니와 서울로 갔다. 성동구 성동중학교로 전학을 했다. 차남호는 서울에서도 범생이로 살았다.

"나중에 대학에 가서 데모를 할 때 친구들이 '쟤가 옛날에 저러지 않았는데 왜 저렇게 변했지?' 하고 의아해할 정도였다."

차남호는 중앙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1982년, 광주항쟁이 일어난 지 2년이 된 암울한 시기였다. 광주항쟁은 유언비어라고 믿고 있었다. 대학교에는 인쇄가 흐릿하고 조악한 유인물이 돌아다녔다. 전두환 독재정권을 비판하고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차남호는 몰래 그 유인물을 보면서 전두환 독재정권의 실체와 광주항쟁의 진실을 어렴풋이 깨달아 갔다. 대학교에는 경찰이 상주하고 있었다. 학교 앞에는 형사들이 책 장수 등으로 가장해서 앉아 있다가 누군가가 구호를 외치려고만 하면 바로 낚아채던 때였다. 데모대가 아예 형성이 되지 않았다.

독재정권의 여론이 악화되면서 1984년 전두환은 대학에서 경찰들을 철수시켰다. 이른바 '유화국면'이었다. 차남호를 비롯한 대학생들은 지하서클 활동을 하면서 학습을 하고 거리 투쟁에 나섰다.

"가장 충격받은 책은 리영희의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였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남호는 책을 보면서 사회를 깨달아 갔다. <어느 돌멩이의 외침>,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민중과 지식인>, <지식인을 위한 변명>, <경제학 원론>, 마르크스주의 성향이 있는 책을 보게 됐다. 그리고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았다.

"그게 유언비어가 아니고 진실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광주항쟁이 일어날) 당시 고2였는데 광주 시민들이 그렇게 당한 걸 알게 되면서 부채 의식이 생겼다. 개인적인 욕망, 인문학도로 안주하는 게 옳은 일인가? 실천해야 되는데 그러자면 내 인생 망가지는 게 필연인데, 고민이 많았다."

차남호는 처음 가투(거리 투쟁)에 나섰다. 한겨울이었다. 장소는 부천이었다.

"우스꽝스럽게 잡혔다. 나름대로 머릴 쓴다고 전경들한테 ○○을 가는데 어떻게 가야 돼요? 하고 물어봤는데 그 옆에 있던 전경이 '뭔데?' 하고 물었다. 나는 그때 책을 들고 있었다."

차남호는 신문지로 포장한 책을 들고 있었다. 그냥 일본 원서를 읽는 데 필요한 책이었다. 가투는 해보지도 못하고 경찰서로 끌려갔다. 검찰에 넘어갔고 즉심에서 판사가 구류 7일을 선고했다. 차남호는 가투는 해보지도 못하고 잡혔다는 생각에 억울했다. 집회를 안 했다고 우겨도 소용없는 시절이었다.

4학년 된 차남호, 총학생회 부활 추진위원회 활동과 삼민투 홍보

1985년은 2·12총선에서 민정당이 패배하면서 전두환 정권이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봉착한 해다. 학생운동은 학습 비밀결사 수준을 넘어섰고 총학생회는 거리 시위를 하는 전투 조직으로 변했다.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 의장 김민석)이 탄생했다. 전학련은 산하에 삼민투(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 투쟁위원회)라는 조직을 설치했다. 1985년에 4학년이 된 차남호는 총학생회 부활 추진위원회 활동을 했다. 그리고 삼민투에서 홍보를 맡았다.

"내가 글을 잘 쓰는지는 몰랐다. 중학교 때부터 일기는 계속 썼다. 학우들이 나보고 '글은 잘 쓰네' 하면서 자연스럽게 쓰게 됐다."

1985년 5월, 광주민중항쟁 5주년을 맞이해 전학련은 광주항쟁 진상규명과 학살 원흉을 처단하라는 요구를 내걸고 전국에서 시위를 벌였다. 전국 80개 대학 5만여 명의 대학생이 시위에 참가했다. 차남호는 전학련 산하 서울 남부지구협의회 단위에서 시위를 준비했다.
5월 29일, 종로에서 가투가 있었다.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나라!"

차남호는 종로에서 구호를 외치자마자 사복형사에게 잡혔다.

"구호 몇 번 외치고 바로 잡혔다. 종로에서 잡혀서 관할인 노량진 서로 이첩됐는데 담당형사가 '이 새끼, 엉뚱한 데서 잡혔어' 하고 때리기 시작했다. 주먹으로 얼굴을 마구 때리고, 팔꿈치로 찍고, 무릎으로 가슴을 지르고, 발로 차고 짓밟고…. 그렇게 때릴 수가 있나 할 정도였다. 손을 대 보니까 내 얼굴이 아니더라.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한 놈은 패고 한 놈은 말리는 척 어르고…. 그런 식으로 몇 시간 동안 맞았다."

차남호는 즉심에 넘어가서 구류 10일을 선고받았다.

얼마 뒤 군대 징집영장이 나왔다. 결국 1985년 8월에 군대를 갔다. 당시 학생운동 분위기는 군대 가는 걸 금기시했다. 강제로 끌려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포로생활'로 여길 만큼 불명예스러워했다. 

"2년 반 동안 손발이 묶이는 데다 그 자체가 군사 정권의 물리력 노릇이다 보니 모멸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데모를 하다 구속이 되면 징집이 면제되던 시절이라 그게 오히려 영광스러운 분위기였다. 친구들은 싸우고 있는데…. 나는 군대에 묶여 있었으니 그 부채의식이 얼마나 컸겠나."

차남호는 군대에서 칼을 갈다가 1987년 말에 제대했다. 사회에 나와 보니 세상은 변해 있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전두환이 물러나고 6·29선언으로 국민을 속인 노태우가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었다.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도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1987년 7월, 8월, 2개월 동안 약 3000여 건의 쟁의가 발생했다. 차남호는 복학을 하지 않고 인천으로 갔다.

"빚을 갚는 심정으로 노동현장으로 갔다"

차남호는 경력 쌓기 알리바이용으로 서너 명이 일하는 마찌꼬바 공장에 취업했다. 처음으로 용접기 고대를 잡고 일했다. 난생처음 해 보는 공장 생활이었다. 모든 게 낯설었다. 서너 달 정도 일을 하다가 1988년 11월에 노동자 150명 정도가 일하는 덕창기업이라는 자동차부품회사에 들어갔다. 일당 5500원. 첫 월급이 15만 원 정도였다.

1987년 7, 8월부터 불기 시작한 노조 결성 열풍에 힘입어 이곳도 꿈틀거리고 있었다. 차남호가 입사한 지 석 달만인 3월 11일에 노조가 결성됐다. 그 사업장엔 이미 입사한 지 1년쯤 된 '위장취업자' 오진석(가명)이 활동하고 있었고, 차남호도 그가 이끄는 노조준비모임에 함께했다. 노조 위원장은 현장 경력이 많은 장수태(가명)가 맡았고, 오진석은 교육부장, 차남호는 홍보부장을 맡았다.

그때까지 노동자들을 노예처럼 부려 먹던 사장이 순순히 넘어갈 리가 없었다. 한창 임금교섭이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오진석은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조회 시간에 사장이 일장 연설을 했다.

"노조가 생겼다는 보고를 받고 나서 시대가 바뀌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리 된 것, 노사가 협력해서 잘 해보자고 했는데, 노조가 하는 일을 보니 영 아니더라. 이건 필시 노조 안에 좌경 악질분자가 숨어 있다는 뜻이다. 이런 자와는 함께 할 수 없다."

화가 난 위원장 장수태가 소리쳤다. "좌경 악질이라니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사장도 만만치 않았다. "넌 가만히 있어 새끼야! 야, 가서 식칼 가져와!" 조회는 어수선한 상태에서 파장을 맞고 말았다.

노조가 결성된 뒤 회사는 뒤늦게 노조 간부들의 신원을 조회해 오진석과 차남호가 대학물을 먹은 이른바 '학생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었다. 문제는 오진석만 해고하고 차남호를 '살려준' 것.

오전 휴식 시간에 간부들이 노조사무실에 모였다. 다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가운데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며 오진석 해고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차남호는 '최종 학력을 기재하지 않은 것을 이유로 한 해고는 부당하다'는 당시의 고등법원 판례를 들어 부당해고 반대투쟁으로 나아가자고 간부들을 설득해 동의를 이끌어냈다.

점심시간에 노조집회를 열어 이를 알리고, 그날 잔업을 거부하기로 했다. 차남호는 남은 한 시간 동안 해고가 부당함을 알리고, 복직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써내려갔다.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노조원들이 공장 마당에 모였다. 위원장 장수태가 성명서를 읽어 내려갔다. 이번 해고가 부당함을 조목조목 논박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사장은 억지를 부렸다.

"어쨌든 나는 '위장취업자는 안 된다'는 사규에 따라 해고했으니 그리들 알라. 사실, 오진석 말고도 위장취업자가 한 명 더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 '나머지 한 사람'은 개전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해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나머지 한 사람은 차남호였다. 사장은, '입사한 지 석 달을 갓 넘긴 놈이 뭘 할 수 있겠느냐'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해고의 정당성'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노동자들은 그 자리에서 잔업 거부를 결의했다. 

일을 마친 조합원들이 근처 식당으로 우르르 모여들었다. 내쫓겼던 오진석도 자리를 함께해 "내 인생을 덕창노조 운명과 함께하겠다"고 다짐했다. 조합원들이 오진석을 에워싸고 사내 기숙사로 몰려갔다.

노사협상이 열려 해고를 받아들일지 조합원총회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열린 조합원총회에서는 만장일치로 '해고 철회'를 결정했다. 그러나 회사는 전날의 합의를 팽개치고 이를 거부했다. 분노한 조합원들은 곧바로 파업에 들어가기로 결의했다. 핵심 요구 사항은 해고자 복직과 임금 인상(일당 1857원 인상).

회사 관리자들을 몰아낸 뒤 정문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현장을 장악했다. 쇠파이프로 무장한 규찰대가 공장 담벼락을 지켰다. 관리자들이 협상을 하자고 현장을 찾아왔다. 노조는 협상을 하자면서 계속 파업 현장에 찾아오는 관리자들에게 오직 한 가지만 물었다.

"요구안을 100퍼센트 들어주겠느냐?"

회사는 결국 '요구안을 100퍼센트 수용하겠다'는 공문을 보내 왔다. 그제야 파업 현장인 공장 마당에 협상 테이블이 마련됐다. 노사 교섭위원이 마주 앉고, 쇠파이프를 든 조합원들이 주위를 에워쌌다.

합의서는 두 시간 만에 체결됐다. 합의서 1번은 '부당해고자 원상 회복'(징계위원회 결정 원인 무효)이었다. "100퍼센트 수용하겠다. 다만 임금인상액은 끝전 7원만 빼자!" 사장의 제의에 노조 교섭위원 사이에서 약간의 논란이 있었지만 수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89년 10월 어느 날 아침에 출근하는데 정문 옆에 건장한 사내 서넛이 차남호 앞으로 다가섰다. '뭐지?' 하는데 그중에 한 사내가 "차남호 씨 맞죠?" 하고 물었다.

"네." 하는 순간 그자들은 차남호를 잡아끌어 승용차에 밀어 넣었다. 밖을 못 보게 외투를 뒤집어 씌웠다. 숨이 막혔다. 누군가 투덜거렸다.

"이젠 하다 하다 별 새끼가 다 속 썩이네."

주사파 조직원으로 오해받아 구속, 결국 '이적표현물 소지' 혐의로 기소

차남호를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했다는 기사. <경향신문> 1989년 10월 25일자 갈무리
▲ 차남호 구속 기사 차남호를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했다는 기사. <경향신문> 1989년 10월 25일자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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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호를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했다는 기사. <한겨레> 1989년 10월 25일자 갈무리
▲ 차남호 구속 기사 차남호를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했다는 기사. <한겨레> 1989년 10월 25일자 갈무리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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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호는 어디인지 모르는 곳으로 끌려갔다. 방안에 들어가 의자에 앉히더니 그제야 외투를 벗겼다. 차남호는 숨이 멎는 듯했다. 시트가 깔리지 않은 침대, 욕조, 좌변기…. 박종철 고문살인사건을 보도하던 텔레비전에서 봤던 남영동 대공분실과 똑같은 구조. 인천 대공분실이었던 거다. 나를 왜 이런 곳으로 데리고 오지?' 차남호는 몸이 떨렸다.

험상궂은 기관원 한 명이 여유만만하게 말했다.

"미리 얘기해 두겠는데, 너가 이적단체인 주사파 조직의 일원으로 노동현장에 침투해서 노동자 포섭 활동을 해 온 걸 잘 알고 있다. 쉽게 쉽게 끝내자."

'뭐야, 이거. 주사파? 조직원?' 초긴장 상태였던 차남호는 다소 안정을 찾았다. 저들이 뭔가 잘못 짚었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백지 한 장을 건네면서 우선 인적 사항과 성장 과정을 적으라 했다. 내용을 검토하지도 않고 들고 나갔다. 얼마 뒤 다시 돌아온 기관원은 낭패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거참, 글씨체가 영 딴판이네?"

얼마 뒤 그들은 차남호를 차에 태워 차남호 자취방으로 향했다. 몇 권 안 되는 책과 간행물을 압수해서 돌아왔다. 그리고 재미없는 취조가 이어졌다. 이 책은 어디서 어떻게 구했고, 저 간행물은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내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차남호는 결국 국가보안법의 '이적표현물 소지'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나중에 기관원이 들려준 얘기는 이랬다. 공작팀이 나를 계속 미행했는데, 손 글씨로 된 문서를 한 장 입수했다는 것이다. 저들은 어떤 이유에선지 그 문서를 내가 작성했다고 철썩같이 믿고 잡아들였다고 했다. 현장 활동가 현황 분석 문건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문건을 쓴 적이 없었다."

형사들도 차남호가 쓴 진술서를 보더니 글씨체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고 난감해했다. 조직 사건으로 엮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어려웠던 듯하다. 87항쟁 이전이라면 무슨 고문이라도 해서 조작할 놈들이었다. 하지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드러나 전두환 정권이 무너진 뒤로는 손찌검이나 고문을 하지 못했다.

혐의가 풀렸으니 다시 풀어줬어야 마땅한데 공개적인 간행물을 빌미로 '이적표현물 소지'라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구속했다. 그때는 그게 워낙 흔한 일이기도 했다. 결국 차남호는 <노동자의 길>, <노동자의 깃발> 같은 이적표현물 소지라는 죄목으로 1989년 10월 24일 구속된다. 차남호는 징역 1년을 선고받고 3개월 살다가 집행유예로 나왔다.

국가보안법이라는 무시무시한 죄목, '빨갱이' 공세에 노조 무너져
1987년 7월 25일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발행
▲ <노동자의 길> 창간호 1987년 7월 25일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발행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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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형사들이 오진석을 잡아들일 때 근처 사업장의 또 다른 학생 출신 노조 간부도 함께 잡아들였다는 점이었다.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는 그 지역 노동운동을 탄압하려는 공작이라는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몇 가지 심증이 가는데, 노동조합 분쇄 차원과 노조 조직을 무너뜨리기 위해 엮은 건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회사에서는 구속을 빌미로 오진석과 나를 해고했다."

실제로 그 사건의 여파는 컸다. 차남호가 감옥에서 나와 보니 현장 분위기는 크게 위축돼 있었다. 국가보안법이라는 무시무시한 죄목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를 빌미로 회사 쪽은 노조가 '빨갱이들'한테 조종당해 왔다고 공세를 폈다.

결국 일반 조합원들이 하나 둘 회사의 압박과 회유를 견디지 못하고 노조에서 멀어져 갔다. 단체협약 교섭을 진행하던 노조로서도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파업 투쟁 완전 승리를 시작으로 거칠 것 없이 달려온 이들로서는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위원장을 비롯해 노조의 중심에 서 있었던 활동가 20여 명이 우르르 회사를 그만두고 말았다. 잘 나가던 노조였는데 한순간에 무너졌다. 노조는 금방 어용이 돼 버렸다. 그걸로 끝이었다.

1989년 겨울이 지났다. 정권이 막아도 노동조합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하지만 한국노총이라는 어용 상급단체라는 한계 때문에 건강한 노동운동을 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해 줄 새로운 상급단체가 필요했다. 1989년부터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를 준비하는 활동이 전개되었다. 1990년 1월 22일 성균관대학교 자연과학캠퍼스에서 창립 대의원대회를 열고 단병호를 초대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차남호는 1990년 5월부터 전노협 산하 인천노동조합협의회에서 선전부장으로 일을 하게 됐다.

"내가 현장에 내려갈 때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걸로 기여하자, 그게 글쓰기였다. 그래서 선전 쪽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29세에 전노협 기관지 '전국노동자신문' 편집장 맡아

1992년에 전노협 기관지 <전국노동자신문> 편집실로 올라와 기자로 일하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몇 달 뒤 편집실장이 개인 사정으로 일을 그만두면서 차남호가 편집장을 맡게 됐다. 스물아홉 살 때였다.

1989년 12월 20일에 창간한 전노협 기관지. 단병호 준비위원장이 창간사를 썼다.
▲ 전국노동자신문 1989년 12월 20일에 창간한 전노협 기관지. 단병호 준비위원장이 창간사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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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호는 서른한 살, 전노협에서 일할 때 가정을 꾸렸다. 아내는 사회복지전문요원으로 동사무소에서 일을 하다 2002년 공무원노조를 설립할 때 간부를 맡았다. 2004년 11월 노동조합이라는 명칭만 사용 가능할 뿐 노동삼권이 보장되지 않는 정부의 입법안을 저지하기 위한 무기한 총파업을 했다.

그때 전국에서 모두 2040명이 중징계를 받았고, 그 중 파면, 해임이 428명에 이르게 된다. 아내도 그때 해임을 당했다. 법으로 호소했지만 대법원까지 가서도 패소했다. 특별법을 제정해서 복직하라고 요구 중이다. 현재는 공무원노조에서 상근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현재 18살 딸아이와 16살 아들이 있다. 큰아이는 중학교 1학년 다니다가 학교를 그만뒀다. 검정고시를 통과해 현재 대학 입시 준비를 하고 있다. 작은아이는 중3인데 만화 그리기를 좋아해 예술고등학교를 가겠다고 미술학원을 다니고 있다. 

전노협은 민주노총 결성을 준비했다. 정권은 전노협을 심하게 탄압했지만 결국 1995년 11월 11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결성된다. 초대 위원장 권영길, 수석부위원장 양규헌, 사무총장 권용목이었다. 전노협은 12월 3일 발전적인 해소를 선언하고 집행 체계를 사실상 그대로 민주노총 사무총국으로 옮긴다.

차남호 역시 민주노총 편집실로 옮겨가 편집부장을 맡게 된다. 그리고 언론노련 <미디어오늘> 편집국장이던 이광호를 영입해 1997년 3월 <노동과 세계>를 창간한다. 차남호는 취재기자로 일하다 중간에 2년 남짓 일반홍보를 맡기도 했다. 그리고 1999년 단병호 위원장 체제로 들어서면서 편집국장으로 임명됐다.

<노동과 세계> 창간호 소식이 실린 기사. <한겨레>1997년 3월 10일자 갈무리
▲ <노동과 세계> 창간호 소식 <노동과 세계> 창간호 소식이 실린 기사. <한겨레>1997년 3월 10일자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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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이 금품 수수, 개인 수수지만 집행부 사퇴 요구

2005년 10월 8일, 강승규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이 사업주 단체에게 금품을 받았다는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는 일이 벌어졌다.

강승규 수석부위원장은 전국민주택시노조연맹 위원장으로 있던 2001년 8월부터 지난 9월까지 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 박○○(58세·구속) 회장에게서 "노조원들의 반발을 무마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6차례에 걸쳐 4800만 원을, 서울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 이○○(58세) 이사장에게서 30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긴 하다. 개인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은 집행부가 계속 조직을 이끈다는 것은 어떤 명분도 없고, 조직을 죽이는 길이었다. 그런데도 당시 집행부는 조직 내부의 빗발치는 요구에도 자진 사퇴를 거부했다. 이에 사무총국 성원 20여 명이 자진 사퇴를 촉구하며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 모두가 민주노조운동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차남호는 당시 사직자들의 대변인 구실을 맡았다. 파장이 컸다. 당시 집행부는 밀려드는 사퇴 압력을 더는 버티지 못하고 며칠 뒤 결국 총사퇴했다. 차남호는 이 사태로 민주노총을 떠나게 된다.

"돌아보니 현장 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반평생 노동운동 한 길을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러던 어느 순간 뜻하지 않은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고 만 것이다.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비로소 뒤를 돌아보고, 스스로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노동운동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으로 '노동운동가의 삶'에 회의가 밀려들었다. 그때부터 서울 '탈주'를 꿈꿨던 것 같다."

사태 수습 차원에서 잠시 민주노총 정책국장으로 복귀하긴 했지만 집행부 선거를 앞두고 사표를 냈다. 2006년 말이었다.

정치판이 변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되고 2004년 17대 총선거에서 지역구 2석, 비례대표 8석(정당 득표율 13.1퍼센트)을 획득하여 진보정당 최초의 원내진출을 달성했다.

민주노총에서 튕겨져 나온 차남호에게 손길을 내민 건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이었던 심상정이었다. 심상정은 2007년 대선에서 권영길, 노회찬과 함께 당내 경선을 치른다. 차남호는 심상정 캠프 홍보특보를 맡았다.

여기에서 심상정은 노회찬을 누르고 2위로 결선투표에 나섰지만 결선에서 2위에 그쳐 민주노동당 대선후보가 되지 못한다. 2008년에는 곧바로 총선이 있었다. 심상정이 고양시 덕양 갑에 출마했다. 차남호는 자연스럽게 또다시 홍보 특보로 일했다.

민주노동당은 진보신당으로 갈라졌다. 민주노총과 심상정 캠프에서 함께 일했던 친구 신언직이 진보신당 서울시당 위원장에 출마하면서 도와달라고 했다.

"함께 일했던 사이고, 백수 상태였으니 딱히 도와주지 못할 이유도 없고 해서 역시 홍보를 맡았는데, 일반의 예상과 달리 당선이 돼 버렸다."

신언직은 "당선을 시켰으면 책임도 같이 져야지!" 하면서 서울시당 홍보국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차남호는 거부할 명분도 없고, 딱히 다른 할 일도 없었다.

아니, '노동자 정치 세력화'를 위해서는 진보정당이 튼튼히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믿고 있던 그로서는 응당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2009년부터 2010년까지 1년 정도 진보신당 서울시당 홍보국장을 맡았다. 하지만 차남호는 정치 활동이 생리에 맞지 않았다.

"진보정당이라 하더라도 정치는 정치다. 흔히 얘기하는 정치적 행보, 정치적 대응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인정한다. 문제는 내가 '정치적 인간형'이 아니라서 그게 너무 힘들었다는 점이다.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온갖 잔머리를 굴리고, 화려한 말장난으로 핵심을 가리는 따위의 '정치'가 난무하는 현장에서 버텨내기가 쉽지 않았다. 심지어 조직이 망가지더라도 개인의 성공을 앞세우는 정치인, 이에 영합하는 흐름이 진보정당에도 있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그만 맥이 풀렸다."

개인 성공 앞세우는 정치인, 진보정당에도 있다는 걸 알고 맥이 풀려

차남호는 거취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난생 처음으로 차남호는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를 따져 봤다. 그때까지는 대의에 따라, 조직이 요구하는 대로 일을 해 왔다. 이제 정치 활동은 갈 길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노동조합으로 되돌아갈 생각도 없었다.

지난 몇 해 동안의 시련은 세상살이를 바라보는 눈도 시나브로 바꿔 놓았다. '투쟁하는 삶'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반드시 따라 붙는 이런 저런 '내부투쟁'까지 감당하기엔 버거웠다. '느리더라도 자연스런 삶'을 살고 싶었다.

"'생태' 가치를 중시하게 됐다. 생태적 삶, 시골살이, 농사, 자발적 가난, 귀농… 이런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한마디로 '신선이나 되어 볼까?'였다."

차남호 집에 있는 쌀 창고
▲ 차남호 쌀 차남호 집에 있는 쌀 창고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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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운데서도 '주경야독'은 치명적 유혹이었다. 오랜 고민이 필요 없었다. 차남호는 두어 달 정도 생각을 하다가 시골로 내려가 살 결심을 했다. 아내를 어떻게 설득할까? 혼자서 끙끙댔다. 2010년 하반기 어느 날 아내에게 시골에 내려가 살고 싶다고 말했다.

아내는 뜻밖에 순순히 허락했다. 단 조건이 자기는 절대 농사는 안 짓겠다는 것, 그리고 아이들이 당시 초등학교 3학년, 5학년이었는데, 좋은 학교를 다니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혁신학교는 없었다. 일단 규모가 작고 시골에 있고, 틀에 박힌 교육을 하지 않는 학교를 다니게 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 저기 알아보다가 어느 날 완주가 눈에 들어왔다. 완주에서도 고산면이 마음에 쏙 들었다. 어릴 때 익산에서 살아 전북은 평야지대로만 알았는데 마치 강원도와 흡사한 산들이 겹겹이 둘러쌓여 있었다. 학교를 알아보니 근처에 삼우초등학교가 있었다. 틀에 박힌 교육을 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차남호는 고산에 자리를 잡자고 생각했다.

집을 빌리려고 고산면 여기저기를 알아봤지만 귀농 귀촌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인지 빈 집이 없었다. 고심하고 있는데 아내가 한 번 더 가서 근처 가게에 가서 물어봤다. 마침 한 시간 전에 나온 집이 있다고 했다. 보증금 3천에 월세 10만 원이었다.(2년 뒤 전세 6천만 원으로 올렸다.)

차남호는 그날로 계약하고 2011년 2월 말에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어우리로 이사를 했다. 3학년, 5학년, 딸 아들하고 함께였다. 그야말로 무작정 한 귀농이었다. 계획도 없었다. 귀농운동본부에서 귀농 교육도 받지 않았다.

"농촌에 가서 농사의 가능성을 찾고 새로운 경제적인 뭔가 만들려고 하는 게 가능하지 않다. 죽어가는 게 농촌인데. 가난하게 살려고 마음먹어야 한다."

귀농한 지 1년이 지날 때까지도 뭘 할지 잡히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차남호와 비슷한 시기에 귀농한 친구가 같이 벼농사 안 지어 보겠냐고 의견을 물었다. 차남호보다 두어 살 어린 그 친구는 철저하게 귀농 교육까지 받고 고산에 집까지 지어 놓고 내려온 사람이었다.


그 친구는 논 30마지기를 얻어 놓고 있었다. 한 해 동안 놀고 있던 차남호에게는 반가운 제안이었다. 농사를 지은 뒤 모든 비용을 제하고 수익을 반으로 나누기로 했다. 함께 일할 때는 가장 중요한 게 노동력이다. 못자리도 같이 하고 좋았다.


그런데 모내기 하고 피살이를 하는데 그 친구가 앞서 갔다. 처음엔 일을 잘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피를 뽑은 뒤 사려서 땅바닥에 밟아 넣어야 되는데 그냥 가 버린 것이다.


"그럼 피가 다시 산다.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게다가 그렇게 한 줄을 매고 나더니 도저히 못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도시에서 자랐으니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나중에 보니 밭농사는 제법 하는데 논농사는 체질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길을 지나가다 자신의 논에 피가 보여 뽑고 있는 모습이다.
▲ 논에서 피를 뽑고 있는 차남호 길을 지나가다 자신의 논에 피가 보여 뽑고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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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거의 혼자 일했지만 나중에 수입은 똑같이 나눴다. 그 다음해부터 그 친구는 벼농사를 그만두었고, 빌린 논은 차남호에게 넘어왔다.


"그 당시 수입이라고 얘기할 정도도 아니다. 의미가 없다. 한 사람당 2, 3백만 원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 뒤로 같이 해 볼 생각은 없었다."


차남호는 처음에 수확한 쌀을 반절은 지인들에게 무료로 보냈다.


"'첫 수확을 했는데 나누고 싶다. 한줌 쌀을 보내드리려고 하는데 주소 알려 달라.' 이렇게 보내고 답신 온 사람들한테만 보냈는데 그게 200포 정도 가량 된다. 3킬로씩 포장하는데 2주 정도 걸렸다. 택배비가 더 들었다."


국가가 인증 하는 유기농 불쾌해, 처음 이후 국가인증제 신청하지 않아


차남호는 고산에 내려온 첫 해 처음으로 벼농사를 지으면서 책을 한 권 냈다. 내려오기 3개월 전에 철수와영희 출판사와 계약서도 썼는데 그때까지 쓰지 못하고 있었다. 철수와영희 출판사의 재촉을 받고 쓰기 시작했다.



차남호가 쓴 책 <10대와 통하는 노동 인권 이야기>(철수와영희, 2013년)
▲ <10대와 통하는 노동 인권 이야기> 차남호가 쓴 책 <10대와 통하는 노동 인권 이야기>(철수와영희,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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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벼농사를 짓고 있었다. 3월 말부터 한창 바쁠 때였다. 낮에는 논에서 일하고 밤에는 글을 썼다. 제헌절인 7월 17일 탈고했다."


<10대와 통하는 노동 인권 이야기> 부제는 '차남호 선생님이 들려주는 노동과 세계'다. 이 책은 인간다운 삶을 위해 꼭 알아야 할 노동 인권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다. 차남호는 그 책을 낸 뒤 만 평 되는 논을 빌려 유기농법으로 벼농사를 짓고 있다.


하지만 애초에 인증을 받았던 2400평을 제외하고 나머지 논은 유기농 인증을 받지 않았다. 국가 인증을 받는 과정이 불쾌했다.


"심사할 때 몇 가지 서류를 제출하는데 한 자리에 모아놓고 정답을 가르쳐 주는 대로 써야 한다. 그다음 현장 심사할 때 혹시나 규정을 어기고 농약을 치지 않나 하나하나 꼬투리 잡으려고 하는데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을 한다. 나는 스스로 생태 가치를 좇아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 왜 국가에서 인증을 받아야 하나. 그다음엔 국가인증제를 신청하지 않았다."


국가 인증제를 받지 않으면 불이익이 있다. 아무리 화학비료 안 쓰고 농약을 안 치고 생태를 살리는 벼농사를 해도 생산한 쌀에 '유기농'이라는 말을 쓰지 못한다. 차남호는 그것도 이해가 안 된다.


"'유기농'은 그냥 보통명사다. 왜 못 쓰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국가 인증제를 거부한다. 유기농이라는 말을 안 써도 지난해는 200가마, 16톤 전량 소비가 됐다. 직거래로 택배로 보낸다. 알음알음 '차남호 쌀 괜찮네' 하는 입소문이 났다."


하지만 논농사로 돈을 벌지는 못한다. 논갈이할 때 마지기당 5만 원, 이앙작업은 3만 원. 콤바인 수확작업은 6만 원, 모두 15만 원이 들어간다. 다 합치면 650만 원이다. 그걸 제외하면 1년 소득이 농촌 평균소득이 안 된다.


하지만 차남호는 그나마 다행히 다른 소득이 조금 있다. 6천 권 정도가 나간 <10대와 통하는 노동 인권 이야기> 인세도 있고, 그 밖에 강연료, 인세, 원고료가 조금 들어오고 있다.


그런 소득이 전체 소득에서 2, 30퍼센트 차지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전노협 활동할 때 활동비조로 10만 원, 민주노총 초창기에 처음 받은 60만 원에 견주면 지금은 호사스럽다. 사는 재미도 있다.


"서울하고 다르다. 사는 게 재미있다. 지금까지 노동운동만 하고 있었다면 이런 세계가 있었다는 걸 모르고 살 거 아닌가. 중학교 때까지 농사지을 때는 싫었다. 왜 저렇게 힘들게 사나? 그랬다. 이제 내려와서 재미를 느낀다. 논농사 자체는 노동이라서 고통이지만, 김매기를 하면 신체리듬을 따라서 하게 되니까 삼매경에 빠진다. 일하면서 머릿속에서 계속 책을 썼다. 굳이 책이 아니더라도 삼매경에 빠지다 보니까 매력이더라. 재미있다. 기계를 쓰면 위험해서 딴 생각 못한다."


차남호는 이곳 고산으로 와서 신선은 되지 못했다. 말만 그렇게 했을 뿐, 신선이 되려고 내려온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삶이 재미있다.


만 평 벼농사를 지으면서 좋은 사람들도 만나 세상 이야기도 나누고, 백중놀이 잔치판을 벌여 신명나게 놀기도 하고 완주마을 소식지 <완두콩> 등에 글도 쓰고 밤에는 책을 보고 있다. 차남호는 마을에서 '차미네이터'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그런 뚝심과 우직함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실패한다는 귀농에 성공했는지도  모른다. 


차남호가 2013년 8월에 <완두콩>에 쓴 글을 보면 차남호가 바라던 삶에 다가간 듯하다. 자발적 가난, 주경야독, 생태적 삶이 담겨 있다.


"고산 어우리로 이사와 터를 잡은 지도 어언 3년째로 접어들었다. '낯설고 물선' 곳이었지만 좋은 사람들 덕분에 어렵잖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물론 모든 게 순조롭지만은 않아서 나름대로 쓴맛도 봤고, 우여곡절도 겪었다. 그러나 떠나온 도시에서의 삶에 견줄 바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일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거의 없으니 이게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이지 싶었다. '잘 하는 짓일까? 정말 떳떳한가?' 따위, 끝없이 이어지는 번민의 사슬에서는 벗어났으니 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생태농사'의 힘일 게다. 독극물(농약)과 화학비료를 멀리 함으로써 사람을 해치지 않고, 지구를 해치지 않는 농사. 그것 하나만으로도 내 노동은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러니 스트레스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지금 차남호는 자신이 꿈꾸던 '사람사는 세상'에 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 월간 <작은책>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안건모 기자는 '작은책' 발행인입니다.



태그:#작은책,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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