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국에서 개 돼지로 산다는 건 하대받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2011년 당시 경남 김해시 주촌면 원지리에 만든 구제역 매몰지.
 2011년 당시 경남 김해시 주촌면 원지리에 만든 구제역 매몰지.
ⓒ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2010년 구제역 예방 살처분을 위해 돼지들이 산 채로 땅에 묻혔다. 지나치다는 비판 이후 백신 접종 등 대안이 이뤄졌지만 여전히 상품성이 떨어진다고 백신을 기피하거나 사육환경을 개선하는 등의 근본 변화에 인색한 게 사실이다.

이상하게 후진국형 전염병이라는 구제역이 매년 반복되면서도 농가 당사자나 견제기구 없이 중앙정부의 단독 처리 하에 돼지들은, 죽는다.

전기충격기로 지지고 산 채로 가죽을 벗기는 등 비인도적인 방법으로 개를 도축해도 이 나라에선 처벌하기 쉽지 않다. 개를 쉽게 유기하고 쉽게 안락사하는 반면 순종을 팔기 위해 강아지 공장이 운영되는 모순을 볼 수 있다.

개를 학대해 사진으로 자랑하거나 개가 목줄을 한 채 달리는 차에 끌려다니기도 한다. 좁아터진 집에 혼자 방치된 채 주인만 기다리는 개들은 오늘도 이 나라에서, 이동권조차 보장받지 못한다.

민중이 개, 돼지라는 말이 한국에서 더 섬뜩한 이유가 여기 있다. 한국 개, 돼지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공직자가 신념이라며 뱉은 소망은 가히 경악스럽다. 이 사회가 동물을 대하는 방식 그대로 국민을 대하면 그만이라는 것 아닌가. 먹여주고, 재워주고, 학대하고 맘껏 버리거나 죽이고.

그 나라의 인권 수준은 그 나라의 동물권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 나라는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 사적재산권을 드높여야 하는 곳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한국 사회에서 '민중은 개, 돼지'라는 문구는 우리가 초등학교에서 본 바 '한국은 천연자원이 없는 반면 인적 자원이 풍부하다'와 비슷한 셈이다. 당신의 쓸모를 취하고 쓸모 없어지면 손쉽게 배제하겠다는 말이다.

심지어 자원도 엄청 낭비하는 나라인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문득 저 발상이 얼마나 서늘한가 이해해버리고 만다.

그라운드 제로에서 한국의 슬픔을 생각하다

911 메모리얼 파크 추모비
 911 메모리얼 파크 추모비
ⓒ ⓒ 오마이뉴스 유창재

관련사진보기


얼마 전 뉴욕의 911메모리얼에 가서도 다시금 한국의 개, 돼지로서 만감이 교차했다. 한 사회가 누군가를 추모하고 기억하는 방식이 이렇게 세세하고 세련될 수 있다는 걸 눈으로 직접 배우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박물관 마지막에 적힌 '희망'이라는 문구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쌍둥이빌딩이 사라진 자리에 뭘 새로 지어올리지 않았다. 대신 그 구덩이 움푹 패인 채, 폭포가 아래로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마치 숨진 사람들의 눈물이 흘러 모이듯. 눈물들이 고인 북쪽과 남쪽 구역은 희생자들 이름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근사함을 넘어 오랜 고민과 배려, 아름다움까지 보여주는 아이디어였다.

박물관 내에는 온갖 물건들이 간직돼 있었다. 구조현장에서 숨진 소방관의 개인소품부터 철근과 119차량까지 보존했다. 박물관 중앙의 한 공간에선 숨진 사람들의 생년월일부터 사진들이 차례로 스크린에 떠올랐다.

그 사이로 희생자를 기억하는 가족이나 친구의 음성녹음 등까지 들려왔다. 여러 예술가들의 추모작품과 추모공간 건설과정을 담은 다큐까지 보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걸 위해 여러 기관과 온갖 사람들이 몇 년을 걸쳐 공을 들였을까 감도 안 왔다.

반면 우리는 지금 세월호를, 삼풍백화점을, (가장 유사한 사례라고 생각하는) '위안부' 문제나 천안함 희생자들을 어떻게 기억하려 하고 있는가. 그걸 국가가 나서서 혹은 사회의 여러 주체까지 협력해서 기획하고 있는가.

너무 슬픔이 많았을 뿐더러 그 슬픔을 제대로 흐느껴보지도 못하고 '그만 좀 해라' '너네만 유난이다' '빨리 털어내야 한다'는 말들에 질식하진 않았던가.

우리가 개, 돼지가 되는 부분은 여기서도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임산부석이 본인이 아닌 미래의 주인공을 위해 존재하는 것, 안보에 중요한 군인들이 군대에서 죽어나가도 방산비리만 버젓이 이뤄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인적 자원들인데 뭐하러 추모하고, 본인을 위해 주고, 처우를 개선하겠는가.

체험을 직시하고, 분노하며 행동하자

'(대한민국) 민중은 개, 돼지'라는 문구에는 이 사회의 단상들이 중첩돼 있다. 한국의 개, 돼지들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거기에 비유된 국민들이 얼마나 도구화됐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왜 이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각자의 이유와 사례를 반추해봄직하다. 그걸 말하고, 나누며 깨닫는 게 이대로 개, 돼지에 머무르지 않을 첫 걸음일 테니까.

또한 나의 생활에서, 나아가 사회에서 좌우상하의 인권을 존중하는 행동을 취했으면 한다. 저녁 없이 비효율적으로 일하지 않을 수 있는 노동권을, 가장 열심히 일하는 직원이 가장 먼저 구조조정되지 않을 안전망을, 잘못한 공직자가 마땅히 권력의 위임자들을 두려워하는 사회를 주장해야 한다.

우리는 개, 돼지가 아니며 개, 돼지라도 생명권을 보장받아야 하기에. 내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또한 비판해야 할 상황 앞에 인간의 말을 구사하도록 나부터 나아가야 함을 실감한다.

사회학자인 피터버그는 '인간의 뛰어남은 불완전성에 있다'고 봤다. 즉 인간은 유전자의 고리에 쓰이지 않은 행동을 할 수 있기에 육체적으로 연약함에도 오래토록 살아남아 번성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개, 돼지를 넘어 호모 사피엔스로 거듭나는 데는 분명 자성과 비판, 변화와 진보, 포용이 함께 해야 할 것이다. 스스로의 인간성이 의심받는 지금이야말로 무감각에 대한 경계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장 좋은 '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태그:#개돼지, #그라운드제로, #동물권, #인권, #인간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