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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 씨(왼쪽)와 그를 돕기 위해 시험장에 나온 양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손수연 씨
 산티 씨(왼쪽)와 그를 돕기 위해 시험장에 나온 양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손수연 씨
ⓒ 송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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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네팔에서 한국에 시집 온 산티주마리파리야(32, 아래 산티)씨는 지난 7월 17일 한국어능력시험에 처음 응시했다. 시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생활 한국어는 능숙해졌지만 시험을 치는 것은 왠지 자신이 없었다.

"처음 한국에 올 때 '물'이라는 단어 하나만 배워 갖고 왔어요. 임신 중일 때를 빼고 꾸준히 한국어를 공부했지만 늘 자신이 없었죠. 최근 양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4단계 한국어 교실에서 70점을 맞고 이제 시험을 쳐도 되겠다 싶었어요. 20명 중에 4등인데 너무 기뻤어요."

많은 결혼이주여성들이 산티씨처럼 4단계 이상의 실력을 갖춘 뒤 시험을 친다. 육아와 취업 등으로 1~3단계는 건너뛰고 시험을 치는 경우가 많고 특히 취업이나 국적 취득 등의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시험에 응시하는 편이다.

산티 씨는 통번역사가 되는 것이 꿈이다. 이번 시험에서 4급을 딴 뒤 최종적으로 6급을 따는 것이 목표다.

"한국어와 네팔어 모두 능숙해야 통번역사로 일할 수 있을 텐데 앞으로 3~4년은 열심히 준비해야 돼요. 그동안 한국어능력시험 6급도 따고 관련 공부도 열심히 할 거예요. 대학은 가고 싶지만... 학비가 너무 비싸요. 아이가 커서 대학교에 가겠다고 하면 꼭 보낼 거예요."

산티 씨는 대학 얘기에 잠깐 눈을 반짝였지만 이내 마음을 접는 눈치다. 아이를 키우고 양육하는 것이 더 중요하단다.

인정받는 고소득 통번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대학을 다니는 것이 중요하다는 기자의 말에도 산티 씨는 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자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여느 한국 어머니들의 심성이 느껴졌다.

오전 11시 30분, 제47회 한국어능력시험을 치르는 의정부 신한대학교 교정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행복시험, 한국어능력시험?

시험 일정을 살펴보는 외국인주민
 시험 일정을 살펴보는 외국인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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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졸업한 산티씨는 네팔에서는 상당한 수준의 공부를 한 셈이다. 아직까지 네팔에는 여자가 공부를 많이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남아 있다.

"네팔에서는 여자에게 고등교육을 시키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올해 네팔에 여자 대통령이 취임했는데 이것을 싫어하는 남자들도 많고요."

산티씨의 재능은 올해 양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주선으로 우리은행 광적지점에서 네팔 통번역 담당자로 일하게 되면서 작은 꽃을 피우게 됐다.

외국인 근로자를 위해 일요일에 문을 여는 우리은행 광적지점이 네팔 근로자들을 위해 통번역 담당자를 찾다가 산티씨가 추천을 받은 것이다.

"광적지점에서 일하는 것이 즐거워요. 많은 네팔 근로자들을 만나고 도울 수 있어요."

하지만 네팔 근로자들을 돕는 일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 많은 네팔 근로자들이 한국 생활에 적응하며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네팔에서는 직장을 다니면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만 일해요. 나머지 시간에는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죠. 그런데 한국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추가 근무가 엄청나게 많잖아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남편이 아침 7시에 출근해서 밤 9시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하루 6시간씩 일 하던 네팔인들이 한국에서 8시간을 기본으로 때로 12시간씩 근무하는 환경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거기다 낯선 환경에서 외로움과 싸워야 한다.

"일도 힘들고 고향도 그리운데 부모님은 돈만 보내라고 하면 좌절하는 네팔 근로자들이 있어요. 너무 안타까워요."

네팔과 한국, 어디가 더 행복할까?

산티(오른쪽) 씨와 손수연 씨
 산티(오른쪽) 씨와 손수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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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년간 시댁 식구들과 함께 산 산티 씨는 한 달 전에 분가를 했다. 여느 한국 며느리들은 쾌재를 불렀겠지만 산티 씨는 3주간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시어머니가 너무 잘 해주세요. 우리 엄마 같아요. 집에서 특별히 집안일을 하지 않아도 시어머니가 다 해줬어요. 3주간 매일 시어머니한테 '엄마, 이제 분가하면 어떻게 살아?'하고 하소연 했어요."

한 달이 지나니 이제 좀 적응이 된다는 산티 씨는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한국어능력시험을 앞두고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신한대 운동장에는 점점 더 많은 외국인들이 몰려들었다. 한국어능력시험에 응시하는 외국인들이 이렇게 많았나 싶었다.

"한국은 아주 살기 좋은 곳이에요. 무엇이든지 다 살 수 있어요. 하지만 돈이 많아야 해요. 그래서 그런지 한국 사람들은 돈 버는 일만 생각해요. 네팔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정말 하루 6시간만 일하며 살 수 있다면 많은 한국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 곳으로 떠나려 할지 모른다.

행복해지기 위해 돈을 벌지만 정작 행복해질 수 없는 곳이 대한민국은 아닐까. 그런 의문에 휩싸여 있는데 산티 씨가 한마디 거든다.

"그래도 바쁜 한국이 더 살기 좋아요. 오후 4시에 퇴근한 네팔인들은 할 일이 없어서 다양한 문제와 어려움에 직면하거든요."

산티 씨에게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물었다.

"열심히 일 하고 아이 잘 키우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그래서 나중에 남편과 여행 다니고 싶어요. 그러려면 오늘 4급을 꼭 따야 해요."

마지막 말을 마친 산티 씨가 다른 외국인들과 섞여 시험장으로 총총 걸음을 옮겼다.


태그:#양주, #다문화, #한국어능력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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