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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8월 27일에 올린 여의도 증권가 옥시 섬 그냥 지나치지 마세요의 후속기사입니다. - 기자 말

국정조사의 꽃이라는 청문회가 끝났고, 농성장도 정리되었다. 하지만 피해자들에 대한 구제책은 반쪽이었고, 진정성 있는 정부의 사과도 책임지는 사람도 안 보인다. 공정위는 SK케미컬·애경 등의 표시광고법 위반 여부에 대해 판단불가결정을 내렸고, 감사원은 3차례나 신청한 공익감사청구를 거부했다.

가해자들이 엄정한 수사를 받고 죗값을 치를지, 재발 방지를 위해 확실히 제도가 바뀔지 모든 것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쯤에서 지난주까지 진행된 옥시 불매 항의 농성장으로 다시 가보려 한다. 여전히 가습기살균제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잊지 않기 위해서다.

#1. 가습기살균제참사 5주기 추모식

28일 가습기살균제참사 5주기 추모식에서 피해자들이 기자회견문을 낭독하고 있다
 28일 가습기살균제참사 5주기 추모식에서 피해자들이 기자회견문을 낭독하고 있다
ⓒ 강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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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님들 말로만 하지 마시고 행동으로 좀 실천해주십시오."

어느 피해자의 절절한 목소리가 의원회관에 울려 퍼졌다. 여야를 막론하고 가습기참사의 진상규명과 피해자 구제를 약속했지만, 아직 제대로 해결된 것이 없는 상황에서 답답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옥시 본사 앞에 농성장을 꾸린 지 일주일이 되던 지난달 2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가습기살균제참사 5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조금 늦게 행사장에 들어섰더니 이미 빈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피해자와 가족들을 비롯하여 시민단체, 원내 4당 의원들 그리고 취재 기자 등 300명 이상의 시민들이 행사장을 가득 메웠다. 가습기살균제참사 국정조사 특별조사위원회(아래 특위) 우원식 위원장(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여야 위원들은 한목소리로 진상규명과 피해자 지원을 약속했다.

돌발 상황도 있었다. 어느 참가자는 의원들에게 말보다 실천을 해달라고 했고, 유사증세가 나타난 '가습기메이트'(SK케미컬이 제조, 애경이 판매)에도 관심을 가져달라는 절박한 호소도 있었다. 이날 행사에서 피해자들은 가습기살균제로 건강이 나빠진 모든 피해자들에 대한 차별 없는 인정을 요구했다. 또한 진정성 없는 가해 기업을 규탄했고, 배상액의 상한이 없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와 소비자 집단소송제 등 재발방지책의 도입도 촉구했다.

28일 5주기 추모식에서 피해가족이 헌화하고 있다
 28일 5주기 추모식에서 피해가족이 헌화하고 있다
ⓒ 강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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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가습기살균제참사 5주기 추모식에서 피해가족이 헌화하고 있다
 28일 가습기살균제참사 5주기 추모식에서 피해가족이 헌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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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희생자들에 대한 헌화가 있었다. 단상 오른쪽에 마련된 재단에 놓인 희생자들의 영정 앞으로 추모행렬이 길게 늘어섰다. 추모객들은 헌화 후, 묵념했고 끝내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희생자들을 잊지 않겠다며 재단을 영상으로 담기도 했다. '찰칵찰칵' 휴대전화 카메라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마지막 헌화가 끝날 때까지 일정 지연은 불가피해 보였다.

모두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헌화가 마무리되자 100명 남짓 되는 시민들은 여의도 증권가에 위치한 농성장까지 약 20분간 행진했다. '제2의 옥시를 막자', '피해자들을 실험쥐 취급하지 마라' 등의 피켓 문고와 '살인기업 옥시 불매'등의 구호가 거리를 가득 채웠다. 농성장에 도착한 참여자들은 이제 능선 하나는 넘었다며 서로를 격려하고, 청문회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날 청문회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28일 추모식 참가자들이 농성장까지 행진하고있다
 28일 추모식 참가자들이 농성장까지 행진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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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청문회 증인은 반도 안 와... 방청석에는 야유와 눈물만

29일 가습기살균제참사 청문회 첫날, 핵심증인들이 대거 불출석하자 피해자들이 항의기자회견을 열고있다
 29일 가습기살균제참사 청문회 첫날, 핵심증인들이 대거 불출석하자 피해자들이 항의기자회견을 열고있다
ⓒ 강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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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성 8일째 되는 지난달 29일에는 청문회가 시작되었다.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청문회에 신청된 증인은 28명이었지만 출석은 13명에 그쳤기 때문이다. 제품의 유해성을 알고도 조직적으로 은폐한 의혹이 짙은 옥시 본사 핵심 증인들도 출석하지 않았고, 김앤장 관계자는 변론 중이라며 답변이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참다못한 방청석에서 거친 야유가 쏟아졌다. 결국 김앤장 관계자는 저녁 무렵 퇴장 조치 당했다. 이목이 청문회장으로 쏠려있는 중에도 농성장에는 사람이 있었다. 행인들에게 열정적으로 서명을 받던 한 피해가족은 "다리는 안 아픈데 마음이 아프다. 거리에서 서명을 받는 피해자 가족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기상악화로 예정보다 이른 31일 농성장이 정리되고 있다.
 기상악화로 예정보다 이른 31일 농성장이 정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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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성 10일째 되는 31일,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농성장이 빌딩숲 한편에 위치했기에 평소에도 바람은 강하게 불곤 했다. 이에 더해 태풍의 간접적인 영향으로 비까지 내려 천막이 많이 젖었고, 그냥 두면 날아갈 듯 불안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결국 관계자들은 천막을 조금 일찍 정리하고 청문회에 집중하기로 했다. 농성 첫날부터 참여한 대학원생 김지원 씨는 "옥시 불매 농성장에 대한 시민들의 호응도 좋았는데, 바람이 많이 불고 날씨가 안 따라줘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날 정오에는 시민청 바스락 홀에서 조촐한 추모모임이 있었다. 실제 5주기가 되는 날이라 분위기는 보다 숙연했다. 참석자들은 LED촛불과 책을 이용해 사망신고 숫자 913을 표시했고 희생자들의 넋을 기렸다. 한 참가자는 "기업의 탐욕에 희생된 영유아와 산모, 성인들 모두 그저 평범한 삶을 원한 사람들이었는데,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지 않은 정부에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31일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모임이 31일 정오에 열렸다. 
참여자들이 LED촛불을 통해 희생자를 형상화하고있다
 31일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모임이 31일 정오에 열렸다. 참여자들이 LED촛불을 통해 희생자를 형상화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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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습기살균제참사 청문회 마지막 날

2일 청문회 셋째날, 피해자들이 항의 기자회견을 열고있다
 2일 청문회 셋째날, 피해자들이 항의 기자회견을 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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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일, 가습기살균제참사청문회 마지막 날이었다. 피해가족들은 다시 여의도로 향했다. 천막농성은 끝났지만 청문회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방청석은 크게 좌우로 나뉘어 있었는데 왼편에는 주로 증인으로 출석한 정부 및 기업 관계자들이, 오른편에는 피해가족과 시민단체, 기자 등이 자리했다. 약 160명 정도 들어올 법한 이 공간은 금세 꽉 찼다.

하지만 첫날부터 김이 빠진 청문회는 마지막 날이 되어선 반쪽이 되었다. 전날 국회의장의 개회사를 빌미로, 여당이 합의했던 일정을 전면 중단했기 때문이다. 다수의 여당 의원들은 저녁 무렵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2일 가습기살균제참사 청문회 3일차, 여당의원들의 자리가 텅 비어있다
 2일 가습기살균제참사 청문회 3일차, 여당의원들의 자리가 텅 비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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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야 3당 중심으로 정부기관들에 대한 청문회를 이어갔다. 대체로 기관들은 책임을 회피하거나 무성의한 답변을 내놓았고, 의원들의 질타가 이어졌다. 이석준 청와대 국무조정실장은 여러 위원의 정부 차원 공식 사과요구에도 "제도 미흡으로 인한 결과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으며, 도의적 책임은 인정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애석하게도 진심으로 사과하는 사람은 볼 수 없었다. SK케미컬의 조작 의혹이 있었던 물질안전보건자료(MSDS, 화학물질 관리 매뉴얼)규정도 도마 위에 올랐다. MSDS를 엉터리로 작성해도 처벌하는 규정이 없었고, 뒤늦게 도입한 제도로는 위반행위당 5만 원의 과태료를 물린다는 말에 방청석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느 피해가족은 "적어도 5년의 세월 동안 지옥 같은 삶을 살아온 피해자들에게 너무한다"며, 증인들의 태도를 문제 삼았다. 다른 방청객도 "913명이 죽고 4000명이 넘는 피해자가 생겼는데, 대응이 고작 이 정도니 가해 기업들이 우습게 보는 것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4. 청문회를 단 한 번도 중계하지 않은 지상파3사

28일 행진에 참여한 아이가 농성장에서 휴식을 취하고있다
 28일 행진에 참여한 아이가 농성장에서 휴식을 취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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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회가 막바지에 이르면서 언론의 관심도 한풀 꺾인 듯했다. 지상파 3사는 청문회를 단 하루도 중계하지 않았다. 한 유가족은 언론인들도 모두 가족이 있을 텐데 왜 그럴까 의문이라며, 후퇴한 언론 자유를 실감한다고 말했다.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 가족모임(가피모)의 강찬호 대표도 "청문회가 진행될수록 취재 열기가 떨어지는 기이한 상황에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평소 시민들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생활용품에서 발생한 참사이기에 더욱 민감하게, 다른 차원에서 다뤄야 했다"며 언론이 실체적 진실을 찾아내는 자기 본연의 역할을 못 하는 것에 큰 아쉬움을 표했다. 그리고 특위 차원의 공식요청에도 석연치 않게 중계를 거부한 지상파 3사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너무도 늦게 붙은 불이었지만, 그래도 조금씩 불씨를 살려 나가던 언론의 관심이 다시 차갑게 식어가고 있다. 언론에 조명받지 못하자 드러났던 '섬'도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하지만 피해가족들은 끝이 안 보이는 싸움을 이어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찬호 가피모 대표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말했다. "이번 기회에 생활 속의 유해 화학물질들을 규제하고, 시민들의 안전을 지킬 제도를 마련해서 또 다른 참사는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는 소중한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했다. 

가습기살균제참사를 보고 있자면 기후변화로 해수면이 올라가고 있는 태평양의 어느 산호섬이 떠오른다. 그곳은 너무 멀고, 국제사회에 영향력도 없어서 다수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다. 또한 약자들이 몰려있는 저지대부터 물이 차올라서 구성원 모두가 동등한 문제의식을 느끼기도 어렵다.

어느덧 우리 사회에서도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지는 않은가 되묻게 된다. 이 사건은 고통 받는 힘없는 보통사람들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의 거리를 알려줄 하나의 가늠자다. 참사가 반복되는 악순환을 끊기 위해 당신은, 과연 우리는 이들의 손을 잡아 줄 수 있겠느냐는 물음이 남는다. 국정조사는 10월 4일까지 진행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민주언론시민연합 시민사회취재단이 작성했습니다. 참언론아카데미 수료생들로 구성된 시민사회 취재단은 시민사회 이슈를 취재하는 활동을 합니다.



태그:#가습기살균제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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