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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이정현 의원이 지난 7일 오전 여의도 당사에서 당 대표 출마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이 지난 7일 오전 여의도 당사에서 당 대표 출마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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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면식도 없지만, 의원님과 저 사이에는 남다른 '인연'이 있다는 걸 우선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의원님이 여당 국회의원 재선이라는 위업을 이뤄낸 '적지' 전남 순천은 지금도 저와 가족들이 살고 있는 고향입니다. 또, 의원님의 출신 학교인 광주 살레시오고등학교는 지금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제 직장이기도 합니다. 의원님에 대한 세간의 관심과 평가에 유독 눈길이 가는 이유입니다.

한낱 교사로 막상 대통령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계신 분께 이런 편지를 올리려니 솔직히 두려움이 앞섭니다. 쓸까 말까 고민하며 컴퓨터 자판 앞에 앉다 서기를 몇 차례나 반복했는지 모릅니다. 의원님께서 불철주야 대통령의 심기를 경호하듯, 의원님의 심기를 예민하게 살피며 '충성'하려는 분들 또한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늘 현실 권력 앞에는 사람들이 '부나방'처럼 들끓기 마련이니까요.

의원님이 이미 '학교를 빛낸 자랑스러운 인물'로 명성이 자자한 상태에서, 이유야 어떻든 이 글로 인해 '학교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짓'이라며 동료교사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을까 당장 걱정도 됩니다. 나아가 아이들의 대학 진학에 만에 하나 좋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되면 어쩌나 싶은 두려움도 없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조직에 누를 끼치면 안 된다는, 일종의 '자기 검열'인 셈입니다. 부디 이 글이 의원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더라도 너그러이 헤아려주시길 소망합니다.

2011년 가을, 19대 총선 후보였던 당신을 기억합니다

지난 6월 30일 오후 서울 중구 언론노조 사무실에서 '청와대의 세월호 보도 통제 증거 공개 언론단체 기자회견'이 자유언론실천재단, 동아투위, 언론개혁시민연대, 민주언론시민연합, 언론노조 주최로 열렸다. 기자회견에서 세월호 참사 직후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이 KBS 김시곤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보도내용에 항의하고, 편집에 개입하는 내용의 육성 녹음파일이 공개되었다.
▲ 세월호참사, 청와대의 KBS 보도통제 증거 공개 지난 6월 30일 오후 서울 중구 언론노조 사무실에서 '청와대의 세월호 보도 통제 증거 공개 언론단체 기자회견'이 자유언론실천재단, 동아투위, 언론개혁시민연대, 민주언론시민연합, 언론노조 주최로 열렸다. 기자회견에서 세월호 참사 직후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이 KBS 김시곤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보도내용에 항의하고, 편집에 개입하는 내용의 육성 녹음파일이 공개되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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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수석 시절 'KBS 녹취록' 문제로 요즘 많이 힘드실 줄로 압니다. 호남 출신 최초로 새누리당의 당 대표 선거에 나서려는 출정식조차 그 그늘에 가려 되레 일파만파 의혹만 확산되고 있으니 얼마나 속이 상하실까 싶습니다. 호기롭게 민심을 탐방하겠다며 평상복 차림으로 국회를 나서는 의원님의 모습을 두고, 주위 사람들은 '일단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는 얄팍한 술수'라며 수군대더군요.

그런데 저는 비속어 가득한 녹취록의 내용에 경악했을지언정, 의원님이 공영방송의 보도에 개입했다는 사실 자체에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대통령의 최측근으로서, 또 당시 대통령을 아주 가까이서 보좌하는 청와대 홍보수석으로서 능히 그러고도 남을 분이라는 '경험적 확신' 때문입니다. 단칼에 목을 벨 수 있었을 텐데도, 일개 보도국장 앞에서 통사정하는 모습이 외려 더 낯설었다고나 할까요.

지난 2011년 가을께로 기억합니다. 당시 여당 비례대표였던 의원님이 제19대 총선 때 광주 서구을 지역구로 출마하겠다며 출사표를 내건 얼마 뒤였으니까요. 당시 후보였던 의원님의 보좌관으로부터 조금은 낯선 청탁 하나를 받았습니다. 정치인이 아닌 선배로서 고등학교 후배들과 만나고 싶다는 얘기였습니다. 평상시 같으면 두 손 들어 환영할 일이지만, 선거를 앞둔 민감한 때라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해 학교 입장에선 주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던 만큼 교사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렸지만, 학교에 근무하는 동문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결국 정치인이 아닌 선배로서 강연을 수락하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아무튼 그때만 해도 '덜 알려진' 정치인이었기에 학교가 의원님 앞에서 '갑질'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공영방송조차 주머니 속 공깃돌 만지듯 하는 요즘 같으면 감히 상상조차 못할 일입니다.

갑작스러운 방문 취소, '박근혜' 때문이었습니다

주당 2시간으로 배정된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을 할애해 아이들을 동원하고 강당에 내걸 환영 현수막을 제작하는 등 실무자로서 분주한 며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행사를 불과 이틀 앞두고 교감 선생님으로부터 '갑작스럽게 생긴 다른 일정 때문에 후보님이 못 오게 됐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교사들끼리 토론을 하고 부러 학사일정까지 변경하는 등 온갖 호들갑을 다 떨었는데, 뒷맛이 개운치 않았습니다.

물론, 한 나라의 국회의원으로서 학교를 방문해 후배들을 만나는 일보다 몇 갑절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 있다는 생각에 그럴 수도 있겠거니 여겼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지역구 관리한답시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눈도장 찍는 것보다, 입법기관으로서 법안 하나 더 제출하고 하다못해 보좌관들과 회의 한 번 더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명색이 국회의원의 존재 이유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보좌관으로부터 전해 들은 '갑작스럽게 생긴 다른 일정'이란 게, 고작 당시 여당의 국회의원이자 유력 대선후보였던 박근혜 대통령의 부산 지역 방문에 의원님이 수행해야 한다는 이유였습니다. 그것이 정치인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인가는 일개 교사로서 알 길 없습니다. 하지만 실망했던 건, 오로지 '주군'을 모시기 위해 수많은 모교 후배와 했던 선약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쳐 버렸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지금껏 제 주위에서 다들 의원님을 '박근혜의 남자'로만 기억하는 이유입니다.

학생들조차도 의원님을 두고, 대통령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는 '열혈남아'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좋게 보면 다혈질의 '의리남'이라는 찬사처럼 들리지만, 기실 '대통령의 꼬붕'이라는 '조롱'에 더 가까운 표현입니다. 심지어 주위에선 '환관'이라는 말조차도 쓰기 아깝다고들 합니다. 제 주위에선 다들 의원님의 '진심'은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 '방향'이 잘못됐다고 손가락질하는 형국입니다.

재선에 성공한 지역구 순천에서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 20대 총선을 앞둔 설 명절 때 고향집 가족, 이웃들과 누구를 지지할 것인지를 두고 설전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단연 화제는 의원님의 지지 여부였고, 야당의 선거연대 같은 이야기는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의원님을 재선시켜야 한다는 쪽과 안 된다는 쪽의 치열한 논쟁이 밤새 이어졌습니다. 송구합니다만 저는 '차악'으로서 야당 후보에게 투표해야 한다는 입장에 섰습니다.

의원님을 지지하는 이들의 주장은 간단명료했습니다. 의원님만큼 지역 예산을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 어떤 분은 "누가 사람 보고 찍나, 돈 보고 찍지"라며 노골적인 지지 의사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보궐선거로 당선되어 고작 1년 반 남짓 일하면서도 '예산 폭탄'을 지역에 안겨줬다면서, 여당, 야당 이름 보고 투표하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며 호기롭게 말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들 사이에서 의원님에 대한 '깨알 자랑'은 이어졌습니다. 동네의 낡은 파출소 건물을 신축하는 데 필요한 예산 9억 원이 내려온 것을 예로 들면서, 이런 사소한 것까지 배려하는 국회의원이 여태 누가 있었느냐며 반문하기도 했습니다. 의원님의 대표 공약인 순천대학교 의대 설립도 분명히 이뤄질 것이라면서, '이(정현)빠'를 자처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이에 "파출소 신축보다 더 중요한 사업이 우리나라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차며 "어차피 눈먼 돈이니 먼저 가져다 쓰는 게 임자"라며 응수했고, 지금껏 고향이 낙후된 이유를 지역에서 힘 있는 정치인이 나오지 않은 탓이라며 단정해 버렸습니다. 국회의원들이 지역의 균형 발전 운운하는 것도 '자신의 지역구에 예산을 빼오려는 수작'이라며, 고상한 척하지만 정치도 어차피 '돈 놓고 돈 먹기' 싸움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변변한 병원 하나가 없어 인근 지역으로 원정 치료를 받아야 하는 곳이 적지 않은 마당이니, 도시에 대학병원을 설립하는 것보다 농어촌 지역에 보건소 하나 더 만들고 인력을 확충하는 게 더 시급하다"는 주장도 순식간에 묵살됐습니다. "그건 그 지역 국회의원이 능력껏 알아서 할 일"이라는 겁니다. '예산 폭탄'이라고 불리던 의원님의 선거 공약은 이처럼 엄청난 폭발력으로 장삼이사들의 맹목적인 지지를 끌어냈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압도적인 지지율로 이명박 대통령을 뽑아준 게 어디 그의 고매한 성품 때문이냐? 도덕적인 흠결이 적지 않은 걸 잘 알고 있었음에도 자수성가한 사업가 출신이니 만큼 그저 자기 호주머니에 만 원짜리 한 장이라도 쑤셔 넣어줄 수 있을 것 같으니 덜컥 찍어준 거지. 언론에서 밤낮으로 떠들어대던 당시의 시대정신이 '부자 되세요'였으니, 대체 누가 누굴 탓하겠냐.

놀라운 게 있다면, 당시 이곳 순천에선 차마 이명박을 찍진 못했지만, 이젠 그 손으로 당당히 이정현을 찍게 됐다는 점이지. 요컨대, 사람들이 '인간' 이정현이 아니라, 이정현의 '돈'에 투표한 거야." 

'58년 개띠'로 의원님과 동갑인 제 큰 형의 이 말에 더 이상의 논쟁은 불필요해 보였습니다. 의원님 덕분에 고향 동네에 새뜻한 파출소가 세워지고, 머지않아 여느 중소도시에는 없는 대학병원을 보란 듯 갖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환호하는 여느 이웃들과는 달리 저는 그것이 하나도 기쁘지 않습니다. 외려 우리나라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손꼽히는 제 고향 순천이 '돈만 밝히는' 도시로 낙인찍히는 것 같아 적지 않게 괴롭습니다.

'예산 폭탄' 아니라 '인간 이정현'에 투표하게 해주세요

세월호 참사 당시 KBS 보도 통제로 논란을 일으킨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지난 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해 의원들의 질의를 경청하고 있다.
▲ '세월호참사 KBS 보도 통제' 빨간 불 켜진 이정현 세월호 참사 당시 KBS 보도 통제로 논란을 일으킨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지난 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해 의원들의 질의를 경청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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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는다'고 하던가요. 대통령을 등에 업은 막강한 권력으로 '예산 폭탄'을 투하하며 지역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어낸 의원님의 당선 소식을 접하면서, 잠시 수구초심 고향이 미워지기까지 했습니다. 돈 공약에 흉흉해질 민심 때문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다른 지역 사람들로부터 순천 시민들이 '돈의 노예'로 능멸당하는 것 같아 분노가 치밀기도 했습니다.

며칠 전 당 대표 선거 출정식 때 '무수저'로 그 자리까지 올랐다는 의원님의 사자후를 들었습니다. 서민 이미지로 포장하기 위해 억지로 끌어다 쓴 표현일 테지만, 만인지상 대통령의 굳건한 신임만한 '수저'는 이 땅 어디에도 없습니다. 더욱이 '적지' 순천에서의 국회의원 재선은 당대표 도전에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원님의 정치 활동에 한계라는 점 또한 분명합니다.

굳이 부인하시진 않겠지만, 예산 몇십억쯤은 손쉽게 주무를 수 있는 실세 권력은, 모교 후배들과 한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칠 줄도 아는 '주군'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의 대가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곧, '예산 폭탄'에 힘입어 당선된 건 기실 의원님에 대한 대통령의 '보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정현'은 어차피 '박근혜'라는 이름과 함께 사라질 '일회용' 정치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정치를 바꾸겠다"는 의원님의 일성에 당황스러웠던 이는 비단 저뿐 아니었을 겁니다. 걱정스럽게도 코흘리개 아이들조차 "박근혜만 바뀌면 대한민국의 정치가 바뀐다"며 정치 혐오를 드러내는 판국입니다. 들어 알고 계실 테지만, 많은 사람이 "19세기 마인드의 대통령이 20세기의 제도로 21세기 국민들을 통치하려 든다"며 대통령의 정치 퇴행을 노골적으로 꼬집기도 합니다.

그 중심에 바로 의원님이 서 있습니다. 대통령의 충직한 '서번트(머슴)'의 입에서 '리더십'이라는 말이 조합되어 나오니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입니다. 뻔뻔한 건지 무식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조롱도 난무합니다. 민생 탐방과 당 대표 당선 여부와는 상관없이 수많은 국민의 눈에 비친 지금 의원님의 모습은 '대통령의 충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의원님의 몸과 마음 곳곳에 더께처럼 켜켜이 쌓인 '박근혜'를 털어내고 부디 '이정현'의 정치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이정현의 '돈'이 아니라 '인간' 이정현에 투표할 수 있도록 비전을 보여주십시오. 그때라야 비로소 '지역과 학교를 빛낸 자랑스러운 인물'로 모교의 후배들과 순천 시민들에게 기억될 것입니다.


태그:#이정현, #녹취록, #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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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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