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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전북 전주에서 전투경찰로 군복무하던 김상회(59)씨는, 당시 접한 광주 소식을 고향에 편지로 알리려다 징역형을 받았다. 그의 편지는 국가에 의해 검열당했고, 국가는 그에게 '포고령, 반공법 위반'이란 죄명을 덧씌웠다. 이후 36년을 움츠린 채 살았던 그는 이제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으려 한다. 13일 서울 서초구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김씨를 만났다. 아래는 김씨와 나눈 대화와 자료를 토대로, 그의 시점에서 쓴 글이다. [편집자말]
*<5.18, 어느 전경의 편지 (상)>에서 이어집니다.

5.18 당시 전경으로 광주 소식을 편지로 알리려다가 포고령·반공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산 김상회씨.
 5.18 당시 전경으로 광주 소식을 편지로 알리려다가 포고령·반공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산 김상회씨.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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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전북 전주에서 전투경찰로 군복무 중이던 나는 전북도경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광주 소식을 담은 편지를 누나·동생에게 썼다가 포고령·반공법 위반 혐의를 뒤집어 쓴 것이다. 이후 전북 계엄합수단, 육군 35사단 헌병대 영창에서 얻어맞으며 조사를 받은 뒤, 광주 상무대 영창에 수감됐다.

특히 육군 35사던 헌병대 영창은 지독히도 힘들었다. 조사 과정에서 얻어맞는 건 물론이고, 하루에도 몇 번씩, 삼청교육대식의 가혹행위가 이어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봇대 만한 목봉을 들고, 공수부대 PT체조를 강제로 진행했다. 하루에 기본 두 차례(오전, 오후), 한 번 하면 두 시간 가량 이러한 가혹행위를 당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헌병들은 자기들 기분이 안 좋다 싶으면 언제든 우리를 불러냈다. 한 번 봉체조를 하면 화장실에 제대로 앉지 못할 정도로 다리가 후들거렸다.

폭력이 동반된 조사는 상무대에서도 계속됐다. 상무대에선 검찰관 심문에 순순히 대답하지 않는다며 수차례 폭행을 당했다. '예스(yes), 혹은 노(no)'로 대답하지 않으면 주먹이 날라오고 이른바 '쪼인트'를 까였다. 1m 쯤 되는 대형 곡괭이 자루로 위협을 당하기도 했다.

7월 2일, 군법무관 서○○ 중위는 나를 '포고령 위반 및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이어 8월 8일, 전교사 계엄보통군법회의가 진행한 1심 재판에서 나는 혐의가 모두 인정돼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형을 선고받았다.

465일 동안의 수감생활


5.18 당시 전경으로 광주 소식을 편지로 알리려다가 포고령·반공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산 김상회씨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닦던 손수건을 손에 쥐고 가지런히 모았다.
 5.18 당시 전경으로 광주 소식을 편지로 알리려다가 포고령·반공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산 김상회씨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닦던 손수건을 손에 쥐고 가지런히 모았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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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무죄를 주장하며 다퉈줄 것으로 생각했던 김○○ 변호사는 반대 심문 없이, 오직 정상참작을 요청하는 1분의 변론으로 나를 실망시켰다. 영화에서 봐왔던 피고인을 위한 변호사의 치열한 변론은, 그야말로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란 걸 느꼈다.

나는 이 사건의 불합리함을 말하고자 "앞으로 나와 같은 불행한 사람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진술했다. 이 진술을 들은 재판관은 "피고인은 사회에 불만이 있나"라고 반문했다. 나는 용기 없이 "그렇지 않다"고 짧게 답했다. 당시 상무대 영창에는 정동년, 정상용, 김종배, 박남선, 허규정씨와 명노근, 송기숙 교수, 윤영규 선생 등 5·18 항쟁의 주역들로 중형 혹은 사형 선고 얘기가 돌던 분들이 수두룩했다. 그런 공포스런 분위기 속에서 편지 두 통짜리 사건자인 내가 어찌 법정에서 길게 이야기할 수 있었겠나.

재판이 끝난 8월 어느 날, 강원도 양양에 거주하던 부모님이 나를 면회하기 위해 상무대 영창을 찾았다. 내가 구금되기 전 속초우체국에서 근무하던 아버지는 그 사이 근무지가 바뀌어 인근 동해안경비사령부 내 군사우체국장으로 발령이 나 있었다.

때문에 내 사건의 사정을 알아봤는데, 당시 신군부는 5.18 소식이 타 지역에 전파되는 걸 막았고, 내 편지는 강릉 지역 보안부대에 걸렸다고 했다. 누군가 나 같은 희생자를 제물로 검거 실적을 올리려고 했거나, 애국심을 빙자한 공명심에 저지른 반민주적 행위였다.

1980년 뜨거운 여름을 광주 상무대 영창에서 보낸 뒤, 나는 8월 말쯤 항소심을 위해 서울 성동구치소로 이감됐다. 나는 1심 재판에서 변호사만 믿었던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고 항소심을 준비했다. 하지만 내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2월 2일 열린 육군 계엄고등군법회의는 항소 기각 판결을 내렸다. 이어 1981년 1월 24일 계엄령이 해제되면서 포고령 위반 혐의의 면소 판결을 기대하며 상고했으나, 1981년 4월 14일 대법원 역시 상고를 기각했다. 이 과정에서 재판부는  구금일수 중 상당일을 형기 산입에서 제외했다. 괘씸죄 적용이란 확신이 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징역 1년형을 받고도 처음 구금(1980년 6월 5일)된 이후 465일이 지난 1981년 9월 12일, 형기만료로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했다.

출소 후에도 계속된 감시

김상회씨가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하던 날 아버지, 이모부와 함께 낯선 이 한 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속초경찰서 정보과 형사 이○○ 경사라고 소개했다. 그는 김씨를 향해 "5.18 관련 반공법 위반 수형자로 보안처분 대상자이기 때문에 신병을 접수하러 왔다"고 말했다. 김씨는 그를 따라 속초경찰서에 가 보안처분 대상자 신고를 했다.
 김상회씨가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하던 날 아버지, 이모부와 함께 낯선 이 한 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속초경찰서 정보과 형사 이○○ 경사라고 소개했다. 그는 김씨를 향해 "5.18 관련 반공법 위반 수형자로 보안처분 대상자이기 때문에 신병을 접수하러 왔다"고 말했다. 김씨는 그를 따라 속초경찰서에 가 보안처분 대상자 신고를 했다.
ⓒ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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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독방에 갇혀 있을 때, 가족이 넣어준 <조선독립운동사> 전집을 읽다가 일제강점기 때 이른바 '편지사건'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은 조선인의 이야기를 발견했다. 아직 우리나라가 인권이 보장된 민주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인권은 출소 이후에도 철저히 짓밟혔다. 강릉경찰서는 내가 전주에서 수사받을 당시 우리 동네에 와 신원조사를 진행했고, 정보과 형사들이 나의 대공혐의점을 찾기 위해 동네 주민들을 대상으로 탐문을 진행했다. 이때 형사들이 하고 다니던 말이 동네에 소문이 나서, 나는 이미 동네에서 '빨갱이'가 돼 있었다.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하던 날에는 아버지, 이모부와 함께 낯선 이 한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속초경찰서 정보과 형사 이○○ 경사라고 소개했다. 그는 내가 "5.18 관련 반공법 위반 수형자로 보안처분 대상자이기 때문에 신병을 접수하러 왔다"고 말했다. 나는 그를 따라 속초경찰서에 가 보안처분 대상자 신고를 했다.

1982년 3월, 나는 대학에 복학해 춘천의 하숙집에 살았는데, 내가 사는 하숙집 담장 너머엔 항상 정보과 형사들이 기웃거렸다. 보안처분 대상자였기 때문에 그들은 내 동향을 점검했던 것인데, 경찰의 감시를 받는 데 따른 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수형 생활 때부터 겪었던 악몽과 가위눌림, 스트레스에 따른 신경성 위염, 위궤양, 두통 등으로 약봉지를 달고 살아야만 했다.

"끝내 회사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 신원조회에 걸린 것이다. 이때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사건은 나를 지금까지 은둔자로 만든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끝내 회사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 신원조회에 걸린 것이다. 이때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사건은 나를 지금까지 은둔자로 만든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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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11월 나는 서울에 있는 어느 상장회사의 취직 면접을 봤다. 다른 합격자들로부터 내가 최종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끝내 회사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 신원조회에 걸린 것이다. 이때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사건은 나를 지금까지 은둔자로 만든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1983년 12월 23일, 나는 성탄절 특사로 복권됐다. 하지만 경찰의 감시는 계속됐다. 1984년 2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 중랑구 친척집에서 1년간 신세를 졌는데 이때도 태릉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을 친척집 인근에서 자주 마주쳤다. 이러한 생활은 1985년 1월 17일자로 보안처분이 면제될 때까지 계속됐다.

*<5.18, 어느 전경의 편지 (하)>로 이어집니다.


태그:#5.18, #전경,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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