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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 장군의 묘소와 이웃했던 조선중기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沈之源)의 묘는 두 집안간의 392년간의 묘지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청송 심씨 집안의 심지원은 그의 아들 심익현이 효종의 딸 숙명공주와 결혼해 효종과는 사돈관계였다. 1620년(광해군 12)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함경도안찰어사, 부수찬, 대사헌, 형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냈다. 저서에 '만사고(晩沙稿)'가 있다.

지난 2007년 12월 경기도 문화관광과는 윤관장군의 후손인 파평 윤씨와 심지원의 후손인 청송 심씨 문중이 400년 가까운 기간 동안 마찰을 빚어온 묘지 이장 문제를 지난 2005년 합의함에 따라 심씨 집안 묘지 이전안을 가결시켰다고 밝혔다.

윤관장군 묘 웅장한 왕실의 무덤 같다
▲ 윤관장군 묘 웅장한 왕실의 무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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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와 중앙문화재위원회에 따르면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대종회는 지난 2005년 파주시 광탄면 윤관 장군묘(국가 사적 323호) 위쪽에 조성되어 있는 심지원 묘(경기도 기념물 제137호)등 청송 심씨 종중묘 19기, 신도비 등을 파평 윤씨 문중에서 제공하는 8천여㎡의 토지로 이장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힘에 따라 그동안 이장문제에 대한 심의를 벌여왔다.

고려시대 이후 한국의 대표적 명문가로 상징되는 두 문중의 산송(山訟, 산소, 곧 묘지에 관한 송사(訟事)를 통틀어 일컫는 말)은 16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7세기 효종 임금 당시 영의정을 지낸 청송 심씨 문중의 심지원은 그해 부친의 묘를 파평 윤씨 윤관장군의 묘역 바로 위에 조성했다.

1658년 영의정에 오른 심지원은 국가로부터 이 일대 땅을 하사받아 청송 심씨 문중 묘역을 조성하기 시작했고, 1662년 이 곳에 심지원의 묘까지 조성했다. 당시 심지원은 윤관 장군묘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부친을 안장하고 청송 심씨 문중묘역을 조성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심지원의 묘가 조성된 지 꼭 100년 후인 1763년(영조 39년) 파평 윤씨 문중이 실전된 윤관 장군의 묘를 찾는다며 심지원 묘소를 계단 위 망주석 아래까지 파헤치자 이에 격분한 심씨 문중은 "파평 윤씨 문중이 윤관 장군 묘를 찾겠다면서 심지원의 묘를 훼손했다"며 윤씨 가문의 처벌을 당시 고양군수에게 요구, 두 집안의 묘지 다툼이 본격적으로 시작돼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간의 산송문제는 당대 두 명문대가의 분쟁으로 확대됐다.

윤관 장군 묘와 심지원의 묘는 불과 3미터 남짓 떨어져 있고, 윤관 장군 묘역에 2미터 높이의 돌담이 설치돼 심지원 묘의 앞을 가리는 등 두 문중은 2005년까지 돌담 설치, 조망권, 산소 훼손 등의 문제로 분쟁을 벌여 왔었다. 한편 심지원 묘와 종중묘 19기는 현 위치에서 120여㎥ 떨어진 지역으로 2008년 4~6월 발굴기관의 조사를 거쳐 이장되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의 심지혜 연구원 청송 심씨 이장터에서 기념 촬영, 청송 심씨 집안이라 조금 화가 나는 듯
▲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의 심지혜 연구원 청송 심씨 이장터에서 기념 촬영, 청송 심씨 집안이라 조금 화가 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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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율곡 이이 선생이 자주 방문했다는 파평면 율곡리 임진강변 임진나루 앞에 위치한 '화석정(花石亭)'으로 갔다. 임진강가 벼랑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정자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겹처마의 초익공 형태로 조선시대 양식을 따른 건물이다.

원래 고려 말 대유학자인 길재의 유지(遺址)였던 자리라고 전한다. 그후 1443년(세종 25) 율곡의 5대 조부인 이명신이 세운 것을 1478년(성종 9) 율곡의 증조부 이의석이 보수하고, 몽암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숙함의 정자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 때 재상 이덕유의 별장인 평천장의 기문 중에 보이는 '花石'을 따서 정자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 후 율곡이 다시 중수하여 여가가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 그의 학문에 반한 중국의 황홍헌이 이곳을 찾아와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임진강  화석정 앞에서
▲ 임진강 화석정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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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왜구의 침공에 대비해 10만양병설을 주장한 이이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은 선조가 임진왜란 때 의주로 몽진 가던 중 한밤중에 임진강을 건널 때 이 정자에 기름을 발라 태워 불을 밝혔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그 후 80여 년간 빈터만 남아 있다가 1673년(현종 14)에 이이의 증손인 이후지, 이후방이 복원하였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다.

화석정 현판을 박정희가 쓰다
▲ 화석정 현판을 박정희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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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정자는 1966년 파주시 유림들이 다시 복원하고 1973년 정부가 실시한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단청되고 주위도 정화되었다. 건물의 정면에는 박정희가 쓴 '花石亭' 현판이 걸려 있으며 내부에는 이이가 8세 때 이곳에서 지었다는 '팔세부시(八歲賦詩)'가 걸려 있다. 여기도 늘 바쁜 박정희가 다녀가면서 현판을 썼다. 정말 대단하다. 이름을 남기기 좋아하는 독재자여!

화석정의 경치는 임진강을 바라다 보이기에 너무 좋은 곳이었다. 관리가 잘 되어 깔끔하고 좋았다. 한여름 바람을 맞으면서 잠시 쉬어가면 편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요즘에는 아래에 도로가 개설되어 시끄럽다는 단점이 있어, 오랫동안 쉬어가기에는 조금 힘들어 보였다. 이곳에서 일행은 잠시 쉬면서 목을 축이고는 다시 길을 나선다.

황희 선생 영당지 황희
▲ 황희 선생 영당지 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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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문산읍 사목리에 있는 조선시대 명재상 '황희선생 영당지(黃喜先生 影堂址)'로 갔다. 조선 시대 명재상이며 대표적인 청백리인 방촌 황희(1363~1452)의 유업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호를 따라 방촌영당이라고도 한다.

황희 선생 영당지 황희
▲ 황희 선생 영당지 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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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2년(문종 2) 황희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하고 1455년(세조 1)에 유림들이 그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현재의 위치에 반구정, 앙지대, 경모재와 함께 이 영당을 짓고 영정을 모셨다. 영당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불에 타버렸고, 1962년 후손들이 복원하였다.

황희 선생 영당지 황희 선생 영정
▲ 황희 선생 영당지 황희 선생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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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개방되어 있으며 측면은 방화벽으로 되어 있는 초익공 양식의 맞배지붕집이다. 내부에는 중앙에 감실을 두고 그 안에다 영정을 모셨다. 마루는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소란반자로 되어 있다. 건물 주위에는 담이 반듯하게 둘러쳐져 있고, 정면 입구에는 솟을삼문이 있다. 장수황씨 대종중에서 소장하고 있다.

황희 선생 영당지 황희 선생
▲ 황희 선생 영당지 황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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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황희가 정말 청백리였는지, 명재상이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고려의 유신(遺臣)으로 조선 초기에 활동하면서 조선왕조의 필요에 따라 충신으로 만들어진 이미지가 많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일일이 따지고 싶지는 않다. 분명한 것은 나름 훌륭했던 것은 사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황희 선생 영당지 반구정에 바라 본 임진강
▲ 황희 선생 영당지 반구정에 바라 본 임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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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사진을 한참 보고 있다가 인사를 드리고는 반구정에 올라 시원한 임진강 강바람을 맞고는 일정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왔다. 정말 파주에 볼 것이 많다는 것에 놀랐고, 재미도 있었다. 이제 친구들과 시원한 막걸리를 한 잔하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의주길 의주길 안내 리본
▲ 의주길 의주길 안내 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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榴林 김수종입니다. 사람 이야기를 주로 쓰고 있으며, 간혹 독후감(서평), 여행기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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