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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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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게나 찍어도 작품이 되었던 에게해 작은 섬들 중 하나. ⓒ 한성은
저 멀리 부서지는
파도 소리 귓가에 들려
바다는 말이 없지
소주 한 병 손에 들고
난 마도로스 김
인생은 여기 있다.
태평양을 항해하는
나는야 바다 사나이

- 노브레인, '바다 사나이' 노랫말 중에서

거대한 페리를 타고 에게해를 가로지르며 망망대해를 넋 놓고 바라본다. '페리', '에게해' 같은 이국적인 단어는 그것을 가만히 입안에서 혀를 굴려 발음해 보는 것만으로도 설렌다. 나에게 있어서 미코노스, 산토리니, 크레타는 지금껏 무라카미 하루키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작품 속에서만 존재하는 상상의 섬들이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구칸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영화를 찍고 있다. 에게해 바다 위에 하얀 솜털처럼 떠 있는 그곳으로 가는 것이다. (구칸Gukan은 여행 중에 사용하는 기자의 영어 이름입니다. 저의 소중한 제자들이 저에게 붙여 준 이름이라 그대로 영어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테네 시내에서 T4 트램을 타고 끝까지 가면 피레아스(Pireas) 항구다. 도심을 가로지르고, 해변을 따라 달리는 T4 트램은 언제 타도 기분이 좋은 노선이다. 아테네에서 에게해 섬들을 연결하는 페리 회사는 블루 스타 페리(Blue Star Ferries), 아넥 라인(Anek Lines) 그리고 헬레닉 시웨이스(Hellenic Seaways)까지 세 군데가 있다.

세계적으로 워낙 유명한 노선이다 보니 티켓을 예매하는 방법이 다양했다. 인터넷에서 페리 가격비교 중계사이트를 통해서 예약할 수도 있고, 아테네 어디나 있는 여행사를 통해 예약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경험해 본 바로는 항구에 있는 티켓 매표소에서 직접 구매하는 것이 가장 저렴했다. 해당 페리 회사 홈페이지에서 직접 예매를 하면 정상 가격(?)으로 예매할 수 있는데 출발 5일 전까지만 예약할 수 있었다.

게다가 홈페이지를 운영하지 않는 회사도 있었다. 그리고 모든 티켓에는 예매 수수료가 있었다. 전 세계 최저가 페리를 검색해 준다는 중계 사이트는 승선 일이 가까워서인지, 본래 가격보다 두 배나 높은 가격을 나에게 제시했다. 여행사를 통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여행사에서는 주로 패키지여행 상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결론은 여행 일정이 자유로운 배낭 여행자들은 직접 항구에 찾아가서 티켓을 구매하는 것이 가장 저렴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페리의 요금 체계가 어떻게 책정되는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는데, 운항 거리가 멀다고 해서 비싼 것은 아니었다. 또, 비싸다고 해서 페리의 편의 시설이 더 좋은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아테네-미코노스 페리는 지정 좌석이 없어서 카페테리아의 의자에 앉아서 가기도 했다. 모든 이코노미석이 늘 그런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페리는 안락한 의자가 마련된 지정 좌석이 있었다. 섬들을 여행하는 페리 요금을 모두 합하면 어지간한 국가 간 이동보다 훨씬 비쌌다. 교통편이 비싸다고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저 숙박비와 식비를 더 줄이자는 다짐만 하고 티켓을 샀다.

알쏭달쏭한 에게해 섬 페리 티켓의 가격
아테네에서 미코노스까지 블루 스타 페리를 타고 갔다. ⓒ 한성은
글로 옮기면 참 간단하지만, 실제로는 온종일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렸던 그리스 에게해 섬 투어 중 첫 번째 목적지인 미코노스행 페리 티켓 예매가 끝났다. 그리고 행여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페리는 얼마에 어떻게 예약하셨어요?"라는 질문은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힘든 일을 끝내고, 모든 세계지리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코린토스(Corinth)운하로 향했다. 아테네에서 코린토스 운하까지는 버스로 1시간 정도 걸린다. 아테네 시내에서 51번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면 키피소우(Kifissou) 버스터미널이다.

외국의 낯선 도시에서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이 굉장히 힘들 것 같은데, 실제로는 전혀 어렵지 않다. 모든 배낭 여행자들이 마치 종교처럼 믿는 것이 구글 지도다. 한국에서는 구글 지도가 인기가 없다. 실제로 그다지 유용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 역시 한국에서는 언제나 국내 지도 서비를 이용했기 때문에 구글 지도를 사용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해외에서는 구글 지도가 매우 유용하다. 여행하고자 하는 지역을 미리 내려받으면 오프라인 상태에서도 지도를 이용할 수 있다. 여러 국가를 여행할 때 이동하는 국가마다 심카드를 사서 데이터를 사용하는 것은 번거롭기도 하고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든다. 사실상 숙소 밖을 나오면 인터넷에 접속할 방법이 없다. 오프라인 지도는 그럴 때 매우 유용하다.

또 하나, 목적지를 입력하면 거기까지 가는 대중교통 정보가 나온다. 대중교통 정보는 기대 이상으로 매우 정확하다. 구글은 대체 이 방대한 정보를 어떻게 관리하는지 신기할 정도다. 목적지를 입력하고 구글 지도가 알려주는 정거장으로 가서 구글 지도가 알려 주는 버스 노선을 타면 된다. 갈아타야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지도를 보며 현재 어디쯤 가고 있는지 확인하면 내려야 하는 곳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버스의 안내 방송이 없어도, 영어가 아닌 현지어로 목적지를 안내해도 전혀 불편하지 않다.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10년 정도 살았었는데, 서울 지리를 잘 모르는 시골 촌뜨기였던 나는 언제나 지하철을 탔었다. 명동에서 종로를 갈 때도 지하철을 갈아타고 갔었다. 그러다가 명동에서 청계천을 건너 종로로 걸어가는 길을 알게 되었을 때  '나 이제 정말 서울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리고 늘 타던 지하철이 아닌 시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날 스쳐 지나가는 서울 야경을 바라보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었다. 그때는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대중교통 시스템은 몸으로 직접 부딪혀가며 배웠어야 했다. 지금도 그때의 기분이 뚜렷하게 떠오른다. 우습지만, 버스에 앉아 나는 참 뿌듯했었다.

다른 나라, 다른 도시에서 시내버스를 타는 것을 참 즐겁다. 시내버스를 타고 있으면 내가 바람처럼 떠다니는 관광객이 아니라 잠시나마 이 도시의 주민이 된 듯한 생각이 든다. 그리고 시내버스에는 그 도시를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택시를 탈 형편이 안 되니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하지만, 낯선 도시를 시내버스에 앉아 곳곳을 누비는 재미는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 중에 하나다. 얼마 전 일본 교토에 여행 갔을 때 참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때 쓴 글들을 참고삼아 옮겨 놓아야겠다.

일본 교토 버스 1 :: 비합리적이지만 효율적인 질서 (http://ninesteps.tistory.com/27)
일본 교토 버스 2 :: 친절은 구조에서 온다. (http://ninesteps.tistory.com/28)
일본 교토 버스 3 :: 배려는 착한 것이 아니다. (http://ninesteps.tistory.com/29)
낯선 도시에서 버스를 타고 다니면, 내가 이방인이 아니라는 착각이 생긴다. ⓒ 한성은
아테네에서 출발한 버스는 1시간을 달려 코린토스 운하에 도착했다. 관광객들에게는 너무나 유명한 장소지만 막상 정거장에 내리면 황량한 도로변이다. 아테네에서 코린토스 방향으로 가는 도로에는 변변한 정거장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다. 길 건너 아테네 방향 버스 정거장은 휴게실도 있고 나름대로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버스가 운하를 건너는 다리 입구에 정차하기 때문에 운하를 찾는 것은 쉽다. 아마 그 다리 위에는 1년 내내 관광객들로 북적이지 않을까 싶다.

아직 운하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관광객들의 탄성은 멀리서도 들을 수 있었다. 이미 수도 없이 사진으로 봤던 코린토스 운하지만,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나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아마 모두들 각자가 자기의 언어로 최고의 감탄사를 외치고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다리 한가운데서 운하를 내려다보며 그랬으니까.

사람들의 탄성이 이어지는 곳을 향해 걸어가서 고개를 돌리자 거대한 코린토스 운하가 나타났다. 코린토스 운하를 마주한 순간은 잠시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겨우 인식하고 나서야 뒤늦게 감탄이 터져 나왔다. 수직으로 깎아지른 벼랑 사이로 벽옥 같은 바닷물이 흐르고 있었다. 저 멀리 시간을 잊은 듯 느리게 움직이는 작은 유람선을 보고서야 이곳이 사람의 손으로 파낸 뱃길이란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세계 3대 운하 중 하나라고 하는 코린토스 운하 ⓒ 한성은
운하를 가로지르는 80m 다리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난간을 붙들고 있는 손에서 땀이 나고, 발끝이 찌릿찌릿했다. 고개를 내밀고 물빛을 쳐다보고 있으면 이대로 떨어져 버리지는 않을까 싶어 두려웠다.

아름다움보다는 공포감이 먼저 다가왔다. 얼른 고개를 들고 시선을 멀리에 두자, 이번에는 다른 두려움이 다가왔다. 폭 24m에 깊이 80m로 무려 6km나 땅을 파내어 만든 이 거대한 코린토스 운하는 고대 로마 시대 네로 황제부터 파기 시작해서 몇 번의 좌절과 새로운 시도 끝에 19세기 말(1893년)에 이르러 결국 완공했단다. 기어이 이 역사(役事)를 이루어 낸 것이다. 그 순간 나는 경이롭다기보다 섬뜩했다.

10년 전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올라 그야말로 지구를 발아래 두고 섰을 때, 무려 일주일을 걸어올라 해발 4300m에 올라섰다는 성취감에 보다는 나라는 존재가 이 지구에서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깨달았다. 지금까지 늘 가지고 있는 자연에 대한 경외는 그때 생겼던 것 같다. 그 후로 누가 들으면 허공에 달 가는 소리 같을 '자연의 섭리'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었고, 거대한 자연 앞에서 겸손할 줄 알게 되었었다. 인류의 지속적인 번영을 위해서도 우리는 자연 앞에서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학생들에게도 많이 이야기해왔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코린토스 운하를 바라보면서는 인간에 대한 경외감이 들었다. 우리 인간은 멀리 돌아가는 바닷길을 줄이기 위해서 땅을 파내어 새로운 물길을 열었다. 지형이 바뀌었고, 육지였던 지역이 이제는 걸어서 갈 수 없는 섬이 되었다. 계획을 세우고 첫 삽을 떴을 기원전에는 지금 같은 중장비가 있지도 않았으니 그야말로 인간이 가진 근력만으로 땅을 파 내려갔을 것이다. 내가 느낀 인간에 대한 경외감은 사실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설사 땅을 가르는 일이라도 해내고야 마는 '의지' 그것은 그저 '욕망'의 다른 이름 아닐까.

깎아지른 벼랑이 칼로 자른 듯 반듯하지 않고 울퉁불퉁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 그 당시에는 노예라 불렸을 많은 사람들이 이 자리에서 땅을 팠을까. 거대한 역사는 지배자의 굳은 의지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의지를 실현하게 해 줄 희생이 필요하다. 내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이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까. 운하가 완공된 당시에는 물길이 획기적으로 짧아져 어마어마한 경제적 이득이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그 폭이 너무 좁고 수심이 얕아 큰 배가 다닐 수 없어서 그저 관광 상품으로만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관광객 중의 한 명이다.

과연 이 운하는 가늠할 수조차 없는 수많은 사람의 목숨과 바꿀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일까. 아니, 이 세상에 사람의 생명과 바꿔서라도 반드시 이루어야 할 공사라는 것이 있기는 할까. 나는 그저 그 시대에 노예로 태어나지 않고, 2016년에 관광객으로 찾아왔으니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두려웠다. 차라리 운하가 완공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면 괜찮지 않았을까. 그들은 결국 자신들의 무모함을 깨닫고 깨끗하게 미련을 버렸다고, 그래서 이렇게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다고 했다면 그걸 보는 마음이 조금은 편하지 않았을까. 운하를 처음 계획한 네로 황제는 정수리가 타는 듯한 지중해 불볕더위 아래에서 곡괭이를 들어 봤을까.

몇 해 전에 새만금 간척사업을 하는 변산반도에 간 적이 있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방조제가 마치 고속도로처럼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차들은 바다 위로 달리고 있었다. 휴게실에 내려 왼편과 오른편을 보니 모두 수평선이 보이는 바다였다. 그때 친구들에게 했던 질문은 "그래서 이쪽은 메우는 거야 저쪽을 메우는 거야?"였다.

바다를 메워 땅으로 만들겠다는 인간의 욕망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하고 소름이 끼쳤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새만금 사업이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무모하게 보였다. 하지만 우리는 언젠가 기어코 지도를 바꾸는 이 공사를 끝내고야 말 것이다. 그때 우리는 바다를 메워 육지로 만든 현장에 서서 뿌듯함을 느끼게 될까?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은 우리가 드넓은 갯벌을 없애고 바다를 메워 국토를 넓혀 놓은 지금 선조들을 향해 대단히 훌륭한 업적이라며 찬사를 보낼까?

코린토스 다리 난간에는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것처럼 수많은 연인들이 걸어 놓은 자물쇠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이곳에 자물쇠를 걸어두고 열쇠를 저 바다로 멀리 던져 둔 연인들은 모두 행복하게 잘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서울 남산에 걸려있는 자물쇠의 주인공들이 현재 어떻게 지내는지 통계를 낸 다음 그 결과를 그래프로 만들어서 옆에 같이 세워두면 재미있을 것 같다. 남산의 야경이 정말로 연인들의 약속을 지켜주고 그들이 영원한 사랑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결과가 나온다면 전 세계의 연인들이 반드시 찾아야 하는 관광지가 되지 않을까. 물론 그 반대라면 곤란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정말로 통계를 발표한다면, 사랑에 빠진 연인들에게 사소한 일로 쉽게 헤어지지 못하게 하는 의무감을 주는 효과는 있을 것 같다. 남산 야경이 주는 마법을 지속시켜야 관광객이 많아질 테고, 그것이 국익을 위한 일이니까 국가 차원에서 지원도 해주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실없는 이야기는 이제 그만해야지 싶다.

아테네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다시 다리를 건너 돌아 나오는 순간 짧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이어지는 사람들의 환호가 들렸다. 돌아보니 그 다리 아래에서 번지 점프를 하고 있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대단한 사람들이다. 나는 아직 번지 점프는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곳에서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에게는 3초 만에 자유 낙하하는 높이일 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높이니까 말이다.

미코노스행 페리 타기, 서두르길 잘했다
코린토스 운하 건설 기념비와 사랑의 언약들 그리고 번지점프. ⓒ 한성은
미코노스행 페리는 아테네에서 아침 7시 30분에 출발한다. 1시간 전에는 항구에 도착해서 발권하고 배를 타는 것이 좋다고 해서 꼭두새벽에 일어나 숙소를 나섰다. 아직 첫차도 다니지 않는 시간이었다. 일주일간 머물며 정이 많이 들었던 아키스의 집을 나서니 괜히 서운했다. 집채만 한 배낭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떠나기 전에 멋진 베란다에 놓으라고 작은 화분이라도 선물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결국, 마음만 계속 먹어 배는 불러올 지경이었지만, 꽃 가게를 찾고자 거리를 헤매고 다니지도 않았었다. 선물은커녕 새벽에 나선다고 아키스와 제대로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하고 나섰다.

어머니는 늘 나에게 '잔정이 없는 인간'이라고 하시는데, 결국 이런 것들이 쌓여서 다른 사람에게 잔정이 없는 인간으로 남게 되는 것 같다. 관계를 이어가는 일은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선천적으로 잘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분명히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었다. 마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 말조차 건네기가 어렵다. 조용히 현관문을 닫고 나서는 내 걸음마다 아쉬움이 자꾸 묻어났다.

버스 첫차를 타고 T4 트램을 갈아타고 열심히 걸어서 피레아스 항구에 도착했다. 줄지어 선 거대한 페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큰 페리는 지금껏 타본 적도 없고 실제로 이렇게 가까이에서는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엄청나게 많은 승용차와 대형 유조차, 컨테이너 화물차들이 끊임없이 배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실을 수 있는 걸까. 그 유명한 타이타닉호는 이것보다 컸을까? 바보처럼 입을 헤벌쭉거리며 블루 스타 페리(Blue Star Ferrise)사의 파트모스(patmos)호에 올라탔다.

나는 승무원의 멋진 미소를 받았고, 승무원은 나의 티켓을 받았다. 그녀는 나에게는 너무 비싼 이코노미석 승차권의 절반을 찢어 갔다. 승선하는 느낌이 마치 다른 도시에 발을 들여놓는 것 같았다. 객실로 바로 통하는 선내 엘리베이터를 두고 굳이 계단으로 걸어 올라간 것은 3층, 4층으로 이어지는 이 배의 높이를 직접 느껴보고 싶어서였다. 물론 20kg의 배낭이 껌딱지처럼 등에 붙어 있어서 배의 높이를 체감하기 전에 내가 얼마나 부실한 인간인가를 먼저 체감했다는 건 조금 부끄럽지만 말이다.
아테네 피아레스 항구의 부산한 아침 풍경. ⓒ 한성은
블루 스타 페리의 내부 모습. ⓒ 한성은
글을 쓰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사실 그 정도 페리는 지중해에서 그다지 큰 편도 아니었다. 그래도 처음이니까 마구마구 설레는 것이다. 몰타에 머물고 있는 지금은 그때 탔던 미코노스행 페리보다 서너 배 큰 배가 지나가도 카메라를 꺼내지 않게 되었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역치값이 점점 높아져서 어지간한 자극에는 이제 설레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참 슬펐다. 그래서 눈을 더 크게 뜨고, 마음을 더 크게 열어야 한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내 마음이 달라져서 같은 풍경을 앞에 두고도 설레지 않는 것이다. 늘 처음 같은 마음으로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두 눈 동그랗게 뜨고 바라봐야 한다. 여행을 하는 지금도, 한국으로 돌아가서 남은 삶을 살면서도, 늘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고, 어린아이같이 설레는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먼저 승선하여 앞서가던 승객들이 짐을 들고 갑자기 배 뒤편으로 달려가기 시작해서 영문도 모른 채 일단 같이 달렸다. 뭐가 뭔지 잘 모를 때는 일단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하는 것이 좋다. 이번에도 그랬다. 이코노미석은 지정된 좌석이 없었다. 카페테리아를 중심으로 놓여 있는 테이블 어느 곳이든 자리를 잡고 앉으면 거기가 좌석이었다. 미코노스까지는 6시간이 걸린다. 어느 자리를 잡고 앉느냐가 여행 컨디션을 결정하는 것이다.

나보다 더 부지런한 승객들은 벌써 기다란 소파를 차지하고 두 발을 뻗고 누웠다. 나 역시 첫차를 타고 부지런히 달린 덕분에 출발 예정 시간보다 1시간 정도 일찍 도착했고, 이 부지런함은 그대로 좌석 선택권이 되어 돌아왔다. 여차하면 다리를 뻗고 누울 수도 있는 자리를 잡고 커다란 배낭을 내려놓았다.

배낭이 너무 커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쿵'하는 소리 덕분에 이 배낭이 바로 내 것이라는 것을 모두에게 각인시켜 주어서 도난 걱정도 조금 줄었다. 사실 배당을 둘러메는 것도 어려워서 주인인 나조차도 쉽게 가져가지 못한다. 가방 안에 있는 짐들은 어쩌나 싶겠지만 누가 좀 덜어줬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차마 내 손으로 쌀을 버리지는 못하겠고, 누군가 내 가방을 몰래 열어서 쌀을 훔쳐가 준다면 기부하는 마음이 들어 뿌듯할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구도 나의 'sushi rice(초밥용 쌀)'를 탐내는 여행객은 없었다. 배낭 가득한 빨래도 그대로였다.

나는 '페리'라고 불리는 배를 처음 타는 여행객임을 증명하듯이 카메라를 들고 구석구석 구경을 다녔다. 이코노미석은 왁자지껄 광장시장 같은 풍경이었지만, 같은 층에 있는 지정 좌석이 있는 사람들은 방음이 잘 되는 푹신한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누워 있었다. 비즈니스석도 궁금하여 두리번두리번 헤매고 다녔는데, 그분들이 있는 층은 나 같은 이코노미석 여행자가 카메라를 들고 뛰어다니며 우와우와 포효를 지를 것을 대비하여 출입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다. 안내판에는 꼭대기 층에 수영장도 있는 것 같던데 내가 가진 티켓으로는 올라갈 수 없다며 제지당했다. 뭐 억울하면 비싼 표를 사면 된다. 그리고 나는 억울하지 않았다. 내 표가 더 저렴하니까 경제적 관점에서 내 여행이 더 효율적인 것이다.

배 안에는 쇼핑 시설, 카페테리아, 식당뿐만 아니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샤워실도 있었다. 그리고 유사시를 대비한 구명정의 위치와 비상탈출구를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 왼쪽 손목에는 'REMEMBER 20140416'이 적힌 노란색 팔찌가 있다. 이 배에 있는 구명정 하나에는 150명이 탈 수 있었다. 구명정 외에도 에어 슬라이드나 대형 스펀지 조각 같은 다양한 구명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내가 봤던 세월호 참사 당시 영상에서는 해경 구조선 외에 바다에 떠 있는 구명 장치는 전혀 볼 수 없었다. 그 배에는 이런 것들이 하나도 없었던 것일까. 그 아이들이 탔던 배가 세월호가 아니라 이 배였다면 한사람이라도 더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 번에 150명이 탈 수 있다는 구명정을 보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이리저리 배 안을 헤매고 다니는데 낯익은 단어가 보인다. '2012 OKPO KOREA'. 그랬다. 이 멋진 페리는 대한민국의 기술로 건조된 것이었다. 지구 반대편 그리스에서 푸른 에게해를 오가는 페리가 우리나라에서 만든 것이라니. 우리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갑자기 넘쳐 흘렀다. 그리고 동시에 어떻게도 설명할 수 없는 서러움이 몰려왔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지나가던 승무원이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웃으며 돌아섰다. 세계 최고의 선박 건조 기술을 가진 나라에서, 세계 최악의 인명 사고가 났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사고는 수습되지도 않았고, 정확한 진상 조사도 끝나지 않았다. 키보드나 두드리고 앉아 있는 내가 너무 무력하게 느껴진다. 너무 슬퍼서 슬프다는 단어가 보잘것없어 보인다. 손끝이 저리다.
대한민국의 기술로 만든 페리에는 다양한 구명 장비가 마련되어 있었다. ⓒ 한성은
배는 피레아스 항구를 떠나 에게해 바다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날씨는 맑았고, 바람은 시원했다. 내가 가진 문장으로는 도저히 그 푸른 바다와 새하얀 구름을 표현할 수 없어서 참 안타깝다. 정신없이 찍어 놓은 사진들도 그 바람을 담아내지는 못했다. 오직 내 두 눈만 그 바다와 하늘을 기억하고, 내 살갗만이 그 바람을 알고 있다.

이마저 시간이 흘러 모두 잊힌다면 어쩌나. 그때가 되면 또 다 내려놓고 배낭을 둘러메야겠다. 나는 참 겁이 많다. 행복한 순간이 눈앞에 펼쳐지면 그것을 오롯하게 느끼기도 전에 사라질 것을 두려워한다. 사람도, 여행도, 늘 그랬던 것 같다. 카메라를 내려놓고 이 바람과 이 내음을 오래도록 기억하자고 스스로에게 말을 건넸다.

'꼬르륵'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이른 시간 숙소를 나서느라 아침을 제대로 먹지 못해서 갑자기 허기가 밀려왔다. 물론 배 안에는 번듯한 식당에서 다양한 메뉴를 팔고 있었고, 카페테리아에는 갓 내린 커피와 방금 만든 크루아상이 있었다. 특히 연신 구워내고 있는 크루아상의 고소한 버터 향은 포크로 나의 위를 긁어내고 있었다. 이 순간을 위해 밀폐 용기에 고이 담아 둔 내 비상식량을 꺼냈다. 어젯밤 숙소에서 삶아 놓은 달걀 두 개와 며칠 전 한국 식당에 갔을 때 먹다가 남아서 비닐 봉투에 싸 놓은 오이장아찌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 순간 나에게 필요한 것은 허기를 해소하는 것보다는 저 크루아상의 고소한 버터 향기에 지지 않을 정신력이었다. 물론 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손바닥보다 작은 크루아상 한 개를 무려 3유로나 주고 사 먹을 용기가 없었다. 사실 크루아상 사이에 햄이 한 장 들어 있었지만, 쿨하게 없다고 생각했다. 10개를 먹어도 모자랄 것 같았기 때문에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 나는 삶은 달걀의 껍질을 벗겼다. 잘 참은 대견은 자신을 위해 카페테리아를 향해서 삶은 달걀 인증샷을 남겼다. 오이장아찌 냄새가 썩 좋지는 않았지만, 텅 빈 위장은 그런 것을 개의치 않아 참 다행이었다.
갓 내린 커피 향과 고소한 버터 향을 이겨 낸 삶은 달걀 2개. ⓒ 한성은
미코노스 항구에 도착하면 호텔에서 나온 호객꾼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다. ⓒ 한성은
피끓는 젊은이들의 천국 '파라다이스 비치'

미코노스행 페리는 시로스, 낙소스 같은 다른 에게해 섬들을 거쳐 오후 1시가 되어서야 미코노스 항구에 닿았다. 아테네에서 출발 전에 미코노스 섬에서 가장 저렴하다는 '파라다이스 비치 리조트'의 캠핑장에 1인 13유로짜리 숙소를 예약해 놓은 덕분에 리조트에서 운영하는 버스를 타고 항구에서 숙소로 이동할 수 있었다.

미코노스 섬에는 대중교통이 운영 중이긴 하지만, 한 번 타는데 1.8유로나 한다. 보통 '다운타운'으로 부르는 미코노스 섬의 번화가를 가거나 섬 안에 대한 해변으로 가려면 늘 이 버스를 타야 하는데, 조그만 섬에서 아테네와 같이 '개표 후 2시간 이용 가능' 같은 시스템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교통비가 생각보다 많이 들었다. 다운타운에 숙소를 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미코노스 다운타운에 머무를 정도로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다면 애초에 교통비 따위는 안중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숙소에 체크인할 때와 체크아웃할 때 항구까지 교통편을 제공해 주는 리조트 측에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미코노스 섬은 다운타운을 중심으로 곳곳에 펼쳐진 해변을 따라 관광지가 조성되어 있다. 내가 머무른 곳은 미코노스에서 가장 유명한 해변인 '파라다이스 비치(Paradise Beach)'였다. 이곳 해변에는 파라다이스 클럽 리조트와 트로피카나 클럽이 있다. 리조트라고 하면 비싸고 으리으리한 펜션이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오두막과 캠핑장이 숙소의 대부분이었다. 각각의 해변은 나름의 특색을 가지고 있는데, 파라다이스 비치는 매일 오후 3시부터 새벽 6시까지 펼쳐지는 클럽 파티가 유명한 곳이었다. 그리고 법적으로 누드가 허용된 누드 비치이기도 했다. 그래서(?) 해마다 여름이 되면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이곳 파라다이스 비치로 몰려든다고 한다. 그 덕분에 이곳에는 젊은이들을 위한 아주 저렴한 숙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물론 시설도 딱 그에 걸맞은 정도다. 에게해 한가운데에서 타는 듯한 뙤약볕이 내리쬐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헛간 같은 숙소에는 작은 선풍기 하나가 전부였다. 그저 햇볕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하룻밤 13유로로 공동 화장실과 공동 샤워장을 이용하고, 침대 옆에 있는 불안불안한 콘센트로 전자제품을 충전할 수 있으니 나에게는 차고 넘치는 숙소였다. 다만, 좀처럼 잠을 잘 수 없게 만드는 모기떼는 참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결국 전자 모기향을 사야만 했다. 한밤중에 일어나 모기를 잡으면 그 녀석들이 내 피를 얼마나 빨아댔는지… 문장으로 옮기는 것은 여러 사람을 위해서 자제해야 할 것 같다.

당연하겠지만, 리조트는 숙박을 제외한 모든 것이 비쌌다. 미코노스 섬에도 알파비따 슈퍼마켓 같은 대형 할인점이 있기는 했지만, 관광객들이 머무르는 곳에서는 멀었다. 또한 리조트 내에 공용 주방 시설이 없어서 음식을 직접 요리해서 먹을 수도 없었다. 대신 리조트의 식당은 밤새 영업을 계속했다. 결국 이곳 비치에서는 밤새워 먹고 마시며 춤을 추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잠을 자고, 또 느지막한 오후부터 시작되는 클럽 파티에서 먹고 마시며 춤추기를 반복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로 이곳은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에게 그야말로 파라다이스인 것이다. 물론 내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사흘을 머물기 위해 값싼 잠자리를 찾아 들어온 가난한 배낭여행자일 뿐이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밤을 세워 흥청망청 놀기에는 내가 나이를 너무 많이 먹기도 했다. 그나저나 모든 것을 잊고 일주일쯤 젊은 에너지를 활활 태우고 싶다면 이곳 미코노스 파라다이스 비치는 그들에게 최고의 장소의 장소가 될 것 같았다.

한국에서 챙겨온 물건 중에 가장 효자 노릇을 하는 여행용 전기 쿠커는 이곳에서도 자기 역할을 다했다. 15분이면 고슬고슬한 쌀밥을 만들어 내었고, 라면 스프가 들어간 누룽지를 끓여 주었다. 밤하늘에 촘촘하게 떠 있는 별들과, 쉴새 없이 쿵쿵거리는 클럽 음악과, 사방에서 달려드는 모기떼와 지친 속을 달래주는 라면 국물 한 컵이 어우러진 미코노스의 첫날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지상 최고의 낙원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미코노스 파라다이스 비치. ⓒ 한성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블로그 '타박타박 아홉걸음' http://ninesteps.tistory.com에도 동시에 게재되었습니다.

태그:#타박타박 아홉걸음 세계일주, #에게해 , #타박타박, #아홉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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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란 저에게 아이들이 "선생님"이라고 불러줍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은 성실한 여행자가 되어야겠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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