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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불편함을 많이 느꼈던 함베르크 외곽의 캠핑장이다. 이곳에서 현이는 옆돌기를 배웠다.
 간만에 불편함을 많이 느꼈던 함베르크 외곽의 캠핑장이다. 이곳에서 현이는 옆돌기를 배웠다.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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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와 독일 캠퍼들이 많았던 기간이다. 저 수풀 너머에 엘베강이 있다.
 네덜란드와 독일 캠퍼들이 많았던 기간이다. 저 수풀 너머에 엘베강이 있다.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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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는 엘베강 하구에 있는 도시로 우리가 만난 독일인이 추천한 관광지 1순위였다. 외곽에 있는 캠핑장을 떠나 시내 구경을 가는 날 우린 입이 쩍 벌어지는 고급 저택을 여러 채 보았다. 정문에서 현관 앞까지 최소 50m~100m는 됨직한 정원을 가진, 고풍스런 느낌의 집이었다. 앞으론 엘베강이 흐르고 뒤론 가로수 길이 쫘악 펼쳐지는 게 무슨 영화에서나 본 듯하다.

단지 조금 걷고 싶을 뿐이었지만 주차는 쉽지 않았고 인근을 약 30분 정도 뱅뱅 돈 후에 7층짜리 공용주차장에 간신히 주차할 수 있었다. 세탁을 못해 선택의 여지는 없으나 그럼에도 우리가 걸칠 수 있는 옷 중 그나마 가장 따뜻한 옷을 골라 입고 거릴 나섰다. 회색빛 하늘, 날씨는 제법 쌀쌀했다.

우리가 가고 싶은 곳은 복합물류창고인 슈파이허스타트였다. 물속에 수 천 개의 참나무기둥을 박아 만들었다고 하는데 유럽 중세 느낌의 웅장한 벽돌 건물이 물 위에 있으니 참 이채롭다. 이곳은 중세시대부터 일찍이 한자동맹에 가입하여 동, 서양 교류가 활발했다고 한다. 지금은 낡은 물류창고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해양박물관, 콘서트홀로 리모델링해 재활용함으로써 국제적으로 항만 재개발의 성공 모델로 손꼽힌다고 한다. 실재로 거릴 걷다보니 몇 몇 건물은 상가나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 뒷덜미를 당기는 국수의 정체

딱 한 블럭 뒤로 갔을 뿐인데 정말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인 건축물이 즐비했다. 길은 한산했다. 마치 내 눈 앞에 보이는 건물과 도로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꾸민 조감도 같았다. 수로의 기하학적인 모양도, 정박해 놓은 배들도 모두 가짜 같다. 그런데 점심 시간이 되어 많은 사람이 쏟아져 나와서 걸어 다니는데 이상하게도 그들마저 가짜 같았다. 왜 그랬을까?

'차이나쉬핑'이란 중국 해운업 회사의 건물은 높았고 빨간 바탕에 한자로 씌여진 깃발은 힘차게 펄럭였다. 중국인으로 오해받기 적합한 환경에서 우린 현지 직장인들이 줄을 서서 먹는다는 식당을 찾았다. 겉에서 보면 분명 음식점인데 안에 들어가 메뉴판을 보니 옷도 팔았다. 연결고리가 약한 것들의 조합이 어느덧 익숙해진 걸 느낀다.

식당은 음료, 샌드위치, 간단한 조리 음식 등으로 나뉘어져 다양한 메뉴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은 초코가 양 끝에 묻은 크루아상을 택했고 나와 남편은 치킨이 바게트에 들어가 길게 누워있는 샌드위치와 샐러드를 택했다. 음식 값을 보면 음료는 약 2000원 선에서부터 시작하였고 비싼 요리는  6000원 정도로 비교적 저렴하고 맛있었다. 메뉴판에서 '누들'을 발견했을 때 이미 우리 식탁엔 다른 사람들의 식사량보다 120% 많은 음식이 올려 있었다. 그럼에도 국수를 먹어 보겠다 결단하고 일어섰을 땐 이미 대기 줄이 문 밖으로 길게 만들어졌다. 포기다.

아쉽지만 누들을 뒤로 하고 대충 끼니를 때운 후 공터에 나왔다. 참 반가운 햇살이 비쳤고 제법 따사로웠다. 식사 후 남은 시간을 이용해 직장인들은 눈을 감고 최대한 몸을 돌 위에 붙인 채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계단에 아무렇게나 앉아 포장 음식을 먹는 사람도 있었다. 남편은 일어서더니 엉덩일 털며 말했다.

"나 아무래도 안 되겠어. 그 누들 먹고 싶어."

남편은 달려갔고 얼마만큼의 줄이 길었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포장 음식을 들고 돌아왔다. 중국스타일의 볶음 국수다. '상하이쉬핑' 회사를 겨냥한 메뉴인가 보다. 남편은 그 맛에 찬사를 보냈고 나는 중국 국수를 선호하지 않는 편이라 야채만 골라 먹었다. 괜찮았다. 

건물이나 보도가 너무 깨끗해서 비현실적인 느낌이 드는 구역이다.
 건물이나 보도가 너무 깨끗해서 비현실적인 느낌이 드는 구역이다.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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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포아저씨가 말하는 독일 사회

하늘은 다시 흐려졌다. 마치 클릭 한 번으로 조감도의 배경화면을 회색으로 바꾼 느낌이다.  그때 작은 체구에 편안한 차림의 동양인 아저씨가 걸어왔다. 아이들이 쓰는 한국말을 들은 아저씨가 먼저 "한국인이세요?" 한다.

아저씨는 40년 전에 자동차 관련 일로 독일에 온 교포였다. 매체를 통해 막연히 알던 독일의 변화와 어려움에 대해 구체적으로 듣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휴가비,  여름 휴가비, 대학생 이상 자녀 수당 등이 없어졌다고 했다. 긴축재정 정책으로 남는 돈은 에버하드가 말한 바와 같이 동독일 재건 비용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했다. 예전엔 이민이 어려웠지만 요즘 출산율이 떨어지면서 한국 돈으로 3000만 원만 있어도 이민을 쉽게 받아준단다.

이민이 쉬워지고 난 후 한국인들도 교육을 이유로 오고 있는데 대부분 국제학교를 선호한다고 했다. 수업료가 한 달에 120만 원 가량이라는데 사실 그 돈은 한국 중산층 가정에서 지출하는 한 달 사교육비랑 비슷한 걸 생각하면 그렇게 비싸진 않다.

대학교까지 모든 수업료가 없는 점은 좋지만 언어적인 측면에서 독일어는 독일을 벗어난 유럽에서는 통용되지 않아 그 실용성이 떨어진다고 했다. 아저씨 말씀으론 독일 외 유럽 다른 국가에서 독일어를 쓰면 눈살을 찌푸리며 쳐다보기까지 한단다. 우리도 이미 눈치 챘던 부분이어서 놀랍진 않았다. 스페인어는 남미 쪽에서 활용되고, 프랑스어는 아프리카대륙에서 활용되는 것을 생각하면 독일어의 활용도는 분명 낮다. 배울 땐 그렇게 어렵다는데.

1남 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둘 다 30대이나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걱정하였다. 딸은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LG에 다니는데 사실 교포 2세들은 한국인 기업을 선호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좀 의외였다. 독어, 한국어 모두 능통한 한국인을 고용함에 있어 입사의 특전도 없고 근무하는 데도 그리 좋은 환경은 아니라는 것 같았다. 장난으로 "한국 남해에 있는 독일인 마을에 오셔야죠?" 했더니 사모님께서 "애들이 여기 있는데 어딜 가. 한국은 잠시 다녀오는 거지." 하신다.

아저씨가 독일에서 보낸 시간은 어느덧 40년이다. 동, 서독의 화해의 기류에서 통일되기까지, 또 통일 후 하나의 국가를 이루기 위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노력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것이다. 그런 아저씨께서 말씀하셨다. 

"사실 독일 사람들 통일하고 나서 참 힘들어요. 지원도 많이 끊기고. 그런데도 이 사람들은 지금 조금 힘들어도 미래에 모두 행복할 수 있으면 좋다고 해요. 참습니다. 또 국가가 얼마나 큰 잘못을 하지 않는 이상 모두 믿고 수용해줍니다. 그게 참 대단합니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잖아요. 의원들도 국민이 먹고 사는 민생 문제를 해결하는 문제로 싸우지 않습니다. 정치가들이 한 마음으로 정치를 잘 합니다. 그런데 난 한국의 통일에 대해선 좀 염려가 됩니다. 통일 후 생겨나는, 여러 면에서의 어려움을 과연 잘 견뎌낼 수 있을까 그게 의문입니다."

딸과 여행을 오신 독일 거주 교포아저씨와 대화를 나눴다.
 딸과 여행을 오신 독일 거주 교포아저씨와 대화를 나눴다.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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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대화는 다시 흐려진 하늘처럼 좀 음울해졌다. 무겁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독일보다 상대적으로 경제가 넉넉하지 않고 역사의식, 인내심 등의 부분이 미흡한 상황에서 과연 우리가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며 그들처럼 오늘의 어려움과 불편함을 참을 수 있을까 ?

난, 우리는 잘 견뎌낼 수 있을까?


태그:#리씨네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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