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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8시라고 했다. 좀 늦은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이유가 있었다. 농사일을 마치고 군청 광장으로 나온다. 데모하러… . 정말이지 생에 이런 일이 있을지 몰랐다. 농사 지어 어렵게 대학 간 아이들이 데모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세상 물정 모른다고 타박하던 어른들이 데모를 하게 될 줄이야… .

정권 쥔 자들과 보수 언론 그리고 종편들은 외부인 운운하며 사드의 성주 배치를 지역 문제로 가두려 하지만, 이것이 어디 성주만의 문제인가. 지역적으로 보면 성주 문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경제적으론 한중의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안보적으로는 한미일 대 북중러의 문제일 수도 있다. 간단하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성주에 나부끼는 사드 반대 현수막

사드배치 지역이 경북 성주군으로 확정을 앞두고 13일 오전 경북 성주 읍내에 사드반대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사드배치 지역이 경북 성주군으로 확정을 앞두고 13일 오전 경북 성주 읍내에 사드반대 현수막이 걸려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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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성주군에 진입하니 크지 않은 마을인데도 사드 배치 반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읍내에는 아주 촘촘했다. 군 전체가 현수막으로 나부꼈다. 그 내용을 종합해 보면 성주뿐 아니라 한반도에 사드가 배치되는 것을 결사반대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지역 이기주의의 현수막은 만나지 못했다.

​집회 시작 한 시간 전인데도 젊은이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움직임이 많지 않은 농촌의 여름 밤을 생동감 있게 만든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박근혜 대통령? 사드의 성주 배치는 어떻게 보면 역기능만 있는 게 아니다. 순기능도 있다. 박근혜 정권의 실체와 지역주의의 폐해를 알게 되었고 정의를 좇는 삶이 어떤 것인지도 짐작하게 되었으니까.

비 내리는 광장에 걱정이 앞섰다. 집회를 주관하는 투쟁위는 아마 더 했으리라. 무엇보다도 우중 집회는 참석률이 저조할 것이 뻔하다. 안 한 것만 못할 때도 있다. 그래도 투쟁위에서는 준비에 만전을 기하려고 애 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비옷, 쿨 목도리, 머리띠, 생수, 떡(간식), 촛불 등.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밤 8시, 예정된 집회 시간에 맞춰 막이 올랐다. 이재동 성주군농민회 회장이 사회를 맡았다. 그의 말은 걸쭉하되 속되지 않았고 구수하되 논리를 갖고 있었다. 사드뿐 아니라 택리지(擇里志)에 설명되어 있는 성주의 역사까지 언급하는 걸로 봐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았다. 비를 맞으면서도 흐트러짐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집회를 준비하는 투쟁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현장에서 한 컷 사진을 찍었다.
▲ 현장에서의 필자 집회를 준비하는 투쟁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현장에서 한 컷 사진을 찍었다.
ⓒ 이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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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면서 투쟁, 그래야 오래 간다

투쟁위 홍보부장겸 대변인 배은화님의 투쟁보고와 앞으로의 일정 소개가 있었고, 21일 동안의 경과를 영상으로 담은 활동의 모습을 15분가량 같이 보았다. 무얼 위해 저렇게 황톳길 위에서 싸워야 하는가! 노란 동영상 차량엔 정의당 마크가 붙어 있었다. 정의당 경남도당에서 빌려 온 것이라 했다. 홍준표 지사 탄핵운동 등으로 그쪽도 쓸 일이 많은데, 사드 문제가 더 중요 사안이어서 빌려 올 수 있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왔다는 민중가수 지민주님의 흥겨운 노래와 율동은 시름을 잊게 만들었다. 사드 배치는 성주뿐 아니라 한민족의 생존권이 달린 중차대한 문제지만 투쟁은 어디까지나 즐기면서 해야 긴 시일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말에 모두들 머리를 끄덕였다. 성주 주민 몇 사람과 성남에 사는 출향인 등이 자유 발언을 했다.

집회 시작 전 몇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80대 할머니에게 이런 일은 젊은이들에게 맡기고 집에서 쉬시지 뭣하러 나오셨냐고 하니까 몹시 서운한 기색을 보였다. 무슨 무기를 우리 성주에 설치하면 농사짓기 힘들어진다고 하는데 늙은이라고 가만히 집에 있겠느냐면서 칠순 맞은 딸하고 같이 나왔다고 했다. 할머니의 구릿빛 얼굴에서 고된 삶을 읽을 수 있었다.

8월 2일 비가 내리는 밤인데도 2천 여 명의 주민이 촛불을 들고 모여 사드 반대를 외쳤다.
▲ 촛불을 든 참석자들 8월 2일 비가 내리는 밤인데도 2천 여 명의 주민이 촛불을 들고 모여 사드 반대를 외쳤다.
ⓒ 이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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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군종합사회복지관 관계자와도 대화했다. 이 복지관에선 쿨 목도리 1천2백 개를 준비해 와 집회 참석자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지금 박근혜 정권과 싸우고 있지만, 계속되는 폭염이 또 다른 하나의 적이라며 집회하는 동안이나마 더위를 잊으시라고 쿨 목도리를 준비했는데, 못 받은 분이 많은 것 같다며 도리어 미안해했다.

외국기자도 놀란 집회 현장의 열기

홍콩 <데일리프레스>의 젊은 여성 기자도 바삐 움직였다.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느냐고 물으니 대구 치맥축제 취재 왔다가 사드 반대 성주 촛불집회 소문 듣고 급히 왔다고 했다. 군청과 투쟁위 관계자들의 얘기를 듣고 귀한 뉴스거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면서 성주 군민들에게 마음으로 지지를 보낸다며 엄지손가락을 지어 보였다.

비 내리는 길을 헤치고 성주를 오면서 초라한 집회 현장을 상상하는 마음이 무거웠었다. 비는 야외 행사와 상극이다. 여느 집회들은 이런 비 오는 날이면 소수의 사람들이 비를 맞으며 체면치레를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비를 피해 건물 사이사이에서 구경꾼이 되기 쉬운데…. 그런 장면을 몇 번 목도했다. 하지만 기우였다. 완전히 빗나갔다.

'한반도 사드배치 철회를 위한 21번째 촛불문화제' 21일이 긴 시간임에도 성주 군민들에게는 이제 막 시작이라며 장기전을 대비할 것이라고 했다.
▲ 성주 21일째 촛불 문화제 개최 '한반도 사드배치 철회를 위한 21번째 촛불문화제' 21일이 긴 시간임에도 성주 군민들에게는 이제 막 시작이라며 장기전을 대비할 것이라고 했다.
ⓒ 이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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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의 분위기는 그게 아니었으니까. 30여 분 전부터 주민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집회 시작 즈음엔 2천여 명의 사람들이 군청 광장을 가득 메웠다. 우산이 아닌 하얀 비옷을 입고서 말이다. 장관이었다. 하루 농사 일로 기력이 쇠해 있어야 할 사람들이 거대한 힘을 창조해내고 있다. 작은 힘이 뭉칠 때 큰 힘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투쟁에 이렇게 힘이 모아진다면, 박근혜 정권도 아니 미국도, 사드 배치 결정을 번복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동유럽의 헝가리와 폴란드 등의 나라에서는 국가 간 합의는 있었지만 지역 주민들과 국민들이 반대해 무기 배치가 철회된 예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사람은 평화롭게 살아가도록 지음 받았다. 평화는 생명이고 전쟁은 죽음이다. 평화를 위해서 전쟁이 필요하다는 말은 권력 쥔 자들이 만들어 낸 말이다. 무기는 전쟁을 위한 도구이다.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 우리 국민의 생명이 달린 문제이다. 물론 북한의 공격에 의한 위난(危難)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사대 강국 미사일이 한반도에 조준됨으로써 오는 위기가 훨씬 더 크다. 성주 군민들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현장에 설치되어 있는 새누리당 탈당신청서 접수처와 815명 단체 삭발식 신청 접수처
▲ 새누리 탈당 신청, 815명 삭발식 신청 접수처 현장에 설치되어 있는 새누리당 탈당신청서 접수처와 815명 단체 삭발식 신청 접수처
ⓒ 이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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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날엔 815명 삭발 예정

투쟁 의지는 좋고 항의의 방법으로 호소력도 강하긴 한데 815명은 좀 과하다 싶었다. 8월 15일, 민족 해방의 날 815명의 군민들이 삭발식을 거행한다는 것이다. 광복의 날, 기쁨을 뒤로 한 채 삭발로 항의의 뜻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삭발은 내 신체의 한 부분을 떼어낸다는 의미가 있다. 그만큼 절박하고 긴요함이 담겨 있다. 성주 군민들이 마음을 모아 삭발하고 바라던 목적이 관철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집회는 밤 9시 30분에 끝났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투쟁위에서 대외 협력을 담당하는 분을 만나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지금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 뭔가? 그는 수줍은 듯 입을 가리면서 솔직히 자금이라고 했다. 그들은 이 투쟁이 단기간에 끝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을 배경으로 한 정권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투쟁 21일째, 싸움의 초입 단계여서 지금은 군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내는 성금으로 투쟁을 이끌고 있지만 언제까지 지역 주민들의 호주머니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싸움이 성주군민만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의 명운이 달려 있는 만큼 국민들의 관심과 성원을 바라고 있다고 했다.

사드배치철회성주투쟁위는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국민의 애정어린 성금이라고 솔직히 말했다. 우리를 대신해서 싸우고 있는 이들에게 관심과 격려가 필요한 때이다. 그것이 물질로 치환되어 전해질 때 투쟁의 열정이 이어지고 한반도 사드 배치 계획도 철회될 수 있을 것이다
▲ 기금 모금 계좌 사드배치철회성주투쟁위는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국민의 애정어린 성금이라고 솔직히 말했다. 우리를 대신해서 싸우고 있는 이들에게 관심과 격려가 필요한 때이다. 그것이 물질로 치환되어 전해질 때 투쟁의 열정이 이어지고 한반도 사드 배치 계획도 철회될 수 있을 것이다
ⓒ 이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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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문제는 진영논리로 바라볼 게 아니다. 여야가 없다. 보수와 진보도 없다. 삶의 문제이고 생명의 문제이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의 나라로 나아가는 일이다. 항간에 사드의 성주 배치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니 보상이라도 충분히 받아내자는 물질 보상론의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들린다. 아니 될 말이다. 사드가 한반도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우중에 열린 성주 집회에서 확인한 목소리였다. 그들에게 강력한 지지의 마음을 전한다.


태그:#사드배치, #성주투쟁위, #우중집회, #후원성금, #815삭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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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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