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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43년 전인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 그랜드팔레스 호텔에서 김대중납치사건이 발생했다. 해외 망명 후 일본과 미국을 오가면서 반유신투쟁을 전개하던 김대중은 납치된지 5일만인 8월 13일 극적으로 살아 돌아오게 된다.

이 사건은 한일 양국 정부의 공식적인 조사에 따른 진상규명 그리고 법적인 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채 정치결착에 의해 봉합되었다. 다만 진상규명을 위한 한일 양국 민간 차원의 노력이 장기간 이어지면서 몇 가지 사안을 제외하면 사건의 실체적 진상은 대체로 밝혀진 상황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이 사건의 실체에 대한 설명을 반복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이 사건을 통해서 나타난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한일관계, 그리고 그 후 김대중 집권 시기 한일관계를 살펴본 후 김대중 대일 실용 외교의 특징과 의미에 대해서 주목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최근 강대국 간의 패권경쟁이 격화되기 시작하면서 한국 외교의 방향에 대해 많은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데, 이 시점에서 김대중의 대일 실용주의 외교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반일민족주의라는 우리 사회 일반의 정서와 일본 정부로부터 배신당하여 심각한 인권 침해를 겪었다는 개인적 구원(舊怨)을 넘어서서 철저하게 국익중심의 사고로 대일외교를 펼쳤다. 그 결과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한일관계 역사상 가장 최고의 시기를 만들어 냈었다.

대일본 햇볕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김대중의 대일 실용외교의 의미는 무엇이고 현 시점에서 이것의 현실적 함의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기 위하여 먼저 한일관계의 흑역사이자 김대중의 인권이 철저하게 침해받았던 김대중납치사건 이후 상황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다.

김대중을 두 번 배신한 일본 정부

앞에서 잠시 언급했다시피 김대중납치사건은 양국 정부의 공식적인 조사와 법적인 조치 없이 한일 양국 정부의 2차례의 정치결착(1974년 11월, 1975년 7월)에 의해서 종결된 사안이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다.

정치결착 과정에서 김대중의 인권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았으며 피해자인 김대중의 인권 회복을 위한 노력도 없었다. 백주 대낮에 납치되어 5일 동안 생사의 기로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은 피해자 김대중의 입장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일본 정부가 첫 번 째로 김대중을 배신한 것이다.

그런데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일본 정부는 1980년 전두환 정권이 김대중에 사형선고를 내렸을 때 이에 대해서 강력하게 항의하여 김대중 구명운동에 나설 수 있는 입장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것은 1974년 11월에 있었던 1차 정치결착의 내용과 관련이 있다.

1974년 11월 제1차 한일정치결착의 2번째 내용을 보면 해외에서 있었던 김대중의 언행에 대해서 문제삼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이 김대중에 대한 사형선고를 내린 이유는 납치사건 이전 일본에서의 활동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두환 정권의 행동은 한일정치결착을 위반한 것이어서 일본 정부는 이에 항의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을 국가보안법상 '반국가 단체'의 수괴라는 명목으로 사형선고를 내렸다. 여기서 전두환 정권이 지목한 반국가 단체는 1973년 납치사건 직전에 조직 결성 준비를 하고 있던 한민통 일본본부를 지칭하는 것인데, 김대중이 여기에 의장이었기 때문에 반국가 단체 수괴라고 몰아세운 것이다.

물론 당시 사형선고를 받았던 김대중이 후에 재심에 의해 무죄판결을 받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사건은 완전히 조작된 것이었다.(이 글의 목적이 이 사건과 관련된 것에 있지 않으므로 상세한 설명을 생략하겠음)

사건 조작과 상관없이 일본 정부는 전두환 정권의 이와 같은 조치에 대해서 한일정치결착 위반이라는 이유로 항의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일본이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했다면 김대중을 제거하려는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은 크게 흔들릴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 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은 채 김대중이 사형선고를 받는 상황을 수수방관하였다.

재판을 받고 있던 김대중은 일본이 정치결착 위반을 이유로 이 사안에 개입할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후에 김대중은 사형선고를 내린 전두환 정권보다 이를 수수방관한 일본에 대해 더 큰 분노를 느꼈다고 말한 바 있다. 김대중에 대한 일본 정부의 두 번 째 배신이었다.

이렇게 일본은 두 차례에 걸쳐서 김대중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였다. 김대중도 사람이기 때문에 이 정도면 김대중이 일본에 대한 구원(舊怨)을 가질 법도 하다. 그러나 김대중은 대통령이 된 이후에 전혀 그렇지 않았다. 대통령 김대중은 일본과의 '화해'와 '미래지향적 관계'를 새롭게 구축하여 한일관계 역사상 최고의 시기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한일관계의 획기적 전환을 이뤄낸 김대중

우리 사회에서 반일민족주의의 영향력은 매우 강력하다. 그래서 정치지도자들이 국내 정치적인 목적으로 반일 민족주의를 활용하려는 유혹을 받기 쉽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하여 거시적인 국가 전략을 갖고 일본과의 적극적인 외교를 펼칠 담대한 비전을 갖지도 못하였다. 한일관계에 있어서 이와 같은 패턴이 지겹도록 반복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 현대사 전체를 놓고 볼 때 김대중 정권 시기 한일관계는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된 시기였다. 먼저 김대중은 반일민족주의를 국내 정치적인 목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의 전략적 가치를 중시하여 일본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를 펼쳐서 한일관계의 획기적 전환을 이뤄냈다. 이는 김대중 실용외교의 큰 업적이자 일본판 햇볕정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김대중의 구상이 구체적인 성과로 나오게 된 것이 1998년 일본의 오부치수상과 발표한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을 위한 공동선언'이다. 이 선언이 한일관계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매우 크다. 1965년 국교 정상화후 한일관계를 1965년 체제라고 한다면 이 선언 이후 한일관계를 1998년 체제라고 규정할 정도로 매우 획기적인 의미가 있는 선언이었다. 왜 그런가?

먼저 이 선언에서 일본 정부가 '식민통치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정부 공식 문서로 명문화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큰 의미가 있다. 1995년 무라야마 총리 담화에서 일본은 전쟁 당시 아시아 여러 국가들에게 끼친 고통에 대해서 사죄를 했었는데, 그 담화에서는 한국을 따로 지칭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한국을 상대로 정부 공식문서로 사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은 '화해'와 '미래지향' 이라는 2가지 컨셉으로 화답했다. 한국 내 여러 우려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하여 한일간 사회문화 교류 확대의 새로운 역사를 이뤄냈다. 그 뿐만 아니라 한일관계에 있어 기존의 무역 중심의 경제적 교류를 넘어서 양국 시민사회 사이의 교류 협력이 확대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통해서 한일관계의 질적인 성숙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김대중, 대일본 햇볕정책을 펼치다

그리고 이와 같은 김대중 대일 외교의 전략은 한반도 냉전구도 해체라는 그의 원대한 구상 속에서 나온 것이다. 소련이 붕괴하여 냉전체제가 해체된 유럽과 달리 동북아 지역은 냉전의 잔재가 잔존한 채 지역의 안정과 평화의 위협적인 요인이 되고 있다. 이는 남북한 그리고 중국과 일본 등 동북아 지역 주요 국가들이 서로 화해하지 못한 채 적대적 대립 속에서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김대중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남북한 사이의 화해와 협력 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화해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일본의 전략적 가치를 중시하여 일본이 냉전적 대립 노선에서 탈피하여 평화와 안정의 조력자이자 주요 플레이어가 될 수 있도록 유도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래서 김대중은 이를 위해 북한을 상대로 한 햇볕정책뿐만 아니라 일본을 상대로 한 햇볕정책도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김대중은 한국 정부의 대북 햇볕정책에 대한 일본의 협조를 이끌어 내고 일본이 대북 관계 정상화를 하는 것이 일본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꾸준히 설득하였다. 이것의 결정적인 성과가 2002년 9월 고이즈미 수상의 전격적인 방북이었다.

김대중 집권 후반기 대일 관계 일본측 파트너는 고이즈미 수상이었다. 그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여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초래하기도 하였는데 김대중은 이에 개의치 않고 고이즈미 수상과 매우 자주 만나서 정상 외교를 했다. 김대중은 대북관계 정상화가 일본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로 고이즈미를 설득하였던 것이다.

당시 고이즈미의 방북은 강경파 미국 부시 정부의 입장과 다르기 때문에 일본이 미국 편향적인 태도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외교 전략을 취한 것으로 평가받기도 했었다. 이는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지역 냉전구조를 근본적으로 해체하려는 김대중의 원대한 구상이 반영된 것이었다.

이처럼 김대중은 일본과의 화해 협력의 기틀을 세우고 일본을 우리 외교의 우군이 될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이는 반일민족주의를 국내 정치적인 목적으로 활용하고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미리 포기한 채 막연히 '가깝고도 먼 나라'로만 대하는 기존 정치인들과는 차원을 달리한 것이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김대중의 실용 외교를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는?

김대중은 1998년 10월 방일 기간 중 일본 국회에서 한 연설에서 '기적은 기적처럼 오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었다. 이는 한국 민주화의 성과가 피와 땀으로 이뤄낸 힘들고 값진 성과였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그 노력에는 진정한 화해와 협력을 위한 결단과 용기 그리고 관용의 정신도 포함된다. 김대중은 2번에 걸쳐서 일본 정부로부터 매우 치명적인 배신을 당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단순한 구원(舊怨)으로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높은 도덕적 리더십의 근원으로 삼아서 대일 외교를 리드하는 대정치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김대중의 원칙있는 실용외교는 지금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감정과 이념을 강조하지 않고 강대국에 둘러쌓인 지정학적 약점을 오히려 지정학적 강점으로 유도하기 위한 거대한 비전과 치밀한 전략은 지금도 유효하고 앞으로도 유효할 것이다.

특히 북한 핵과 미사일 위기가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고 사드 배치 문제로 강대국간의 패권경쟁이 격화될 조짐이 보이는 지금 시점에서 김대중의 혜안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이것이 김대중 납치사건 43주년이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 시사점이라고 생각한다.


태그:#김대중, #김대중납치사건,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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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사료연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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