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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수 교수
 허상수 교수
ⓒ 허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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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노무현 정부 시절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국제협력 담당자로 근무할 당시 허상수 교수를 만났다. 허 교수는 제주농고출신으로 성균관대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에 사회학박사를 받았다. 그는 반평생을 제주4.3항쟁의 진실규명을 위해 뛰어 다닌 행동가였고, 현재는 제주4.3연구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올해 4월 그의 학문적 연구서인 <4.3과 미국>이라는 책을 세상에 내놨다.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서는 '제주 4·3 사건'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사태와 그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양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그리고 고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 당시인 지난 2003년 10월 31일, 4.3항쟁 당시 가해자인 국가권력을 대신해 피해자 유족들에게 이렇게 사과했다.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이 비극적으로 그 생을 마감한 후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4.3항쟁'의 피해자들과 그 유족들의 가슴에 잔인하게 돌을 던지는 극우 인사들이 적지 않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임명한 전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 이영조씨가 지난 2010년 미국에서 열린 국제학회에서 '4.3항쟁'을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폭동'으로 묘사한 것도 그 한 예다. 더군다나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그런 이영조씨를 올해 4월 경기도 국책연구기관인 경기연구원 이사로 임명했다.

이런 남경필 지사에 대해 허상수 교수는 "집권여당 대권 잠룡으로 알려진 남경필 지사가 그런 반민주적·반역사적 시각을 버리지 못하는 자를 공공기관 이사에 임명한 일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라면서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이렇게 정리되지 못한 '과거사'는 독이 돼 현실에서 부활한다는 것을 우리는 몸으로 실감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다음은 지난 7월 15일부터 허상수 교수와 국제전화와 이메일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4.3과 미국> 책표지
 <4.3과 미국> 책표지
ⓒ 다락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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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운 시절에 <4.3과 미국>을 출간한 것을 축하드린다. 우리사회에서 금기시된 4.3과 관련한 미국 정부의 책임 문제를 용감하게(?) 지적해 주셨는데 4.3항쟁과 관련하여 미군정의 주요 역할과 가장 큰 책임은 무엇이라고 평가하나?
"무엇보다도 미국은 소련과 함께 한반도 분단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미국은 3년간 미 육군 제24군단 휘하의 군사정부를 통해 남한에서 철권통치를 강행했다. 평화롭던 제주섬에서 1947년 3·1기념식을 치르고 나온 행렬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미군정 휘하 경찰이 쏜 총에 맞아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던 게 4·3 대비극의 시작이었다. 당시 미군정이나 그 휘하의 경찰이 이를 진정으로 사과하고 잘 수습만 했더라도 4.3대학살의 비극은 피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3·1 미군정 휘하 경찰의 비인간적 처사에 항의했던 3·10 민관총파업 이후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고, 강제 연행, 구속이 1년 내내 계속됐다. 사실상 테러 단체도 이때 입도해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급기야 1948년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위한 5·10총선거를 실시한다니까 이를 반대한다면서 4·3무장봉기가 일어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군정엔 평화협상을 통해 조기 수습의 길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미군정은 처음부터 강경진압작전을 지휘하고, 군사 작전권을 적극 행사한 책임이 있다고 본다."

"대부분의 민간인 집단학살, 미군이 작전권 행사했던 시기에 일어났다"

4.3 수난의 경로
 4.3 수난의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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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4·3항쟁과 관련하여 당시 미군정의 가장 큰 실정과 오판은 무엇이었다고 평가하나?
"미군정이 직접 점령해서 남한을 지배했던 해방 후부터 1948년 8월까지의 시기에 4·3진상규명위원회에서 희생자로 인정받은 희생자 숫자가 809명이나 된다. 그리고 미군이 철수하던 1949년 6월까지 미군이 지휘, 통제하고 모든 작전권을 행사했던 시기에 대부분의 민간인 집단학살이 일어났다.

미군 점령과 지배과정에서 가장 큰 실정은 민족통일독립국가 건설시도를 차단하고, 방해하면서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미국만의 국가를 세우려고 이런 저런 시도를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4·3 당시 제주도민들의 요구와 기대가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판단착오까지 있었다.

1947년 3월 미군정 휘하 경찰의 발포 치사사건이 있기 이전까지는 전국적으로 놓고 볼 때 제주도민들의 자주적 자치조직인 인민위원회 등과 제주 주둔 미군정 부대와의 관계가 평화로웠다고 평가될 정도였다. 경찰이나 사설 테러 단체였던 서북청년회의 억압을 미군정이 제지하고 견제만 했더라도 그만큼 격렬한 저항이나 반발이 시도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촉즉발의 긴장상태를 미군정 당국이 방조했다고도 볼 수 있다."

- 미군정은 4·3사건의 원인을 제공했고 사건의 전개과정과 결과에도 직접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당시 미군정이 4.3 사건에 직접적으로 미친 영향에 대해 몇 가지 예를 소개하면?
"그동안 대한민국정부 차원의 4·3진상조사 작업에서는 4·3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간접적이고 수동적인 것으로 봐왔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의 결론은 '미국은 4·3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식으로 서술돼 있다. 나는 이런 우회적 서술보다도 미국이 4·3전후의 사건 원인 제공뿐만 아니라 전개과정, 결과에 미친 직접적 관련성을 드려내려고 여러 가지 증거사례를 들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미군의 남한 직접 점령과 분단, 민족 재결합의 좌절 등이 제주도민학살을 낳게 한 가장 큰 구조적 원인이라고 본다. 그리고 1947년 3월 1일 미군정 휘하 경찰의 무차별 발포 치사사건 처리 과정과 그 이후 반공극단주의자 유해진 지사의 비행과 해임 건의에 대한 넬슨 중령보고서(1948년 3월 11일), 미군정 스스로 통제 실패(control failure)를 지적하는 미 육군 제24군단 6사단 브라운 대령의 조사보고서(1948년 7월 1일)에 나타난 정책 실패와 작전상 오류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지난 1947년 3월 민관총파업이후 제주도민에 대한 대탄압과 4·3봉기 이후 대학살과정에서 미군정은 미군 전술부대를 제주도에 파견해 명백히 군사적으로 개입했다. 비록 미군이 직접 학살행위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군사적 시위(demonstration)를 반복했고, 1948년 4월 18일엔 민간인을 진압하라며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해상봉쇄를 위해 미해군 함정을 출동시켰다. 미군정은 또한 휘하 경찰과 제주도 주둔 국방경비대에 대해 군사적으로 통제(operational control)했다.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에 한 미군 장교와 경비대 장교가 작전지도를 펴놓고 진압작전계획을 숙의하는 사진이 나와 있다(1948. 5. 15). 이 사진 속에 나타난 미군 장교는 제임스 리치(James Leach) 대위였다.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에 한 미군 장교와 경비대 장교가 작전지도를 펴놓고 진압작전계획을 숙의하는 사진이 나와 있다(1948. 5. 15). 이 사진 속에 나타난 미군 장교는 제임스 리치(James Leach) 대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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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에 한 미군 장교와 경비대 장교가 작전지도를 펴놓고 진압작전계획을 숙의하는 사진이 나와 있다(1948. 5. 15). 이 사진 속에 나타난 미군 장교는 존 리드 하지 중장이다.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에 한 미군 장교와 경비대 장교가 작전지도를 펴놓고 진압작전계획을 숙의하는 사진이 나와 있다(1948. 5. 15). 이 사진 속에 나타난 미군 장교는 존 리드 하지 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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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에 한 미군 장교와 경비대 장교가 작전지도를 펴놓고 진압작전계획을 숙의하는 사진이 나와 있다(1948년 5월 15일). 이 사진 속에 나타난 미군 장교는 제임스 리치(James Leach) 대위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전선에서 패튼장군이 용맹을 과시한 발지전투에 참전했던 포병 장교였다. 그런 포병 지휘관이 유격전, 비정규전 지휘에 나선 것은 미군이 4·3봉기의 정치적 성격이나 대게릴라전의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

탱크로 밀어붙이는 방식의 진압작전으로는 군사적으로 토벌도 어려운 것이다. 처음에 미군은 4·3사건을 치안상황으로 간주하고 경찰 증파로 진압할 수 있다며 사태의 긴급성과 중대성을 직시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선거감시를 위해 제주도 출장을 갔다 온 국제연합임시위원단의 지적 등에 의해 뒤늦게 대응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한국인들 다수는 미국을 우리의 가장 가까운 우방국가로 알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미군정 3년 동안 이런 큰 비극이 일어나는 걸 사전예방하지 못했을까?
"미군의 직접 지배정책은 말 그대로 군대에 의한 통치였다. 미군정에 의한 직접 점령은 말 그대로 3년간 계엄령 통치를 의미한다. 행정·입법·사법권을 미군정이 행사하는 초법적 지위를 바탕으로 임의대로 권한을 행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4.3사건 초기 평화적 수습책을 구사하지 못한 것은 친일경찰 출신 한국인들과 미군정 관리들이 일본제국주의 강제점령시기 민족해방운동가와 독립운동가들을 압살했던 정책을 그대로 재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군정은 대화와 설득이 아니라 군사적 지배, 무력에 의한 통제를 앞세웠기에 4.3사건의 비극을 사전예방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영조의 4.3폭동, 몰역사적 망언"

이영조 전 진실화해위 위원장.
 이영조 전 진실화해위 위원장.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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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조 전 진실화해위원장은 미국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4.3항쟁'을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폭동'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런 이영조씨의 '4.3항쟁'에 대한 정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이영조씨의 표현은 지난 50년 동안 진실을 은폐해 왔던 가해자의 왜곡된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고, 제주도 민간인 학살을 조금도 반성하지 않은 몰역사적 망언이다. 제주도민에 대한 폭언이다.

제주도민들에게 가해졌던 불명예를 씻어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와 명예회복조치를 정면 거부하고, 무시하는 반민주적 망발이다. 지난 2000년부터 3년간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 작업을 거쳐 발표된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에 의하면 '4·3무장봉기'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명예회복특별법>에 따른 조사보고서 결론에서는 '제주4·3사건'을 '1947년 3월 1일을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런 진상규명 결과와 국가공권력의 잘못, 이를 시인하고 대통령이 사과한 일련의 큰 변화를 깡그리 부정하는 또 한 번의 국가망각행위라고 생각한다."

- 올해 4월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4.3항쟁'을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폭동'으로 정의한 이영조씨를 국책기관인 경기연구원 이사로 임명했다. 이런 남지사의 조치에 대해 어떤 입장인지?
"집권여당 대권 잠룡으로 알려진 남경필 지사가 그런 반민주적·반역사적 시각을 버리지 못하는 자를 공공기관 이사에 임명한 일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본다. 그런 망언을 하고 다니는 짓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아무렴 사람이 없으면 그만둘 일이지 그런 폭언을 한 자를 국책기관의 이사로 임명하다니…. 참으로 당황스럽고 충격적이다. 진실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면 또다시 국가범죄를 범할 수도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되새겨야 문화사회로 나아갈 미래 희망이 생겨난다."

- 해방 후 미군정은 남북한이 평화통일을 할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없었을까? 미군정이 친일파를 등용해 남한을 다시 제2의 식민지를 만든 것이 6·25를 불러오는 원인을 제공한 것이 돼버렸다는 평가가 있는데?
"<4.3과 미국>을 내고 서울, 광주, 성남 등 몇 군데 대중강연을 다녔다. 성남시민역사교실 강연을 나갔다가 이처럼 예리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미군이 일본과 달리 남한을 직접 지배하면서 여러 번 정책실패를 범하게 된다. 이런 점에 대해서 미군정 당시 정보장교로 근무했던 리처드 로빈슨, 그란트 미드 등이 지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레고리 헨더슨과 브루스 커밍스, 존 메릴 등도 미군정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트루만 대통령과 맥아더 태평양미군총사령관, 하지 주한미군사령관은 분단과 점령, 전쟁발발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본다.

소련 스탈린과 소련군의 북한 점령 역시 분단과 점령, 전쟁 발발에 책임이 크다. 돌이켜 보면 미군 정보당국에서 여러 차례 북한군의 전쟁 가능성을 보고하고 있었다. 6·25 이전에 이미 1000회 가까이 38선 경계선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 전쟁을 피하려는 적극적 노력이나 평화협상과 외교적 해결을 소홀했던 점, 정보실패의 책임 역시 미국이 져야한다고 본다. 이승만은 군대도 부족하고 무기도 없는데도 1949년부터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있었다."

- 이 책을 쓰면서 가장 힘들었거나 아쉬웠던 점은?
"많은 사람들이 4·3진상조사보고서가 나오고 대통령이 사과하면서부터 4·3은 해결됐다고 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나는 무엇보다도 가해 진상의 전모가 온전히 규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본다. 그동안 한국에서 진행된 불행했던 과거사를 청산한다는 방식도 성찰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부터라도 '과거청산'이라는 용어보다는 '이행기 정의 확립'이라는 올바른 방향 설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제주4·3평화재단 출판지원 공모에 지원하기 위해 서두르다보니 자료 검토가 충분히 되지 못한 게 아쉬웠다. 워낙 오래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 연표 기재사항조차 확인할 게 많았다. 초고 이후 더 많은 시간을 들여 바로잡느라 온몸이 온통 쑤실 만큼 힘들었다. 하지만 이만큼이라도 쓸 수 있게 지원해 준 재단 관계자들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 개인적 연구서인 <4·3과 미국>이 정부기관 보고서인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와 비교하여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자평하는지?
"이 책이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결론을 넘어서려는 가장 큰 차이점은 인권과 정의의 시각, 이행기 정의의 시각에서 4·3사건을 해석하려는 것이었다. 이행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를 한국에서는 '과거청산'으로 단순화 했는데 너무 순진한 접근이었다고 본다.

'이행기 정의 실현'은 구체제에서 새로운 체제로 이행하는 과도기나 전환기에 과거 민간인학살이나 국가기관에 의한 납치와 실종, 의문사나 고문치사 등 불미스러운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여 가해자인 국가로부터 사실을 인정받는 것(recognition), 그에 따라 책임을 묻는 것(responsibility), 피해배상을 하는 것(reparation), 공동체 재건에 힘쓰는 것(reconstruction)과 재발방지, 제도개혁(reform), 기억(remember) 등을 모두 거쳐 상호 작용하는 일련의 과정과 절차를 의미한다."

"문책하지 않는 사회는 선진사회의 자격이 없다"

이승만과 맥아더
 이승만과 맥아더
ⓒ 허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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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0년 김대중 정부에서는 제주 4.3 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아래 4.3위원회)를 발족해 4.3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조사를 정부차원에서 진행했다. 하지만 활동가이자 전문가 입장에서 4.3위원회의 한계를 느꼈을 것 같은데?
"지난 2000년 제정·시행된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명예회복특별법>은 국민화합과 인권신장 등을 입법목적으로 했다. 그러나 피해구제나 책임 추궁이라는 회복적 정의를 구현하지 못하는 근본적 한계를 지닌 것이다. 그래서 진상조사는 해 놓고도 아무런 후속조치를 별도 추진하지 못한 입법적 한계가 있다.

이걸 넘어서려면 사건 해석과 추가 진상조사 작업에 보다 적극적으로 인권과 정의의 시각을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책하지 않는 사회'는 선진사회의 자격이 없다.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문화국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 싶다."

- 지난 노무현 정부 시절 4.3에 대한 화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주도에서는 4·3의 사회적 치유는 아직 "끝나지 않은 과업"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남아있다는 평가가 있는데 왜 그럴까?
"아쉽게도 일부 극우 소수가 공연히 나서서 이미 확인된 제주도민 대학살이 거짓이라고 우겨대고 있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 앞에 말한 이행기 정의 확립은 다른 말로 '정의를 통한 사회적 치유'라고도 부른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상과 같은 비극을 치유하기 위해서도 이런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현대 평화학의 대가 요한 갈퉁은 광주 5·18민주항쟁의 해결을 위해 맨 처음 해야 할 일은 '진실규명'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지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 역시 국회 청문회와 국방부, 검찰 등에서 여섯 차례나 시도됐지만,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보고서를 내지 못한 채 일단 마무리된 상태다.

그래서인지 일부에서 여전히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왜곡하고 폄하하고 모욕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제주도민 피학살 사건에 대해서 아직도 그런 진실 왜곡, 폄하, 모욕, 국가범죄 부인행위가 반복되고 있는 점은 매우 우려스럽고 충격적 상황이다. 더 많은 추가 진상작업이 필요한 이유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역사왜곡, 국가범죄 부인, 진실은폐"

-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기승을 부리며 지배이념으로 작동하고 있는 보수우익의 기원과 4.3항쟁과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면?
"분단세력, 친일잔재세력들이 그들이 저지른 반인륜범죄, 중대한 인권침해라는 만행을 은폐하고 있다. 이들은 이미 드러난 진실의 의미와 가치를 훼손함으로써 다시 한 번 국가범죄를 부인하고 피해유족의 가슴에 대 못질을 해대고 있다.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려는 여러 가지 이유와 배경 가운데 하나는 이처럼 역사왜곡, 국가범죄의 부인, 진실은폐, 국가망각 음모가 도사려 있다.

4.3의 본질을 냉전시대의 가해자 시각으로 주장함으로써 책임을 전가하려는 부도덕하고 반윤리적 망발이라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 국무총리가 위원장으로 있는 진상규명위원회가 공식 조사하여 채택한 진상조사보고서까지 문제를 삼으면서 과거로 역행하겠다는 불순한 정치적 의도를 보이고 있다. 반공보수 우익세력의 행태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인권과 정의를 부정하는 참으로 불온한 음모다."

- 그동안 4.3사건은 진상조사가 상당히 진척됐고 고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 중 사과까지 했다. 하지만 가해자들의 책임규명과 피해자 배·보상과 지원 등은 전혀 진척이 없다. 이런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나?
"피해자들이 아직도 피해의식이나 패배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한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외에 아직도 냉전시대의 억압이 남아 있어서 희생자 피해신고조차 하지 않은 분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민간인 학살이라는 엄연한 진실이 규명됐는데도 무책임하게 버티고 있는 국가범죄의 당사자들과 이를 비호하는 세력이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회복 조치가 없는 진실규명은 너무나 허무한 짓이다. 국가범죄에 대한 피해배상책임은 피해자에게는 채권, 가해자에게는 채무와 같은 성격이다. 가해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국가의 행태는 피해자에게 진 빚을 갚지 않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치다."

허상수 교수는 누구?

허상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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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수 교수는 지속가능한사회연구소 소장이며 제주농고, 제주대 농화학과, 성균관대 대학원 사회학과, 고려대 대학원 과학학 협동과정을 졸업했고 사회학 박사다. 전국연합노조 중앙특허법률지부 지부장, 한국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국장, 제주4.3제50주년기념사업범국민위원회 사무처장, 월간 사회평론 편집기획실장, 계간 환경과생명 편집주간, 참여연대 발기인·정책위원, 국무총리 소속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 전문위원,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진상규명범국민위원회 운영위원장, 대통령자문 지속가능발전위원회·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성공회대 사회문화연구원 교수, 한국사회과학연구회 계간 동향과 전망 편집위원장을 지냈다.

현재 그는 제주4·3연구소 이사, 제주사회문제협의회 대표, 월간 아시아문화 편집위원,
(사)세계섬학회 '정의를 통한 사회적 치유' 위원장, 다시민주주의포럼 연대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엔 <삼성과 자동차산업> <한국사회와 정보통신기술> <참여냐 연합이냐> <4.3과 미국>, 공저엔 <6월민주항쟁과 한국사회 10년> <한국민주주의의 대안체제 모형을 찾아서> 등이 있다.


태그:#허상수, #4.3, #김성수, #제주,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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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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