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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엔 영화 <서프러제트>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말]
원래 6월 28일까지로 예정되어 있던 <서프러제트> 상영기간은 7월 3일까지로 연장되었고, 영화에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모여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상영관 대관 프로젝트를 기획, 진행 중에 있습니다.
 원래 6월 28일까지로 예정되어 있던 <서프러제트> 상영기간은 7월 3일까지로 연장되었고, 영화에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모여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상영관 대관 프로젝트를 기획, 진행 중에 있습니다.
ⓒ 텀블벅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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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국내 상영을 손꼽아 기다려온 영화가 있습니다. 2015년에 영국에서 제작된 이 영화는 2016년 6월 23일에 개봉되었지만, 상영관은 전국적으로 단 17개에 불과하였고 상영 시간도 감상하러 가기 다소 불편한 시간에 배정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았습니다. <서프러제트>는 개봉과 동시에 CGV 아트하우스 예매율 1위를 달성하였고, 7월 4일을 기준으로 개봉 열흘 만에 누적 관객 수 1만8441명을 기록하는 등(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집계) 이례적으로 높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에 부응하여 CGV는 상영기간을 연장하였고, 이 영화를 7월 상영작으로 선정하여 전국의 40개 일반상영관에서 관람할 수 있는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한 영화에 감명 받은 사람들이 모여 더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상영관 대관 프로젝트를 기획, 진행 중입니다.

사람들은 왜 영화 <서프러제트(Suffragette)>를 보고 감동 받고, 더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상영 기간을 연장하려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일까요? 자그마치 100년 전, 이역만리 외국의 이야기가 왜 2016년 한국의 관객들에게 무시할 수 없는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요? 이는 최근 '여성혐오'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이에 대항하여 '싸우는 여성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응, 너만 불편해"
- 불편의 비가역성과 불편하지 않음을 강요하는 이들

영화 <서프러제트>는 기본적으로 모드 와치(캐리 멀리건)의 변화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는 모드의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을 집중적으로 보여줍니다.
 영화 <서프러제트>는 기본적으로 모드 와치(캐리 멀리건)의 변화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는 모드의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을 집중적으로 보여줍니다.
ⓒ upi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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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내 아내야."
"더 이상 그렇지만은 않아."

영화 <서프러제트>는 기본적으로 모드 와츠(캐리 멀리건)의 변화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는 모드의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을 집중적으로 보여줍니다.

법정에서의 증언, 에멀린 팽크허스트(메릴 스트립)의 연설에 참여, 스티드 경관(새뮤얼 웨스트)의 회유를 거절한 후 본격적인 테러활동에 뛰어드는 과정에서 모드는 '불편함'을 자각하는 계기를 마주하는 동시에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운동에 참여할 것인지, 예전처럼 화목한 가정의 아내이자 어머니로 살아갈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모드는 결국 운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마음을 굳힙니다.

모드의 남편인 소니(벤 위쇼)는 계속해서 모드에게 '나의 아내'로 행동할 것을 요구합니다. 소니의 태도는 법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인식적인 측면에서도 부부관계가 동등한 관계가 아닌 소유와 예속 관계임을 드러냅니다.

공화주의적 자유 개념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주인의 호의로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는 노예는 자유롭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화에서 모드와 조지의 관계가 부각되는 것은 단순히 모성애를 강조한 것이라기보다 가부장적 지배에 예속된 '화목함'이나 '행복'은, 진정한 '자유'와는 현격한 거리가 있음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할 듯합니다.

모드의 태도와 입장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표면적으로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지만, 이미 부당한 구조에 대한 '불편함'을 자각한 상태에서 실질적으로 모드에게는 하나의 선택지만 남게 된 셈이죠.

영화 중반부에 서프러제트의 가장 열성적인 단원 중 한 명인 바이올렛(앤 마리 더프)이 임신으로 인해 운동에서 이탈하는 장면은 더욱 상징적입니다. 너무 지쳤다고, 더는 운동에 참여하지 못하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는 바이올렛은 주취폭력자인 남편의 아내이자 일곱 명의 어머니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참정권 운동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그의 '선택'일지 모르지만, 그가 돌아가야 할 삶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최근 한국에서는 여성을 대상화하거나 여성에 대한 편견을 재생산하는 문화콘텐츠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회가 강요해온 문화를 더 이상 수용하지 않겠다는 여성들의 반응은 '더 이상 그렇지만은 않아'라는 모드 와츠의 선언과 유사합니다.

이렇게 분출되고 있는 '비가역적인' 불편함의 반대편에서 '프로불편러'라는 신조어가 유행처럼 회자되고 있습니다. 페미니즘 관점에서 제기되는 각종 문화콘텐츠에 대한 비판을 두고 '뭘 그런 사소한 것에까지 예민하게 구느냐'며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쓰는 말입니다. 여성참정권 투쟁 당시 '서프러제트'가 일종의 '낙인(stigma)'으로 기능했던 것처럼, '프로불편러'라는 조롱 역시 입막음을 위한 낙인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불편함'을 일깨울 수는 있지만, 한 번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불편하지 않음'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전자는 정체하거나 답보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지만, 후자는 많은 경우 현상유지를 위한 '폭력'의 수단이 됩니다.

많은 경우 '불편함'을 일깨우는 편은 사회적 약자이며, '불편하지 않음'을 강요하는 편은 기득권입니다. 아무런 구체적인 행위 없이 단지 불편해할 뿐이라 해도, 기득권은 '불편함의 확산'이 가져올 결과를 두려워하고 이를 억압합니다. 그러므로 '불편함이 불편하다'는 것을 제외한, '불편함의 관점'을 문제 삼는 것은 언제나 신중해야 합니다. 건강한 사회란 '불편함이 당연한 사회'입니다.

"그거랑 그거랑 같나요?"
- 같지 않아서 더 힘들고 어려운 싸움

tvN SNL Korea에서 2016년 6월 11일 방송된 '나만 불편해?' 코너는 '불편함'의 이유에 대한 고민 없이 단순히 '불편함' 자체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비판을 들었다.
▲ 조롱거리가 되는 '불편함' tvN SNL Korea에서 2016년 6월 11일 방송된 '나만 불편해?' 코너는 '불편함'의 이유에 대한 고민 없이 단순히 '불편함' 자체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비판을 들었다.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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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영화의 배경과 한국의 상황이 전혀 다름을 지적하며 선을 그을지도 모릅니다. 한국에서는 당연한 듯 보장되는 '선거권'이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그저 먼 나라의 옛날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참정권의 '형식'이 아닌 작동하는 '실질'을 보면 이 영화가 한국의 상황에 주는 메시지를 평가 절하할 수 없게 됩니다.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발표한 '2015년 세계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여성의원과 장관 수 등을 평가한 정치적 권한 부분에서 145개국 중 101위를 기록했습니다. 투표권과 공무담임권이 제도적으로 여성에게도 동등하게 보장되어 있는 한국에서 이러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제도의 작동을 막는 문화적인 편견이 여전히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016년 한국 사회에서는 '여성혐오(misogyny)'에 맞서는 목소리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여성혐오'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씌워지는 편견이나 부당하게 가중되는 비난, 멸시, 조롱, 대상화의 총체를 의미합니다. 여성혐오에 대한 저항은 '남성과 동등한 인간으로서 대우받을 권리'를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수단적 권리인 '참정권'을 확보하려는 투쟁보다 더욱 근본적인 영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성혐오'는 오랫동안 '사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왔으며, 사회문화적으로 매우 내밀하게 침투하여 지금까지도 상당 부분 법과 제도의 공백상태에 놓여있습니다. 서프러제트들은 여성을 배제하고 남성들만이 만든 법과 제도에 대한 불응 차원에서 기물파손, 방화 등 불법적인 폭력수단을 동원했습니다. 여성혐오에 대한 저항은 법과 제도가 다루지 않는 문화적·인식적 측면과 싸워야 한다는 점에서 끊임없이 저항에 대한 정당화를 요구받는 어려운 과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성혐오에 대해 문제의식과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내가 예민한 것은 아닐까?' 혹은 '내가 잘못 생각하는 것일까?'라는 자기검열에 직면하는 것도 '여성혐오'가 대부분 '불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너는 틀리지 않았어, 너는 혼자가 아니야"
- 2016년의 이들에게 위로를 주는 1912년의 이야기

때때로 나의 삶을 위한 크고 작은 투쟁이 외롭게 느껴질지라도, 누군가가 수만, 수천의 발소리를 '시끄러운 쿵쾅거림'으로 비난할 지라도, 나의 권리를 찾기 위한 나의 예민함, 나의 불편함에 나 스스로만은 지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때때로 나의 삶을 위한 크고 작은 투쟁이 외롭게 느껴질지라도, 누군가가 수만, 수천의 발소리를 '시끄러운 쿵쾅거림'으로 비난할 지라도, 나의 권리를 찾기 위한 나의 예민함, 나의 불편함에 나 스스로만은 지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 upi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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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굴레를 모두 벗어던진 여성이 절규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아무도 도달하지 않았던 머나먼 곳을 향해 가는가? 나는 혼자다. 나는 철저하게 혼자다.'"

영화는 여성의 참정권도, 양육권도 제도적으로 보장되지 않은 상태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투쟁의 결과로 지금 이 순간 그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권리를 누리고 있음을 압니다.

법정에서 증언할 때 나지막이 읊조린 모드 와츠의 마지막 말, '또 다른 방식의 삶(another way of living this life)'을 꿈꾸는 모든 사람에게 영화는 계속해서 위로를 건넵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모드의 독백은 스티드 경감의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You are nothing in the world)"라는 비아냥거림에 대한 날카로운 반박이면서,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메시지를 보여줍니다.

때때로 나의 삶을 위한 크고 작은 투쟁이 외롭게 느껴질지라도, 누군가가 수만, 수천의 발소리를 '시끄러운 쿵쾅거림'으로 비난할지라도, 나의 권리를 찾기 위한 나의 예민함, 나의 불편함에 나 스스로만은 지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태그:#서프러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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