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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충렬사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부산 분전 순국도>. 게시작품을 사진으로 찍은 것이므로 원작과는 색깔 등이 많이 다름.
 부산 충렬사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부산 분전 순국도>. 게시작품을 사진으로 찍은 것이므로 원작과는 색깔 등이 많이 다름.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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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13일 오후 6시 무렵, 부산 앞바다가 일본군의 전선으로 빼곡하게 채워진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조정에 '(오후 4시쯤) 대략 90여 척의 왜선들이 부산포를 바라보며 잇달아 항해 중'이라고 보고한 후 다시 '왜선 150여 척이 해운대에서 부산포를 향해 다가오는 중'이라는 2차 장계를 보낸다. 일본군 전함들이 절영도 앞에 정박한 뒤 경상감사 김수도 '왜선 4백여 척이 부산포의 건너편에 와서 정박 중'이라고 보고한다.

<선조수정실록> 4월 13일자 기사에 따르면 '경상우병사 김성일도 "적선은 4백여 척에 불과하고, 배 한 척에 수십 명만 태우고 있어서 다 합쳐도 1만여 명에 못 미친다"라고 아뢰었고, 그러자 조정에서도 그렇게 여겼다(兵使狀啓 賊艘不滿四百 一艘不過載數十人 計其大略 約可萬人 朝廷亦以爲然)'. 실제 이 당시 부산포로 난입한 일본 군선은 700척이었지만, 조정에 보고된 적선은 90척, 150척, 400척으로 점점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정확한 숫자와는 거리도 멀었다.

일본군들은 해가 저문 후 뭍에 상륙하여 부산진성의 경계 상태를 살핀다. 장수 종의지(宗義智)를 필두로 한 적의 척후병들은 조선군의 수비 상태가 견고한 것을 확인, 다음날 아침 일찍 날이 밝은 후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한다. 배 3척을 거느리고 절영도 주변을 순찰한 부산진첨사 정발(鄭撥, 1553-1592)은 급히 성으로 돌아온 후 동문루에 올라 명령을 내린다.

"장졸들은 물론이고 민병(民兵)들도 모두 자신의 위치를 사수한다. 배 3척을 모두 바닷속에 가라앉혀라. 적의 손에 넘겨줄 수는 없다. 악관(樂官)은 동문루 앞에서 퉁소를 불어라!"

까맣게 밀려온 적선들이 앞바다를 빽빽하게 매운 광경을 처음 보았을 때는 모두들 놀란 마음에 낯빛이 변했었다. 하지만 수령이 너무나 태연자약한데다 악음까지 밤하늘에 울려퍼지자 사람들의 심리가 많이 진정되었다. 지난 4월초, 정발이 자신의 노모, 그리고 아들과 나눈 대화의 내용을 백성들은 알 리 없었다.

4월초 왜란을 예측한 정발, 오늘 죽기를 각오

부산진성의 개전 당시 상황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 이 그림은 충렬사안락서원에 전해져 온 것으로, 1760년(영조 36) 동래부사 홍명한이 변박을 시켜 옛 순절도를 모사한 작품이다. 원본은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보물 391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은 부산시 발행 <충렬사> 수록분을 재촬영한 것이다.
 부산진성의 개전 당시 상황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 이 그림은 충렬사안락서원에 전해져 온 것으로, 1760년(영조 36) 동래부사 홍명한이 변박을 시켜 옛 순절도를 모사한 작품이다. 원본은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보물 391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은 부산시 발행 <충렬사> 수록분을 재촬영한 것이다.
ⓒ 충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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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첨사로 발령을 받은 정발은 임지 출발을 앞두고 엎드려 노모에게 말씀드렸다.

"충과 효는 본래 함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소자는 이제 왕가(王家)의 위급한 때를 맞아 전선(戰線)으로 가고자 합니다. 어머니께서는 자애(自愛)하시고,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노모가 정발의 말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등을 어루만졌다.

"이미 나라에 바친 몸이거늘 어찌 사사로운 일에 매일 수 있겠느냐. 네가 충신이 된다면야 내게 무슨 한이 남겠는가."

정발이 늙으신 어머니를 아내에게 부탁하고 한양을 떠나왔는데, 곧 아들 흔(昕)이 부산까지 내려왔다. 겨우 열넷밖에 안 된 아들과 함께 하룻밤을 보낸 정발은 더 이상 데리고 있으려 하지 않고 한양으로 돌아가게 했다.

"나라의 일이 위급하니 너는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한다. 지체하다가는 돌아가는 길에 병화(兵火)를 면하지 못하리라." 

흔이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형편이 그러하다면 더욱 저 혼자 이곳을 떠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혼자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손을 쓰다듬으면서 달래었다.

"어린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죽은들 나라에 무슨 보탬이 되겠느냐. 집에 돌아가 할머니와 어머니를 잘 모시는 것이 너의 할 일이다."

그래도 흔이 울면서 남기를 청하자 정발은 하인들을 꾸짖어 아들을 말 위에 강제로 끌어올렸다. 그로부터 불과 열하루만에 임진왜란이 터졌고, 적들은 지금 성 바로밖 바다에 머물러 있으면서 아침이면 몰려올 기세인 것이다.

이른 아침, 왜란 첫 전투가 시작되었다

부산진첨사의 갑옷과 투구(부산시 발행 <충렬사>의 사진)
 부산진첨사의 갑옷과 투구(부산시 발행 <충렬사>의 사진)
ⓒ 부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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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아침에는 검은 빛이 감돌 만큼 진한 농무(濃霧)가 서렸다. 적들은 짙은 안개에 섞여 뭍으로 올라왔고, 금세 성을 에워쌌다. 적들은 서문 밖 지대가 높은 곳에 올라 성안을 향해 조총을 쏘아댔다. 성벽을 기어오르는 자들을 도우려는 엄호 사격이었다.

정발은 검은 갑옷을 차려입고 진중을 지휘했다. 그는 대궁(大弓)의 명수였다. 대궁을 휘어잡은 그가 한 발 화살을 날릴 때마다 적의 조총수나 성벽에 붙은 일본군이 꼬꾸라졌다. 정발은 성내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장졸들을 격려했다. 조선군과 민병들의 사기는 아주 높았다.

종3품 정발 첨절제사 휘하에서 종8품 부사맹으로 있던 이정헌(李庭憲)도 활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분전했다. 이정헌은 정발이 평소 손님을 접대하는 예절에 대해 자문을 구할 만큼 학식이 뛰어난 인재였다. 아군의 사기는 더욱 치솟았고, 적의 시체가 쌓이면서 세 곳에 조그마한 언덕이 생겨날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아군은 군민(軍民) 다 합해봐야 1천여 명, 적군은 무려 1만 8천여 명이었다. 결국 북문 쪽을 뚫고 적의 대군이 밀려들었고, 부녀자들까지 나서서 돌을 던지며 싸웠지만 우리측은 절대적으로 수세에 몰렸다. 이미 이때는 정발도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정공단 외삼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세워져 있는 '충장공 정발 전망(戰亡)비'를 볼 수 있다.
 정공단 외삼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세워져 있는 '충장공 정발 전망(戰亡)비'를 볼 수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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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가 기울었습니다. 사또께서는 일단 자리를 피하시어 뒤를 도모해 주십시오. 성밖으로 나가셔서 원군을 도모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이 자리는 제가 감당을 하겠습니다."

장수 한 사람이 정발에게 그렇게 말했다. 정발이 눈을 부릅뜨고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망녕된 소리냐. 내가 수장(首將)인데 어찌 너에게 성을 맡기고 벗어날 수 있단 말이냐. 나는 마땅히 마지막까지 이 성을 지킬 것이다. 대장부는 적을 앞에 두고 사전(死戰)이 있을 뿐이다. 두 번 다시 물러날 것을 주장하여 군심(軍心)을 흐리면 목을 벨 터인즉 앞으로는 입에 담지 말라." 

정발의 결의를 본 장졸들도 모두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다. 화살을 나르던 소녀가 쓰러지고, 그 딸을 대신하던 늙은 어미도 죽고, 부러진 창을 들고도 끝까지 적과 싸우던 군사도 전사했다. 이윽고 총알 하나가 투구를 뚫고 들어가 정발의 온몸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이정헌이 정발을 부축하여 바위에 기대어 눕혔으나 그는 "싸워라......" 한 마디를 남기고 끝내 절명했다.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정발을 붙들고 간호하던 첩 애향(愛香)은 칼을 거꾸로 들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진했다. 종 용월(龍月)은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칼을 맹렬히 휘두른 끝에 마침내 피를 토하며 숨졌다. 이정헌이 전사하면서 200년 동안 전쟁 없이 평화롭게 살아온 조선과, 100년 내내 통일 전쟁을 치른 뒤 다시 침략군이 되어 바다를 건너온 일본군과의 첫 전투는 그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비극은 이어졌다. 아들 정발의 전사 소식을 들은 노모는 그날 이후 줄곧 통곡을 하다가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정발, 이정헌, 애향, 용월 등 부산진성 전사자들 기리는 정공단

정공단 외삼문
 정공단 외삼문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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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8천여 일본군은 1천여 조선군을 대상으로 한 부산진성 전투에 몸서리를 쳤다. 그래서 전투가 끝난 후 그들은 지독하게 보복 학살을 했다. 일본군은 군신(軍神)에게 혈제(血祭)를 지낸다면서 개와 고양이까지 모두 참살했다. 따라서 이 전투의 경과는 조선인들에 의해 전파될 수가 없었고 오히려 일본인들의 입을 통해 알려졌다. 그 탓에, 심지어 이정헌은 부산진성 전투가 있은 지 150여 년이 지난 1742년(영조 18)에 이르러서야 장렬한 전사 소식이 세상에 전해졌다.

정발, 이정헌, 애향, 용월 그리고 이름을 남기지 못한 채 부산진성 전투에서 숨져간 이들을 기리는 제향 공간이 없을 리 없다. 부산광역시 동구 정공단로 23에 있는 '정공단(鄭公壇)'이 바로 그곳이다. 물론 정공단의 '정공'은 그곳에서 제사가 지내지는 모든 분들을 대표할 수 있는 정발을 가리키고, '단'은 단소(壇所)를 말한다.

'증 좌승지 이공 정헌 비'와 '충장공 정발 장군 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증 좌승지 이공 정헌 비'와 '충장공 정발 장군 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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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소는 산소(山所)는 아니다. 단소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돌이나 흙으로 쌓아올린 공간이다. 단소에는 묘소가 없다. 다만 단소에는 빗돌 등 기념할 만한 상징물들이 세워져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공단에는 계단 왼쪽 아래에서부터 '충복(忠僕) 용월 비'와 '전망(戰亡) 제공(諸公) 비'가 있고, 제단 가운데에 '증 좌승지 이공 정헌 비'와 '충장공 정발 장군 비'가 좌우로 나란히 있으며, 계단 오른쪽에 '열녀 애향 비'가 세워져 있다. 정발과 이정헌 두 분만이 아니라 첩 애향과 종 용월까지 모시고 있는 점이 너무나 인간적이다. 특히 1592년 4월 14일 부산진성 전(戰)투에서 사망(亡)한 여러(諸) 분(公)들을 기리는 비까지 세워졌으니 그날 죽음을 맞이했던 군졸과 무명의 백성들께서도 조금은 위안이 되시리라.

계단 왼쪽에 '충복 용월 비', '전망(戰亡) 제공(諸公) 비', 가운데에 '증 좌승지 이공 정헌 비'와 '충장공 정발 장군 비', 계단 오른쪽에 '열녀 애향 비'가 세워져 있는 정공단 전경
 계단 왼쪽에 '충복 용월 비', '전망(戰亡) 제공(諸公) 비', 가운데에 '증 좌승지 이공 정헌 비'와 '충장공 정발 장군 비', 계단 오른쪽에 '열녀 애향 비'가 세워져 있는 정공단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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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공단 외삼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관리사가 있다. 관리사와 내삼문 사이에는 '참배'라는 제목의 안내판이 하나 서 있다. 안내판에는 '복장은 단정하게, 자세는 정중하게, 마음은 경건하게'라고 쓰여 있다. 안내판을 보노라니 문득, 참배자다운 몸가짐이 저절로 갖춰진다.

관리사에는 '사단법인 정공단 보존회', '부산진 향우회', '동구 정씨 종친회' 세 현판이 주련처럼 붙어 있다. 외삼문 오른쪽에는 비각 한 채가 커다랗게 두드러지고, 비각과 내삼문 사이 담장을 따라가며 세워져 있는 10여 기의 선정비들이 이채롭다. 비각 안에는 거대한 빗돌 1기가 웅장한 위엄을 뽐내고 있다. 안내판은 이 빗돌의 이름이 '충장공 정발 전망(戰亡, 전쟁에서 죽음)비'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비는 1761년(영조 37)에 경상좌도 수군절제사 박재하(朴載河)가 세웠다.

'충정공 정발 전망비' 비각과 외삼문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 비각 왼쪽에는 10여 기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충정공 정발 전망비' 비각과 외삼문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 비각 왼쪽에는 10여 기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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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공 정발 전망비와 정공단이 설치되어 있는 곳은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성의 남문이 있던 지점이다. 1766년(영조 42)에는 부산첨사 이광국(李光國)이 임진란 당시 부산진성 전몰 선조들을 추모하고 기억하기 위해 제단(정공단)을 설치했다. 이때 비석들도 세웠다. 이름은 각각 '충장 정공발 전망 유지(遺址)', '증 좌승지 이공정헌지비', '전망 제인(諸人) 비', '열녀 애향비', '충노(忠奴) 용월 비'였는데, 2009년 5월 들어 새로 비석들을 만들어 정공단을 깔끔하게 정비했다.

박재하는 충장공 정발 전망비에 글을 남겼다. 황간(黃幹)의 글씨로 새겨진 박재하의 글은 마치 애절한 서사시와도 같아서 읽는 이의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山嶽之崒 不足爲高 산악이 우뚝 솟은 것 높다 할 것 없고
日月之光 不足爲昭 해와 달이 빛나는 것도 밝다 할 것 없네
惟公之節 撐柱宇宙 오직 공의 절개만이 세상의 기둥이 되니
孤城一片 綱常萬古 고립된 성의 일편단심 만고의 모범일세
僕妾之烈 竝崒一室 노복과 첩의 충직함도 한 집안에 우뚝하고
矧又賓幕 凜乎南八 막료인 이공도 당나라 남팔(南八)처럼 늠름했으니
短碑難摸 溟海不竭 짧은 비석에 적기 어려워도 깊은 바다처럼 다하지 않으리

정공단 내 '충장공 정발 장군 비' 바로 뒤에는 본래의 비석들이 세워져 있는 자리를 말해주는 표지석이 놓여 있다.
 정공단 내 '충장공 정발 장군 비' 바로 뒤에는 본래의 비석들이 세워져 있는 자리를 말해주는 표지석이 놓여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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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의 기사와 송시열의 기록이 많이 다른데

선조실록 4월 13일자에는 '왜구가 침범해 왔다, (중략) 적선이 바다를 덮어오니 부산첨사 정발은 마침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면서 조공하러 오는 왜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다가 미처 진(鎭)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발은 난병(亂兵) 중에 전사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정발이 사냥을 즐기며 놀던 중 '바다를 덮은 적선'을 보고도 조공선이라 여겨 아무 대비도 하지 않았고, 성이 함락된 뒤에야 성으로 돌아왔으며, 난장판의 와중에 전사했다는 내용이다. 적선이 바다를 뒤덮은 채 밀려 오는데도 조공선으로 여겼다? 영도에서 부산진까지 오기도 전에 성이 이미 함락되었다? 상식적으로 보아 신뢰할 수 있는 기록으로 인정하기 어렵다.

그래서일까, 선조수정실록은 조금 다르다. 수정실록 4월 13일자는 '14일 왜적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침략해 와서 (중략) 부산 첨사 정발은 절영도에 사냥하러 갔다가 급히 돌아와 성에 들어갔는데 전선은 구멍을 뚫어 가라앉히게 하고 군사와 백성들을 모두 거느리고 성가퀴를 지켰다, 이튿날 새벽에 적이 성을 백겹으로 에워싸고 서쪽 성 밖의 높은 곳에 올라가 포를 비오듯 쏘아대었다, 정발이 서문을 지키면서 한참 동안 대항하여 싸웠는데 적의 무리가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그러나 정발이 화살이 다 떨어져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자 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다'라고 말한다.

정발이 영도에 사냥을 갔고,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식의 기록은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의 <부태소록>에 전하는 내용이다. 박동량은 '첨사 정발은 그 전날 절영도에 수렵을 나갔다가 숙취(宿醉, 크게 취함) 미성(未醒, 술이 덜 깸)한 채 바다를 덮고 밀려드는 적선단을 바라보며 하는 말이 "세견선이 오래도록 오지 않더니 이제 비로소 오는 것이로다" 하고 뇌까렸다'라고 적었다. 박동량의 표현에 대해 <임진전란사>의 저자 이형석은 '순국지장(殉國之將)을 욕되게 하는 바가 크다"면서 "무장을 예우하는 도리가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이형석은 송시열의 증언에 근거하여 박동량의 기록, 즉 실록의 '세견선 오인' 기록을 '취하지 않는 바이다' 하고 역사가로서의 견해를 밝혔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증언은 박동량 및 실록과 전혀 다르다. 본 기사에 쓴 정발과 노모의 대화, 정발과 아들의 이별, 노모의 원통한 절명, 애향과 용월의 죽음, 정발과 이정헌의 분투 등도 송시열의 <우암집>과 그가 쓴 '정발 묘갈명(墓碣銘, 묘비에 새긴 글)'을 인용한 것이다.

송시열은 '뒷날 왜장 평조신(平調信)이 통신사 황신(黃愼) 공에게 공(정발)의 충효(忠孝)를 자주 언급하며 "그때 우리 군대가 부산에서 크게 패하였다"라고 말했고, 공의 첩 애향이 함께 자결한 일을 얘기하면서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라고 강조한다. 송시열은 '공은 나라 사람들만 칭송할 뿐 아니라 못된 왜적들까지 칭송하였고, 못된 왜적들이 공만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공의 첩까지 칭송을 하였으니, 공이야말로 평소에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라고 칭송했다. 송시열은 정발을 언행일치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은 조선 시대 성리학의 표상으로 극찬하고 있는 것이다.

송시열은 '부산첨사 정발은 임진년(1592) 왜변(倭變)을 당하여 성을 지키며 왜적들을 죽이다가 힘이 다하여 목숨을 바침으로써 대절(大節)을 세웠다'라고 평가했다. 따라서 송시열은 정발 묘갈명의 마지막 문장을 '내가 명(銘)을 짓지 않으면 누가 파묻힌 일을 드러내어 알리겠는가'로 장식했다.

나 역시 오늘 정공단을 소개하는 이 기사문을 써서 실록의 잘못된 정발 언급을 바로잡고, 공의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언행일치 정신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려고 한다. 따라서 이 글의 마지막 문장 역시 '내가 이 기사를 쓰지 않으면 누가 정발, 이정헌, 애향, 용월, 그리고 1592년 4월 14일 부산진성에서 전사한 1천여 선조들의 뜨거운 마음을 세상에 드러내어 알리겠는가!'가 적당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남팔은 중국 당나라 사람 남제운(南霽雲)을 가리킨다. 남제운은 절의를 지키다 죽었는데, 그가 남씨 집안의 여덟째 아들이라 하여 그 이후 '남팔'이라는 관용어가 생겨났다.



태그:#정발, #임진왜란, #이정헌, #정공단, #부산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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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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