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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에 머물며 어학 연수를 하는 중에 시칠리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연재하던 기사를 잠시 멈추고 2회에 걸쳐서 시칠리아 여행기를 소개합니다. - 기자 말
타오르미나의 광장에서 바라본 시칠리아 해변. ⓒ 한성은
시실리아 그대 아직 잠들지 않았나
안졸리나 밤이 깊어 별이 반짝이는데
그댈 만나리라
사루비아 다방에서 밤새 기다리리라
그댈 꼬시리라
나를 믿어요 시실리아
오 내 사랑 시실리아

-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 '시실리아' 노랫말 중에서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의 조까를로스는 멋진 얼터너티브 라틴 음악으로 시실리아를 찬양했었다. 홍대의 작은 클럽에서 처음 이 노래를 듣고 배꼽을 잡으며 친구들과 웃고 있을 때에는 그로부터 꼭 10년 후에 내가 직접 지중해를 건너는 배를 타고 시칠리아(sicilia)를 꼬시러 갈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때는 시칠리아가 이탈리아 남부의 커다란 섬이라는 것도 몰랐다. 얼마 전까지 이탈리아 본토 역시 시칠리아 왕국의 귀속 영토였다는 사실은 시칠리아 여행을 준비하면서야 알게 되었다.

몰타(Malta)의 어학원에서 영어공부를 하다가 갑자기 의기투합하여 시칠리아 여행을 위해 뭉친 일행들에게 '시실리아'를 들려주니 뭐 이런 곡이 있냐며 흘려 들었지만, 나는 이 노래야말로 시칠리아를 가장 잘 표현한 곡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시칠리아를 들어 봤지만, 누구도 시칠리아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어서, 모두가 자기만의 환상으로 시칠리아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몰타에서 시칠리아는 비행기로 40분, 배로 2시간이면 도착하는 거리에 있다. 그래서 지중해 페리 투어를 하면 스페인, 그리스, 튀니지 등과 함께 몰타, 시칠리아가 항상 포함되어 있다. 거리가 가깝고 교통편도 저렴해서 몰타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 학생들이라면 주말을 이용해서 한 번씩은 시칠리아 여행을 다녀온다. 대부분의 어학원에서는 시칠리아 당일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시칠리아는 생각보다 엄청 큰 섬이다. 몰타는 제주도의 1/4에 불과하지만 반대로 시칠리아는 제주도보다 14배나 크다. 그래서 당일 투어로 시칠리아를 여행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여유롭게 다닌다면 열흘 이상이 필요할 것 같다. 우리는 3박 4일 일정으로 시칠리아를 다녀왔는데, 결국 카타니아(Catania)를 중심으로 동쪽 지역만 여행하고 돌아왔다.

"다음 수업에 안 오면 시칠리아에서 죽었다고 생각할게"
시칠리아 마피아가 티셔츠에 인쇄되어 기념품으로 팔리고 있다. ⓒ 한성은
시칠리아의 최대 도시는 팔레르모(Palermo)다. 처음 여행 계획을 할 때는 팔레르모를 중심으로 다니려고 했었다. 그런데 자신은 이탈리아인이 아니라 시칠리아인이라고 늘 주장하는 '프란치스코' 선생님이 팔레르모는 시칠리아 최악의 도시라며 극구 만류하여 카타니아에 숙소를 정하고 여행을 다녔다. 그리고 지금은 극성수기라 시칠리아행 비행기 표가 너무 비싸서 페리를 이용해야 했는데, 몰타에서는 팔레르모행 페리가 없어서 사실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그러면서 프란치스코 선생님이 한 마디 더 붙이고 갔다.

"다음 주에 너희들이 수업에 들어오지 않으면 시칠리아 사람들에게 총을 맞고 죽었다고 생각할게."

같이 서서 웃기는 했지만, 농담치고는 너무 섬뜩했다. 실제로 시칠리아는 마피아로 유명한 섬이다. 영화 <대부>의 주인공 돈 꼴레오네가 바로 시칠리아 사람이다. 이탈리아 본토와 멀리 떨어져 있으니 공권력이 치안을 유지할 수 없어서 마피아가 생겨났다고 한다.

마피아들이 선량한 사람들을 보호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어쨌든 범죄 집단 아닌가. 그런데 시칠리아에서는 마피아가 그대로 관광 상품이 되어 있었다. 관광지마다 마피아와 돈 꼴레오네가 그려진 티셔츠를 팔고 있었다. 관광객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상품이 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시칠리아에 가면 마피아를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와 '마피아를 만나서 여권이라도 빼앗기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동시에 품고 있었는데, 현재 시칠리아는 그냥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 섬일 뿐이었다. 과거에는 시칠리아가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이탈리아의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그 자리를 로마나 밀라노에 내어준 지 오래라고 했다. 마피아들도 시대의 흐름을 타고 모두 본토로 가서 활동 중(?)이라고 했다. 영화 <도그빌(DogVille)>의 마지막과 같이 검은 중절모를 쓰고 기관총을 들고 다니는 무서운 아저씨들이 없다니 어쨌든 다행이었다.

어학원 앞에 있는 여행사에 가서 카타니아행 페리 티켓을 알아보니 몰타의 발레타(Valleta)항구에서는 시칠리아의 포짤로(Pozzalo) 항으로 가는 페리만 있다고 했다. 그리고 포짤로에서 카타니아까지는 왕복 20유로 셔틀버스로 이동해야 한단다. 해당 노선을 운행하고 있는 Vurtu Ferries의 홈페이지에서는 포짤로 외에 카타니아도 예약을 할 수 있었다. 한 사람당 22유로나 하는 예매 수수료를 내야 하지만 포짤로에서 카타니아까지는 버스로 2시간이나 걸리기 때문에 수수료를 내더라도 카타니아행 페리를 타는 것이 나았다.
몰타와 시칠리아를 오가는 Virtu Ferries. ⓒ 한성은
카타니아 중심가에 숙소도 예약을 했다. 5명이라서 아파트를 주말 동안 빌리려고 했는데 성수기여서 그런지 비용도 비싸고 그나마 남아 있는 곳은 위치가 너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시내 중심가에 있는 호텔 도미토리를 예약했다. 1박에 13유로라는 믿지 못할 가격이었다. 어떤 숙소일지 걱정이 됐지만, '이 가격에 이 정도 위치라면 충분히 매력적이다.'라고 써 놓은 한국인의 후기를 믿고 예약을 했다.

그리고 여행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렌터카도 빌렸다. 시칠리아는 지하철도 없을뿐더러 대중교통이 발달해 있지 않고 버스비가 비싸서 5명이라면 렌터카를 빌리는 것이 훨씬 저렴했다. 또 이탈리아는 우리나라와 운전석과 운행 방향이 같아서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어려움 없이 운전을 할 수 있었다.

여행 속에 여행이라니. 마치 몽중몽(夢中夢)처럼 신비하게 느껴졌다. 어학연수 때문에 몰타에 오래 머무르게 되면서 가능해진 일이다. 몰타와 카타니아에서 동시에 숙박비가 나가고, 어학원을 하루 결석하는 일정이라 이래저래 출혈이 컸지만, '지금 아니면 언제 가보나?'라는 내뱉기만 하면 모든 여행자가 한방에 설득당하는 그 말로 스스로를 설득해버렸다.

앞으로는 한 곳에 두 달 이상 머무르며 지낼 일이 거의 없을 테니까 여행 중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라며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 준비를 했다. 그런데, 페리부터 숙소 그리고 렌터카까지 어느 것도 아무 일 없이 조용히 넘어가지 않았다. 3박 4일 동안 매일매일 크고 작은 일들이 이어졌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시칠리아는 기대보다 훨씬 멋진 곳이었다. 그동안 이탈리아에 대해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생각이 한 번에 날아가 버렸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앞으로 다시 찾지 않아도 될 곳'과 '다른 곳에 못 가더라도 다시 찾아야 할 곳'을 나눌 수 있게 되는데, 시칠리아는 명백하게 후자에 해당했다. 다음에 시칠리아에 온다면 한 달 정도 시간을 가지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는 머물러야 시칠리아를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일행은 금요일 어학원 수업이 끝나고 발레타 항구로 가서 들뜬 마음으로 페리를 탔다. 다리를 쭉 뻗고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잡고 짐을 풀었다. 페리 안에는 카지노에서나 볼 수 있는 슬롯머신도 몇 대 있었고, 테이블을 두고 마주 보고 앉아서 갈 수 있는 좌석도 넉넉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이리저리 배를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페리 출발 예정 시간은 저녁 6시 30분이었다. 그런데 정확하게 6시 13분에 배는 닻을 올리고 출항했다. 지금까지 늦게 출발하거나 늦게 도착하는 교통편 때문에 곤란했던 적은 있지만, 예정된 시간보다 먼저 출발해버려서 당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심지어 이 배는 국가 간 페리가 아닌가. 티켓에 커다랗게 쓰여 있는 출발 시각만 믿고 제시간에 맞춰서 왔다면 배를 못 타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던 것이다. 비행기는 발권 시간, 탑승 시간 등이 티켓에 명시되어 있지만 배는 그냥 그 시간까지 타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빨리 출발해서 빨리 가면 좋긴 하지만, 아무튼 황당했다.

출발 시간보다 빨리 출발한 페리, 황당함의 연속
Virtu Ferries의 이코노미석은 지정좌석이 아니기 때문에 어디든 원하는 자리에 앉으면 된다. ⓒ 한성은
카타니아행 티켓을 샀는데 목적지에는 결국 버스로 데려다 주었다. ⓒ 한성은
황당한 것은 또 있었다. 여유롭게 자리에 앉아 우아하게 책을 편 후 숙면을 취하려는데, TV에서 계속 '포짤로에서 카타니아까지 셔틀버스 있습니다.'라는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뒷목이 서늘하여 승무원에게 가서 물어보니 이 배는 포짤로로 가는 배란다. 인터넷으로 예매를 하고, 현장에서 발권을 하고, 여권과 티켓 대조를 두 번이나 하고 배에 탔는데, 이 배가 카타니아행 배가 아니라는 말은 한 번도 듣지 못했었다.

터키에서 엉뚱한 공항을 찾아가서 비행기를 놓친 기억이 허리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승무원의 설명을 들어보니 몰타에서 출발하는 배는 모두 포짤로로만 간단다. 일단 배를 잘못 탄 것은 아닌 것이다. 티켓을 내밀며 여기 카타니아라고 적혀 있는 것은 뭐냐고 물어보니, 포짤로에서 내려서 버스를 타고 간다는 뜻이란다. 페리 티켓을 샀는데 버스로 목적지에 데려다주다니, 이럴 줄 알았다면 렌터카를 카타니아에서 빌릴 것이 아니라 포짤로에서 빌렸다면 여러 가지로 이익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목적지까지는 데려다준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고 해야지 어쩔 수 없다. 잘 몰랐던 내 탓이었다. 

포짤로 항구에 도착해서 버스로 갈아타고 카타니아 항구에 도착하니 10시 30분이었다. 항구 주변이 가장 번화한 곳이라고 들었는데 버스에서 내리니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붉은 가로등과 낡은 건물들은 뭔가 불안한 기운을 뿜어대고 있었다. 심지어 숙소로 향하는 길에 서 있던 동상은 목이 잘려져 있었다. 지도를 손에 들고 좁은 골목을 한참 헤매고 있으니 술이 얼큰하게 취한 이탈리아 청년이 다가온다. 잔뜩 긴장하고 서 있는데, 여행자 숙소는 반대편이라며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고는 쿨하게 가버린다. 소매치기일 거라며 잠시나마 의심하고 경계했던 내가 머쓱해졌다. 물론 그 청년이 알려준 곳은 우리가 찾던 호텔이 아니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야 했지만 말이다.
한밤 중에 도착한 카타니아는 음산한 느낌이 들었다. ⓒ 한성은
주말 동안 만났던 이탈리아 사람들은 대체로 모두 친절했다. 분명히 이탈리아 남자들은 여자들에게만 친절하다며 수업 시간에 이탈리아 친구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이야기를 들었고, 프란치스코 선생님은 눈만 마주치면 싸운다고 했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그동안 다녀 본 어떤 여행지보다 친절했다. 오히려 숙소에 있던 외국 여행객들이 훨씬 무례했다. 주유소나 식당에서 우물쭈물 당황하고 있으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도움을 주었었다. 영어가 통하지 않아도 단어 몇 개만으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특히, 소매치기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어서 가방은 자물쇠를 두 개나 채워서 앞으로 멨고, 핸드폰은 줄을 매어 바지 주머니에 연결해서 다녔는데 막상 거리를 걸으며 위험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 흔한 걸인이나 히피도 나흘 동안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이탈리아 전체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이곳 시칠리아에서 나는 이탈리아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를 모두 날려 버렸다.

숙소를 향해 가는데 갑자기 조그만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에 있는 식당에는 밤 11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먹고 마시고 춤을 추고 있었다. 클럽 음악을 하도 크게 틀어 놓아서 이 동네 사람들은 대체 잠을 어떻게 잘까 싶었다. 그런데, 우리가 예약한 숙소가 바로 그 식당 2층이었다.
숙소가 있던 작은 광장에서는 새벽까지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 한성은
안내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가니 커다란 방에 2층 침대가 10개 정도 놓여 있었다. 방에 에어컨이 없어서 깜깜한 열대야처럼 더웠다. 커다란 팬이 혼자 천장에 매달려 힘겹게 돌고 있었다. 그리고 밖에서는 귀청을 때리는 음악이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시끄러워서 창문을 닫고 싶지만 그러면 너무 더워서 잘 수가 없고, 더워서 창문을 열어 놓으면 너무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다른 일행들은 대부분 도미토리 호스텔을 이용하는 것이 처음인 데다 그다지 쾌적하지 않은 환경을 보고 아주 놀라는 눈치였다. 숙소는 내가 예약한 거라서 일행들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숙소가 아주 마음에 들었었다. 침대가 편하지는 않았지만, 공동 샤워장에서 24시간 온수가 나오고, 로비에서는 에어컨과 인터넷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었고, 공용 주방에서 마음껏 요리를 할 수 있으며, 아침에는 심지어 조식도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샤워장은 변변한 탈의실도 없었고, 에어컨은 미지근했으며, 주방은 좁았고, 조식이라고 나온 것은 인스턴트커피와 작은 빵이 전부였지만, 숙박비 지출이 1/3이나 줄었으니 좋게 생각하자며 일행들을 달랬다. 그리고 그날 밤 음악 소리는 새벽 3시까지 멈추지 않았다.

시칠리아에서 운전하기, 진땀이 절로 났다
호스텔에서는 조촐한 아침식사를 모든 투숙객에서 무료로 제공해주었다. ⓒ 한성은
아침에 일어나 예약해 둔 렌터카를 받기 위해 길을 나섰다. 어젯밤 그렇게 음산하게 느껴졌던 거리는 아침이 되자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밝은 햇볕 아래 서 있는 고풍스러운 건물들은 이제야 내가 이탈리아에 왔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몰타가 이탈리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거리 풍경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실제로 내가 본 카타니아의 거리는 몰타와는 또 다른 멋을 지니고 있었다.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성당은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 속에서 기품 있는 멋을 풍기고 있었고, 나를 굽어보고 서 있는 가로등마저도 주변 풍경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카타니아의 세인트 아가사 성당 앞은 언제나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 한성은
한낮의 햇볕을 받아 진짜 이탈리아의 모습을 드러낸 카타니아 시내. ⓒ 한성은
마침 숙소 앞에는 카타니아에서 제일 유명한 어시장이 있었다. 세상 어딜 가나 재래시장은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신난다. 어시장이긴 했지만, 모든 재래시장이 그렇듯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 형형색색의 과일부터 볼 때마다 낯설기만 한 토끼고기, 진한 발 냄새가 진동하는 치즈 가게도 있었다. 몰타에서는 과일이 비싸서 무턱대고 사 먹을 것이 못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것저것 실컷 담아 들어도 5유로가 채 되지 않았다. 멋쟁이 할아버지는 저울을 확인하고 나서 덤을 더 얹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과일 가게 앞에서, 생선 가게 앞에서 사진을 좀 찍어도 되냐고 물어보니 뭘 그런 걸 다 묻느냐는 표정이다. 아테네 재래시장에서 양해를 구하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가 무서운 아저씨에게 혼이 난 후로는 장사하는 곳에서 사진 찍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었다. 청포도와 납작 복숭아를 잔뜩 사 들고 시장 구경을 다니고 있으니 마치 처음 여행을 떠나던 날처럼 설렜다. 시칠리아는 특히 황새치(Sword Fish)가 유명하다고 했는데 역시 좌판마다 주둥이가 창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황새치가 진열되어 있었다. 직접 눈으로 보기는 처음인 황새치 덕분에 설렘이 더해졌다.
지중해의 햇살을 받고 자란 과일은 설탕을 뿌려 놓은 것처럼 달았다. ⓒ 한성은
시칠리아의 명물인 황새치는 그 특이한 모양만으로 우리들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 한성은
세상 어느 곳에서나 재래 시장은 늘 사람들의 활기로 가득차 있다. ⓒ 한성은
렌터카 사무실에서 푸조 차량을 받았다. 주행거리가 1만 km 정도 되는 새 차였다. 외국에서 렌터카를 운전하는 것은 처음이라 살짝 긴장되었다. 옵션으로 내비게이션을 추가할 수 있었지만, 너무 비싸서 선택하지 않고 구글 내비게이션과 Sygic 앱으로 길을 찾아다녔다. 지도를 내려받아서 사용하는 방식이라 오프라인 상태에서도 내비게이션 기능이 가능했다. 북유럽 캠핑카 여행을 준비하면서 미리 설치해 둔 앱인데 이번 여행에서 아주 요긴하게 사용했다. 직접 사용해보니 차량 전용 내비게이션만큼 편리하고 또 믿을 만했다.

세상은 참 빠르게 변한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두꺼운 가이드북과 커다란 지도가 없으면 여행하는 것이 아주 힘들었었는데, 스마트폰 덕분에 일방통행으로 가득한 이탈리아의 낯선 도시에서도 3일 동안 길 한 번 잃지 않고 잘 다녔다.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어쩌면 '길을 잃는다'는 표현은 곧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다음 세대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나도 모르는 상태'라는 것은 곧 '스마트폰이 GPS 신호를 놓쳤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것 같다. 다음 세대가 아니라 지금 아이들도 '길을 잃어서 한참 헤맸어'라는 말의 의미를 잘 모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튼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있는 한 길을 잃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낯선 나라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아무도 모르는 멋진 장소에 도착했었다는 이야기는 이제 여행객들 사이에는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덕분에 낭만은 조금 줄어들었다. 물론 편리함은 그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시동을 걸고 출발하는데 모든 것이 어색했다. 수동 6단 기어는 자동차 잡지에서나 봤었는데 이 차가 수동 6단이었다. 그래서 후진 기어는 1단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 기어 스틱을 위로 끌어 올려서 1단을 넣으면 후진 기어가 들어가는 것인데 이게 늘 헷갈렸다. 몇 년 만에 수동 차량을 운전하는 데다가 6단 기어는 저속에서 더 자주 기어 변경을 해야 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옆에서 지도를 보고 길을 가르쳐 주는데도 대부분 일방통행에다가 교차로는 모두 회전 교차로였다. 간혹 회전 교차로가 아닌 곳은 신호등이 잘 보이지 않아서 뒤차가 경적을 울려서 친절하게 가르쳐 줄 때까지 멍하니 서 있기 일쑤였다. 그나마 운전석 위치와 진행 방향이 우리나라와 같았기에 망정이지 몰타나 영국처럼 우리나라와 반대였다면 정말 혼이 빠져나가지 않았을까 싶다. 도시의 역사가 오래됐다는 말은 곧 도로가 운전자의 편의를 봐주지 않는다는 말과 같았다.

한국에서는 부산의 도로 사정이 안 좋기로 유명하다. 한국전쟁 이후 무분별하고 급격하게 개발되어 커져 나간 부산은 도로 대부분이 구불구불하고 경사졌으며 온갖 고가도로와 터널이 미로처럼 얽혀있다. 그 덕분에 운전자들의 성향도 대체로 거칠다. 나는 부산에서 갈고 닦은 운전 실력이면 세계 어디든 문제없을 거라 자만했었다.

하지만 겨우 이탈리아의 남쪽 끝섬 시칠리아에서, 그것도 팔레르모보다 훨씬 쾌적하다는 카타니아 도심에서 그냥 뒷유리에 "초보 운전"이라고 붙일까 고민했다. 대체 로마나 파리에서는 어떻게 다니는 걸까. 한국에 있을 때도 운전하는 것보다는 걷거나 지하철 타는 것을 훨씬 좋아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가능하면 렌터카는 지양해야겠다고 운전석에 앉아서 다짐했다.
처음으로 해외에서 렌트한 수동 6단 기어의 푸조 차량. ⓒ 한성은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는 신들의 도시라 불리는 아그리젠토(Agrigento)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아그리젠토는 유적들의 보존 상태가 좋아서 그리스보다 더 그리스 같은 도시라고도 한단다. 첫날 여행 일정을 맡았던 일행의 설명을 들으며 시원하게 뻗은 도로를 달리니 기분이 그렇게 상쾌할 수 없었다. 기어 조작도 어느새 익숙해져서 긴장도 풀어졌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달콤한 납작 복숭아는 씻을 틈도 없이 모두의 위장 속으로 사라졌다.

어느새 우리 차는 아그리젠토에 도착했고 내비게이션은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라고 이야기한 후 더는 안내를 해주지 않았다. 우리가 카타니아에서 출발할 때 그저 내비게이션에 '아그리젠토'라고만 입력했던 것이다. 친절하고 똑똑한 내비게이션이 데려다준 곳은 아그리젠토의 도심 한가운데였다. 그리고 그곳에 신들의 도시는 없었다. 고층 빌딩과 쭉 뻗은 4차선 도로만 있었다. 유적지가 있는 곳을 알아 놓지 않은 것이었다. '경주에 가면 불국사라는 멋진 절이 있다더라. 그러니까 경주로 가자!' 하고는 경주역에 내려 불국사를 찾는 꼴이었다.

대체 파르테논 신전보다 멋지다는 신들의 도시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인터넷만 연결되면 모든 것이 해결될 텐데 스마트폰에는 몰타 유심칩이 들어 있어서 이탈리아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스마트폰 때문에 여행하는 낭만이 사라지네 어쩌네 했던 생각은 모두 사라지고 갑자기 허기가 져서 짜증이 솟기 시작했다. 몸이 편하니까 낭만 같은 단어가 떠올랐던 것이다.

시칠리아 분식점 같은 식당, 헛웃음 나게 맛있다니...

눈에 보이는 공영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일단 밖으로 나왔다. 천장이 햇볕을 가려주고, 에어컨이 열기를 막아 주던 푸조를 벗어나니 바깥은 그야말로 불지옥이었다. 그나마 습도가 높지 않아서 호흡 곤란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햇볕에 닿은 살갗이 순식간에 따끔거렸다. 마침내 길을 잃은 우리는 에어컨이 있고 인터넷이 되는 싸고 맛있는 이탈리아 식당을 찾아 거리를 헤매기 시작했다. 우리의 요구 사항이 얼마나 까다로운 것이었는지 그때는 몰랐다. 오후 2시의 이탈리아는 시에스타(낮잠시간)였다. 대부분의 식당과 상점이 모두 문을 닫고 영업을 하지 않았다. 곳곳에 식당이 있었지만 모두 마찬가지였다.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인 식사를 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국가 정책이라 믿어도 될 정도였다. 시원한 에어컨 아래에서 인터넷을 서핑하며 이탈리아 최고의 파스타와 피자를 먹으며 우아한 점심 식사를 하려고 했던 우리는 결국 가게 간판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에어컨은커녕 의자가 없어서 인도에 걸터앉아 밥을 먹어야 하는 간이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초등학교 앞 분식점 같은 가게의 예쁜 주인 아가씨는 영어를 하지 못했다. 낯선 음식들을 보며 이게 뭐냐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고 그냥 보이는 대로 하나씩 달라고 하고선 길가의 간이 테이블에 앉았다. 음식값이 아주 저렴하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커다란 피자 한 조각은 콜라 한 잔보다 저렴했다. 허기져서 떨리는 손으로 가져온 음식들을 먹는데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너무너무 맛있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워낙 많은 음식을 먹고, 워낙 좋은 곳을 많이 다녀서 모두들 자연스레 칭찬에 인색해진다. 새로운 뭔가를 접하면,

"이 음식은 수블라키(그리스 전통 꼬치구이)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맛은 없네."
"여기 바다는 블루라군(몰타에서 가장 유명한 해수욕장)에 비하면 형편없네."

라고 비교할 때가 많다. 그리고 이탈리아 음식에 대한 찬사는 어학원에 있는 이탈리아 사람들로부터 지겹도록 많이 들어서 은근히 거부감까지 생기고 있을 정도였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음식에 대한 자부심은 실로 어마어마해서 가끔은 짜증이 날 정도다. 어머니가 한식 요리사여서 나 역시 음식에 대해서 무지한 편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파스타 면을 구별하지 못하고 스파게티라고 했다가 면박을 받는다거나, 뽀모도로(토마토)라는 단어를 모른다고 했다가 외계인 취급을 받을 때면 은근히 약이 올랐었다. 사실 이탈리아 음식이 형편없게 맛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조그만 가게에서 만든 이탈리아식 만두 요리 '깔조네'가 헛웃음이 나올 만큼 맛있었다. 너무 맛있으면 맛있다는 말이 안 나오고 헛웃음이 나온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맛이 어떠냐는 일행들의 질문에 그냥 웃기만 했다. 그리고 곧 다른 일행들도 같이 웃기 시작했다.

'깔조네'는 흔히 보는 만두피자 같은 모양은 아니었고, 그저 빵 속에 햄을 썰어 넣고 모차렐라 치즈를 넣어 동그랗게 구워낸 모양이었다. 너무 맛있어서 세 개나 더 사다 먹으니 우리가 먹고 있는 게 '깔조네'라는 것이라고 알려줬다. 내가 알고 있던 깔조네와 모양이 달랐지만, 깔조네가 꼭 한 가지 모양이어야 하는 법은 아니니까 그런가 보다 했다. 그리고 억울하지만, 이탈리아 음식은 속된 말로 '엄지 척!"할 만큼 맛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피에스타 시간에도 열심히 장사를 해주었던 아그리젠토의 작은 간이 식당. 너무 맛있어서 여행 커뮤니티에 후기도 남겼다. ⓒ 한성은
도로변 간이 의자에 앉아 먹었지만 어느 진수정찬 못지 않았던 우리들의 첫 번째 식사. 도너츠처럼 생긴 것이 모두를 감동시켰던 깔조네다. ⓒ 한성은
정신없이 밥을 먹고, 신들의 도시를 찾아 길을 나섰다. 배가 부른 덕에 기운도 넘쳤고, 그늘에만 서면 언제나 시원한 바람이 불었기 때문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덕분에 아그리젠토의 골목골목을 여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기 때문에 눈에 들어오는 풍경마다 눈길이 갔다.

좁은 골목을 헤매는데 오래된 주택가 사이의 작은 공방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조각을 하고 있었다. 뭐 하는 곳인가 하고 기웃기웃 구경을 하고 있는데,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사진 한 장 찍어도 되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할아버지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와서 우리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할아버지는 아그리젠토 기념품을 만드는 중이었다. 나무로 만든 거대한 그리스 신전부터 스티로폼을 깎아서 만든 작은 그리스 신전까지 종류별로 벽면에 빼곡하게 매달려 있었다. 이곳이 진짜 신들의 도시인 것 같았다.

두어 평 남짓한 공방이라 잠깐 둘러보고 나가려는데 할아버지가 갑자기 비닐봉지에 포장된 스티로폼 신전 모형을 하나씩 손에 쥐여 준다. 우리가 관심을 보이니 하나씩 팔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난처한 상황이었지만 그냥 하나만이라도 사자고 의논하고 얼마냐고 물어보니 이탈리아어로 뭐라고 뭐라고 하신다. 다섯 개는 너무 많다고 하나만 사겠다고 지갑을 보이며 얼마냐고 하니 돈을 받지 않으셨다. 그냥 가져가란다. 그러면서 계속 웃기만 하셨다. 무더운 날에 공방에 외롭게 혼자 앉아서 만든 기념품인데 그냥 받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돈을 손에 쥐여 드리고 나올 수도 없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모두 손에 그리스 신전을 하나씩 들고 할아버지의 배웅을 받고 밖으로 나왔다. 뭔가 설명할 수 없지만 뭉클한 마음이 솟았다. 다른 일행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할아버지의 마음을 추측해 보고 있었다. 스티로폼을 깎고 이쑤시개 같은 나뭇조각으로 연결해 놓은 신전 조각은 들고 다니다가 금방 부서져 버렸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았는데, 그 공방과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자꾸 슬퍼진다. 우리 일행이 예뻐 보이셨나 보다. 길도 모른 채 아그리젠토 거리를 헤맨 이유가 어쩌면 이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정수리가 아플 만큼 뜨거운 날씨였지만, 그늘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던 아그리젠토 거리 풍경. ⓒ 한성은
결국, 오후 늦게야 우리는 겨우 신들의 도시를 찾을 수 있었다. 그곳은 아그리젠토 외곽에 있었다. 보존 상태가 아테네보다 우수하다고는 하지만 콘코르디아(Concordia) 신전을 제외하면 나머지 신전들은 대부분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지 않았다. 아테네처럼 복원 작업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누군가는 그저 황량한 벌판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신전들이 도시 외곽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어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신전이 있는 지역을 모두 돌아보기 위해서 2시간 가량 걸어야 했다. 오후라고는 하지만 정수리 바로 위에서 내리쬐는 햇볕은 눈을 뜨고 있기도 힘들 정도였다. 힘들게 찾아오긴 했지만 다들 우리가 고고학자도 아닌데 무너진 신전 기둥을 보기 위해서 이 더위에 2시간을 걷는 건 자살 행위라며 그냥 차를 타고 주변을 크게 한 바퀴 도는 거로 만족하자며 의기투합했다. 그리고는 피난민처럼 온몸을 감싸 매고 차 안으로 대피했다. 한여름 시칠리아는 정말 더웠다. 아니 뜨거웠다.

아그리젠토에서 또 하나 유명한 곳은 '터키인의 계단(Scala Dei Turchi)'이라 불리는 석회암 지형이다. 아그리젠토에서 레알몬테(Realmente) 방향으로 차를 타고 20분 정도 달려가면 탁 트인 지중해를 따라 끝없이 펼쳐진 마자타 해수욕장(Majata Beach) 나타나는데, 그 해변의 끝에 마치 고대 그리스 신들이 언덕을 오르기 위해 사용했을 법한 환상적인 계단이 있다. 현지인들에게도 유명한 휴양지인 마자타 해변에는 오후 늦은 시간인데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안 그래도 좁은 해안도로를 따라 양쪽으로 불법주차 중인 차들이 줄지어 있어서 교통체증도 심했다. 주차장이 보이지 않아서 우리도 빈자리에 주차해볼까 하고 기웃거리는데 마침 반대편에서 경찰차가 나타났다. 경적을 울리면서 주차하면 안 된다고 막 뭐라고 했다. 겁을 잔뜩 먹는 나는 '쏘리'를 연신 외치며 주차장을 찾아 계속 차를 몰고 들어갔다. 결국 찾은 주차장은 엄청 가파른 비탈에 있었는데, 그나마도 가득 차서 주차할 곳이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으니 관리인이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고, 이대로 차가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은 아닐까 싶은 곳에 주차하라고 했다. 겨우 주차를 하고 해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마자타 해변을 따라 끝까지 걸어가면 터키인의 계단이 있다. ⓒ 한성은
석회암을 물에 적셔 바위에 갈면 천연 팩이 된다. ⓒ 한성은
여유롭게 해수욕과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로 한참을 걸어가니 저 멀리 하얀 계단이 보이기 시작했다. 햇빛을 받아 눈이 시리도록 빛나는 새하얀 석회암 언덕은 정말로 바다 위에 떠 있는 대리석 계단 같았다. 파란 하늘과 푸른 지중해와 황금빛 해변이 만나는 곳에 있는 새하얀 석회암 언덕은 세상에 없는 장소처럼 생경했다. 바다에 떠 있는 석회암 언덕이란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너무나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곳을 보자마자 터키의 파묵칼레가 생각났다. 혹시 파묵칼레 때문에 터키인의 계단이라고 이름을 지었나? 궁금해서 여기저기 찾아봤지만 이름의 유래는 알 수 없었다.

마자타 해변에서 터키인의 계단까지는 또 20분 정도 걸어서 들어가야 했다. 해변이 정말 길었다. 저 멀리 터키인의 계단이 보이지만 거리는 줄어들 줄 몰랐다. 하지만 하얀 석회암을 갈아서 온몸에 바르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 걸어가는 길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작은 석회암을 손에 들고 바위에 대고 문지르면 하얀 진흙처럼 부드럽게 갈리는데 그걸 온몸에 바르는 것이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들 온몸에 하얀 석회칠을 하고 있었다.

계단에 가까이 다가가니 지형이 조금 더 뚜렷하게 보였다. 석회암 계단은 평평하지 않고 하늘을 향해 30도 정도 기울어 있었다. 그리고 언덕 위에는 휘어진 석회암 위로 다시 고운 흙이 쌓이고 그 위로 나무가 자라 숲을 이루고 있었다. 고등학교 지리 시간에 배웠던 용어들이 떠올랐다. 계단식으로 침식이 됐으니 저건 해안 단구인가? 아니면 경사 습곡이 융기한 후에 침식되었나? 신비한 광경을 보며 궁금증이 더해갔다. 일행들 중에 관련 분야를 전공하는 사람이 없어서 서로 막연한 추측을 할 뿐 명쾌한 답은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저 바라보며 궁금해하고 추측해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학창 시절에 배웠던 지식이 필요한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그때 좀 더 열심히 공부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참 많이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실제로 배경 지식이 조금 있는 곳에서는 그림 한 장, 기둥 하나가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앞에 서 있어도, 아는 것이 없으면 그저 내가 이곳에 왔노라는 인증 사진 몇 장 찍는 것이 전부다.

학교 공부도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배움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학생들이 알 수 있게 도와줄 수는 없을까. 나 역시 고등학교 3년과 재수생 시절까지 보내며 공부가 즐거웠던 적은 없었다. '대체 이런 것들을 왜 배우는 걸까' 하는 발칙한 질문에 대한 답은 스스로 찾았었다. '이 지긋지긋한 공부를 그만하기 위해서는 이 지긋지긋한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한다.'는 것이 그 당시 내가 찾은 대답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부끄럽기 그지없는 생각이지만, 지금 아이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왜 우리는 아이들에게서 배움의 기쁨을 빼앗고 대신 승리의 기쁨을 가르치는 걸까. 그나저나 터키인의 계단이 어떤 과정을 거처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참 궁금하다.
터키인의 계단 위에 서서 바라보는 지중해는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워 서글프기까지 했다. ⓒ 한성은
그 모습에 반하여 눈에 담기 보다 카메라에 담기 바빴던 터키인의 계단. ⓒ 한성은
파란 하늘, 푸른 바다, 황금빛 해변 그리고 새하얀 터키인의 계단을 사진에 담기 위해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연이어 사진을 찍어 댔다. 그 풍경을 손에 넣고 싶어서 이리저리 아무리 사진을 찍어봐도 담을 수가 없다. 이 환상적인 장면을 핸드폰 속에 오롯하게 담을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내 눈앞에서는 넘실거리는 바다가 햇볕을 조각내어 빛나고 있고 하늘을 향해 솟은 석회암 언덕은 새파란 하늘로 당장에라도 박차고 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내 핸드폰 속에서는 그 영롱한 빛은 온데간데없고, 얼룩 같은 바다와 산과 사람들이 가득했다.

사진을 찍어서 이 순간을 박제할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살갗을 타고 흐르는 바람을 느껴야 할텐데 내 욕심은 끝이 없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금에야 찍어온 사진을 다시 보며 후회한다. 사진에 정신이 팔려 이 아름다운 풍광을 휴대전화 액정 너머를 통해서 더 오랫동안 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나에게 필요한 것은 사진이 아니라 오랫동안 천천히 음미하는 것이었다. 매 순간 모든 장소가 내 생애 마지막일 수도 있는데 돌아와서야 후회가 남는다.

터키인의 계단은 그만큼 눈부셨다. 신발을 벗어들고 바닷가로 걷다가 맨발로 석회암 언덕을 기어올라 정상에 섰다. 눈앞에 지중해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했다. 햇볕이 좋고 공기가 맑아서 시야에 막힘이 없었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경치 앞에서 알 수 없는 서러움이 올라왔다. 마치 내가 세상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긴 실제로도 나는 삶의 벼랑 끝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을 다닌다고 하면 누군가는 부럽다고 하지만 여행자라는 직함은 전쟁이 끝난 뒤 하나씩 나눠 갖는 훈장처럼 수많은 상처가 쌓여 있는 단어다. 나는 문제 없다며 자신 있게 큰소리치며 나왔지만, 그 소리의 크기는 내 두려움과 정비례했다. 여행길이 지치고 힘들 때는 오히려 먼 미래의 불안이 내 안에 파고들 틈이 없었지만, 지금처럼 눈이 시린 풍경 앞에 서서 환희가 주체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그제야 잊고 지낸 불안이 그림자처럼 따라 왔다.

불안이 어깨 위에 앉아 있었기 때문일까? 다음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 가파른 주차장에서 차를 빼다가 결국 사고가 났다. 수동 6단 기어는 후진 기어가 1단 위치에 있었다. 기어 스틱을 살짝 들어 올려서 1단을 넣어야 하는데 이게 잘 익숙해지지 않았다. 안 그래도 가파른 경사에서 후진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잔뜩 긴장하고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는데 후진 기어가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서 차가 앞으로 돌진해버렸다. 급하게 정지를 했지만, 안전 펜스에 앞범퍼가 살짝 긁혀 있었다. 긁힌 범퍼를 보자 진땀이 났다. 일행들도 모두 놀란 눈치다.

"우리 수리비 못 갚아서 마피아들에게 잡혀가는 건 아닐까?"
"괜찮아, 자차보험도 들어 있으니까 별일 없을 거야."

외국에서 렌터카를 이용하는 것도 처음인데, 사고를 내는 것도 처음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진정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얼른 내 마음속에 있는 '아Q'를 불렀다. 머릿속에 국어사전을 펼쳐 놓고 이 순간에 가장 어울릴만한 단어를 찾아냈다.

'차가 바다에 빠졌다거나 다른 차를 들이받지 않았으니, 만약 사고가 반드시 나야 할 운명이었다고 한다면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사고잖아. 이런 게 바로 액땜이야.' 

이탈리아 렌터카 회사는 새까맣게 그을려 한없이 불쌍하게 생긴 동양인에게 수리비를 얼마나 청구할까 상상을 하고 있는데, 어느새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얼른 출발해야 했다. 다음 목적지는 이탈리아 최남단인 시칠리아에서도 가장 남쪽에 있는 도시 '모디카(Modica)'였다. 첫날 일정을 준비한 일행의 설명은 간단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한 마디에 홀려서 모디카로 갔다.

"모디카에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제조법으로 알려진 고대 아즈텍 방식으로 초콜릿을 만들고 있다. 그러니까 꼭 먹어봐야 한다. 싫으면 말고." 

모디카 초콜릿은 에스파냐가 시칠리아를 지배하던 시절에 남아메리카 아즈테카(Azteca)에서 카카오와 초콜릿 제조법을 그대로 가져와 시칠리아에서 초콜릿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고대 아즈테카 문명과 아즈텍인들은 에스파냐의 침략으로 역사 속에서 사라졌지만, 그들의 초콜릿 제조법은 시칠리아 모디카의 관광 상품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일반 초콜릿보다 낮은 온도에서 만들기 때문에 설탕이 완전히 녹지 않고 아삭아삭 씹히는 것이 모디카 초콜릿의 특징이다. 설탕을 완전히 녹이지 않고 만드는 초콜릿 제조법은 이곳 말고도 몇 군데가 있는데 서로 원조라고 싸운단다. 아즈테카 문명은 그들에 의해 멸망하고 없는데, 바다 건너 이탈리아에서 서로 우리가 원조네 오리지널이네 하는 꼴이 우스웠다.

그나저나 아그리젠토에서 모디카까지는 지도상으로 150km였는데 예상 소요 시간은 3시간이 훨씬 넘었다. 분명히 지도상의 거리가 틀렸거나 또는 예상 시간이 틀렸을 거로 생각하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모디카에 도착하고 보니 거리도 맞았고 예상 시간도 정확했다. 내비게이션을 믿지 않았던 우리가 틀린 것이었다. 알파고가 이세돌도 이겼는데, 우리 같은 범인이 내비게이션님을 믿지 않는다니. 우리가 어리석었다.

시칠리아의 도로 사정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안 좋았다. 카타니아에서 팔레르모로 가는 고속도로 하나를 제외하면 왕복 4차선 도로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일반 국도는 왕복 2차선에 산과 바다를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심지어 도로에 가로등이 전혀 없어서 사방이 어두웠다. 결국, 우리는 거의 4시간 만에 모디카에 도착했다. 여행 전 몇 개 읽었던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에 시칠리아에서는 일정을 여유롭게 잡고 다니라는 이야기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예상 시간을 훌쩍 넘겨 도착한 모디카에서 한여름밤의 여유를 즐겼다. ⓒ 한성은
예상했던 시간보다 훨씬 늦게 모디카에 도착하는 바람에 염두에 두었던 초콜릿 가게는 들어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모디카 성당 앞 광장 노란색 가로등 아래에서 여름밤을 즐기는 시칠리아 사람들 사이에 앉아 한여름 밤의 꿈 같은 모디카 야경을 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초콜릿 역시 고풍스러운 가게에서 자세한 설명을 듣고 이것저것 맛보며 살 수 있었다. 모디카 초콜릿은 달지 않고 알싸한 맛이 났고, 사각사각 씹히는 설탕 가루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특별히 더 맛있다거나 특이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음식 맛의 8할은 분위기라고 하지 않던가. 양이 너무 적어서 새초롬했던 에스프레소와 함께 오독오독 씹었던 알싸한 초콜릿 맛은 모디카의 시원한 밤바람과 어우러져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았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도 멀기만 했다. 최단거리를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은 우리를 포장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산길로 안내해 주었다. 5명이 복작거리며 달렸기에 망정이지 혼자였다면 도로를 가로질러 달려가는 노루와 토끼를 보았을 때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이런 내 마음도 모른 채 일행들은 밤하늘에 설탕 가루처럼 뿌려져 있는 별들을 보며 노루를 향해 지르지 않았던 비명을 그제야 질러댔다. 깜깜한 산길을 달리느라 긴장해서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였지만, 창문 넘어 흘끔 바라본 시칠리아 밤하늘은 차를 잠깐 멈추고 싶을 만큼 예뻤다. 물론 그 하늘보다 내 긴장과 두려움 더 컸기 때문에 우리는 잠시도 쉬지 않고 숙소로 달려갔지만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블로그 '타박타박 아홉걸음' http://ninesteps.tistory.com에도 동시에 게재되었습니다.

태그:#타박타박 아홉걸음 세계일주, #타박타박, #아홉걸음, #시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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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란 저에게 아이들이 "선생님"이라고 불러줍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은 성실한 여행자가 되어야겠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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