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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누군가의 잊지 못할 고통을 '트라우마'라는 단어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 아픔부터 일터에서의 정신건강, 세월호 참사의 생존자들과 유족의 슬픔까지, 사회의 다양한 아픔은 트라우마라는 이름으로 설명되고 '납득'되기에 이르렀다.

과거 슬픔이나 한(恨)과 같은 개인의 감정 문제가 측정할 수 있고 증명될 수 있는 객관적 과학의 언어로 변화하면서, 인간의 슬픔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의사이자 인류학자인 <트라우마의 제국(바다출판사, 2016)>의 저자들은 사회의 이질적 고통을 '표준화', 나아가 '공식화' 시키는 과정 속에서 벌어진 정치적 맥락과 투쟁을 추적해가며 이 질문에 답해 나간다.

홀로코스트 - '환자'에서 '피해자'로

트라우마의 제국 / 디디에 파생·리샤르 레스만 지음|최보문 옮김|2016년 4월  발행
 트라우마의 제국 / 디디에 파생·리샤르 레스만 지음|최보문 옮김|2016년 4월 발행
ⓒ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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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들은 기존에 '꾀병', '개인적 나약함'으로 말해지던 특정 사건 후의 정신적 고통이 트라우마로 전환되는 단초를 제공한 것은 '홀로코스트'라는 거대한 비인간적 공간으로부터 살아나온 생존자들이었다고 지적한다.

비인간적인 홀로코스트를 견뎌내며 얻게 된 생존자들의 정신질환은 기존 인식으로는 결코 설명될 수도 없고, 설명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비인간적 구조 속에서 인간성을 지켜내며 얻게 된 정신질환은 오히려 보다 '인간적'인 것이었다.

이처럼 "홀로코스트를 겪고도 정신이 정상인 것이 비정상"이라는 보편적 인식이 확대되며, 생존자들의 병리 현상은 트라우마 특유의 '환자=피해자'라는 개념틀이 형성되게 된다.

사회의 도덕적 가치가 정신의학적 진단의 한계와 맞물리며 과거의 기억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위치를 '환자'에서 '피해자'로 변화시키기에 이르렀다.

이질적 집합체, 트라우마 - '개인적 슬픔'에서 '과학적 진단'으로

이렇게 고통이 재정의되는 사회 흐름 속에서, 전후의 이질적 집단들이 각기의 목적을 가지고 트라우마 개념을 형성하는 투쟁의 장에 뛰어들게 된다.

미국 베트남전쟁 참전군인들을 '공식 기억' 속으로 포섭하길 바라는 미국정부, 자신들을 피해자로 재정의 하려는 미국 참전군인단체, 정신의학의 입지를 넓히려는 전문가집단, 성폭력 여성피해자들의 후유증을 진단적 언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페미니즘 운동 측의 입장은 절묘하게 맞물리며 1980년 DSM-3로 공식화된 'PTSD' 개념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그들의 아픔이 과학적이고 보편적이기 위해서는 그 속의 '개인'은 사라져야만 했다. 이질적 가치를 지닌 단체들이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 모두가 과학적 진단을 통해 본인의 아픔에 대한 정당성을 획득하기를 원했다는 점에 있었다.

모든 참여주체는 자신의 아픔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정신의학적 언어를 필요로 했고, 그들의 아픔이 과학적이고 보편적이기 위해서는 그 속의 개인은 사라져야만 했다.

4부 <입증의 정치>에서 지적되듯, 트라우마가 과학적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트라우마 획득 과정보다 증상이 뚜렷한지 여부가 더욱 중요한 요소로 부각된다. 이처럼 개인의 아픔 속 '개인'이 제거된 트라우마가 비로소 과학이라는 권력을 획득하게 된다. 결국 홀로코스트에 대한 뜨거운 도덕성은 어느새 과학의 차가움 뒤로 사라졌다.

비어있는 '트라우마' 쟁취하기

'개인의 기억'과 '의미'가 사라진 트라우마는 그 의미를 자신의 것으로 전유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의 장에 서게 된다. 책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사건인 '9·11'에서 부시 정부의 발 빠른 트라우마 대처가 그 대표적 예이다.

9·11에서 부시정부는 생존자 및 목격자를 치료함과 동시에 집단적 트라우마라는 수사를 통해 이른바 '악의 축'과의 전쟁을 도덕의 계보 내에 위치시킨다. 이 과정에서 트라우마는 피해와 도덕성을 연결시키는 논리적 연결고리를 수행하며 전쟁의 담론으로 활용되고 만다.

한국 사회에서 세월호 참사를 기점으로 모두가 트라우마와 치유를 말하며 트라우마는 완전한 일상의 언어로 자리매김한 듯하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에서 생존자들과 유족들이 말하는 '트라우마'와 정부가 제기한 '트라우마'는 결코 동일하지 않았다.

트라우마란 개념은 결국 모든 것을 말하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며, 그 '비어있는 의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기억투쟁의 치열한 산물로서 의미를 획득해야 한다.

세월호 생존자와 유가족들의 슬픔도,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슬픔도, 자살공화국 한국의 수많은 슬픔들도 결국 '트라우마'라는 단어 뒤에 잊혀져가는 '그들의 개인적 기억'을 함께 외침으로써 현현한다.

트라우마가 진정한 시대의 아픔을 대변하기 위해서는, 진단 그 뒤에 숨겨진 의미를 되찾아오려는 투쟁이 필요하다. '트라우마'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트라우마의 제국 - 트라우마는 어떻게 우리 시대 고통을 대변하는 말이 되었나

디디에 파생.리샤르 레스만 지음, 최보문 옮김, 바다출판사(2016)


태그:#트라우마, #바다출판사,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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