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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3월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울린 세발의 총성을 기억하고 있는가?

다음날 뉴욕타임즈가 '조선 민족은 살아있다'라고 대서특필하고 이어 전세계의 언론들이 조선 청년 두 명이 샌프란시스코 중심가 한복판에서 백인 미국인에게 총격을 가했다고 보도했다.

조선 청년은 전명운과 장인환이고 백인 미국인은 스티븐슨이다.

이 사건이 우리 국사교과서에 나오는 스티븐슨 암살사건이다.

스티븐슨은 당시 조선의 외교고문으로 조선백성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사람이였으나 을사늑약 당시 일본의 편에 서서 고종황제를 3일간이나 겁박하고 이완용과 짜고 을사늑약을 맺도록한 장본인이다.

그런 스티븐슨이 샌프란시스코에 나타나 일본이 조선을 구하는 역사적이고 휼륭한 조약이고 이완용 같은 애국자는 없다는 기자회견을 하게 된다. 이에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던 문양목을 비롯한 조선청년 4명은 스티븐슨이 있던 호텔로 찾아가 정정기자회견을 요청하며 항의하게 된다.

하지만 스티븐슨이 거절하자 문양목은 얼굴을 가격하고 의자를 집어던져 스티븐슨을 크게다치게 한다. 이후 이들 조선 청년들은 상항 한국인연합감리교회에서 보고대회를 개최한 자리에서 스티븐슨이 병원치료 이후 워싱턴으로 돌아갈 것으로 보이니 응징해야한다고 한다. 이때 전명운과 장인환이라는 청년이 권총만 구해주면 처단하겠다고 했다.

바로 다음날 이들은 샌프란시스코를 빠져나가려는 스티븐슨을 향해 총격을 가해 이틀만에 숨지게 만들었다.

대표적인 미주 한인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이 의거의 한복판에 충남 태안군 남면 옹산리 출신의 우운 문양목 애국지사가 존재한다. 문 지사는 일본의 조선 침탈을 반대한 동학농민혁명의 북접기포지인 태안에서 혁명군으로 나섰다가 체포되어 사형직전에 인천으로 탈출하여 다시 하와이로 건너가 사탕수수 노동자로 일을 하다가 또다시 동포들과 샌프란시스코로 옮겨온 미주한인1세대로, 이곳에서 미주독립운동을 이끈 애국지사이다.

전명운 장인환 의사가 체포된 이후 이들의 재판과 석방 투쟁을 주도하고 미주에 흩어진 동포들을 하나로 모으는 조직 구성, 신문 발행, 국어학교 설립 등 미국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그렇게 이름도, 빛도 없이 쓸쓸히 생을 마감한 우운 문양목의 막내아들로, 샌프란시스코에서 4시간이나 떨어진 작은 도시 '웨딩'에서 살고 있는 93세 윌리암문씨를 만났다.

그에게서 1920년대 초 아버지(사진 앞쪽 왼쪽 두번째 콧수염 있으신분)와 함께 항일 독립운동을 했던 항일 투사들의 사진을 어렵게 볼 수 있었다. 스티븐슨 암살사건 이후 이들의 변호를 위해 당시 유학생인 이승만에게 부탁했으나 거절당하고 신홍우라는 동포를 찾아가 10년 만에 이들의 석방을 이끌어 낸 아버지의 얘기도 들었다.

문양목은 무뚝뚝하고 정이 없는 아버지였다. 그는 영어를 배워 우리말은 잘 모르는 아들 윌리엄에게 '동학혁명'과 '독립운동'이라는 단어는 잊지말라고 늘 당부했다. 윌리엄을 영어로 말을 이어가다가도 이 두 단어는 똑똑히 발음했다. 노구의 월리암 문과 부인, 아들을 보면서 조선은 독립을 위해 조용히 목숨을 바친 숨은 애국열사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선 취재진에게 거수 경례하는 그를 보며 뼈 속 깊이 독립군의 피가 흐르는 대한인이라는 생각에 숙연해졌다.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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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모이,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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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시대를 선도하는 태안신문 편집국장을 맡고 있으며 모두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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