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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꽃다발을 저와 제 아들의 스승님과 곡진한 마음으로 함께하고 싶습니다.
 이 꽃다발을 저와 제 아들의 스승님과 곡진한 마음으로 함께하고 싶습니다.
ⓒ 오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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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제가 스승의 날이었습니다.

이 날이면 생각나는 두 분, 선생님이 계십니다.

한 분은 중학교 1학년 때 제 국어 선생님이십니다. 담임선생님이시기도 했는데 매일 일찍 출근하셔서 교무실에 계시는 대신 교실로 올라오셔서 등교하는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눈 맞추고 등 두드려주곤 하셨습니다. 등교한 학생들이 조용히 자습을 할 수 있게 유도하시고 과목에 관계없이 모르는 것을 질문하게 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우리 반이 늘 한 시간 하교가 늦었습니다. 그것은 종례가 끝난 뒤 다시 한 시간쯤 담임선생님께서 보충수업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영어, 하루는 수학 등, 국어선생님께서 국어뿐 아니라 아이들이 수업 진도를 따라가기 힘들어하는 과목들을 돌아가며 강의해주셨습니다.

당시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 일이 사회의 여러 관계들에 눈 뜬 지금 돌이켜보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누구보다 먼저 등교하는 부지런함은 혼자 일이니 감당할만 하지만 같은 학교에서 다른 과목을 가르치는 일은, 그 담당 과목 선생님의 입장을 생각하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저의 담임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께 '유별난 사람'으로 소외되거나 성공지향적인 사람으로 오해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2학기 때 다른 도시로 전학하는 바람에 그 선생님과 관계가 지속되지 못했지만 중학교 1학년 때 한 학기 동안 함께 했던 그 담임선생님의 세상을 사는 태도는 지금까지의 제 모든 날들을 지배했습니다.

제가 영문학을 전공으로 택했던 이유의 큰 부분도 유난히 외국어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던, 그래서 아침 조회시간에도 자신이 내 주었던 영어숙제 검사까지 하셨던 그 국어선생님 때문이었지 싶습니다.

#2

다른 한 분은 제 아들의 선생님이십니다. 

제가 서울에서 파주로 이사하던 때가 아들의 중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큰딸은 대학생이었으므로 함께 이사 오는데 큰 부담이 없었고, 막 고등학교 3학년이 된 둘째 딸은 스스로 서울에 남았습니다. 대학입시 공부의 부담 때문이었습니다. 막내인 아들은 막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는 때로, 파주의 시골생활을 너무나 즐겼습니다.

동물을 좋아하고 운동을 좋아하는 아들은 큰 애완견 해모를 키울 수 있는 이 마을을 좋아했고, 학교 특별활동으로 주어진 승마에 빠져 방과 후면 승마장에 가서 마부로 살다시피 했습니다. 팔극권 사부님을 만나 무술을 연마하는 시간도 그에게는 더없이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문제는 공부였습니다. 학과 공부라는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한 두 딸들이 '아들을 바보로 만들 거냐?'며 저에게 성화였습니다.

3년의 전원생활을 만끽한 아들은 누나들에게 붙잡혀 서울로 갔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역시 아들은 서울의 학습 강도를 따라가기 힘들어했습니다. 방과 후에는 서울대반, 연고대반 등 공공연히 우열반으로 나뉘어 공부하는 분위기도 견디기 힘들어했지만 60점 미만 학생들이 남아 자습을 해야 하는 야간학습은 아들 체질이 아니었습니다.

유난히 힘들어하는 아들을 눈여겨본 분이 그 자율학습 감독 선생님이셨습니다. 영대와 대화로 부모와 떨어져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선생님은 어느 휴일 영대에게 하루 동안 데이트를 신청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선생님 부름에 응한 영대는 하루 동안 선생님께서 이끄시는 발걸음에 함께했습니다.

어느 대학 앞에서 만난 영대는 선생님을 따라 그 대학 캠퍼스로 들어갔습니다. 나무가 우거지고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 캠퍼스는 운동장 하나와 4층짜리 긴 건물로만 이루어진 자신의 고등학교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정원 같은 캠퍼스를 느리게 걸어서 당도한 곳은 도서관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형과 누나들이 자유롭게 책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도 말만 자율인 방과 후 자율학습실 풍경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빈 강의실을 지나 다른 건물로 안내했습니다. 그곳에는 책이 겹겹이 쌓인 칸막이있는 책상에서 형들이 공부에 열중이었습니다. 먼저 본 도서관과는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이곳은 고시실이란다. 국가 공무원이 되기로 결심한 학생들이 더 몰입해서 공부할 수 있도록 대학에서 제공한 공부방인 셈이지. 사법고시, 행정고시, 외무고시 등 여러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이렇게 휴일에도 아랑곳 않고 공부하고 있단다."

교문을 나서면서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이 대학교는 내가 공부한 곳이란다. 내가 이곳에서 공부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내가 영대의 고등학교에서 영대를 만날 수 있었고 오늘 이렇게 함께 데이트도 할 수 있게 된 거란다."

선생님은 영대를 대학로로 데려갔습니다. 젊은 연인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한 그 거리를 옮겨 다니며 몇 개의 전시를 보고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었습니다. 지하철 혜화역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신 선생님은 영대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책 한 권을 내밀었습니다.

책 속지에는 '나의 애제자 영대에게, ○○○ 선생님'라는 메모가 남겨져 있었습니다.

영대는 그달 말 내게로 왔을 때 선생님과의 그 하루를 소상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고 선생님이 주신 책도 반쯤 읽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책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였습니다.

아들은 선생님과의 나들이가 있은 2달 뒤 그 선생님이 감독으로 계신, 학습부진학생을 위한 자율학습반을 벗어났습니다.

영대가 미국의 교환학생으로 다녀온 뒤 2년간 방황한 끝에 스스로 대학진학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도 아마 그 선생님과의 하루 데이트가 바탕이었지 싶습니다.

#3

제가 10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스트하우스, 모티프원을 누군가가 '글로벌 인생학교'라고 명명했고 다른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받아들이게 된 것은 이곳에서 일어나는 담론들 때문입니다.

제가 이곳에서 하는 일은 누군가의 말에 최선을 다해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뉴욕 출신 하워드 슐츠(Howard Schultz)는 1982년 시애틀의 스타벅스에서 마케팅책임자로 일을 시작한 불과 5년 뒤 그 회사를 인수하여 CEO가 됩니다. 제가 그분에게 주목하는 것은 시애틀의 작은 커피숍을 다국적 기업으로 키워낸 경영능력이 아니라 지역사회 공헌을 기업의 주요 가치로 여기고 실천하는 경영자라는 그의 평판입니다.

저는 하워드 슐츠의 조언 중에 '매일 다른 사람과 점심식사 하라'는 말에 솔깃했습니다. 그 말은'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는 말의 다른 표현인 셈이지요. 저도 매일 각기 다른 사람과 점심식사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두 가지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그 시간이면 모티프원의 새로운 일에 매달려야 해, 제일 바쁜 시간이었습니다. 누구와 레스토랑에서 한가롭게 얘기를 나눈다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둘째는 경제적으로도 여유롭지 못했습니다. 매일 돌아오는 공과금과 이자, 한 가족의 가정이 돌아가게 해야 하는 가장으로서 이체금을 충당하기에도 빠듯한 제게 매일 매일 외식비조차 하찮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저는 제가 가진 것을 뒤돌아보았습니다. 제게는 새로 집을 지으면서 마련한 괜찮은 서재가 있었습니다. 저는 모티프원을 방문한 모든 사람들과 그 서재를 공유했고, 그분들이 떠날 때도 언제든지 재방문을 허락한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그 말들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모티프원을 방문했던 분이 나중에 홀로 방문하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와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자기 얘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서재의 문턱을 넘어오는데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최대한 환대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최선으로 귀를 쫑긋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하워드 슐츠의 점심식사가 하루에 한 번이라면 저는 점심식사비를 지불하지 않고도 하루에 몇 번씩 식사를 하는 셈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시간의 담론들을 정리해서 블로그와 SNS로 공유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덧글이나 카톡 등으로 얘기에 참여했습니다. 점심식사 횟수가 훨씬 늘어난 것입니다.

어제 한 분이 모티프원의 블로그 안부게시판에 카네이션 꽃 그림 한다발을 두고 가셨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는 이 꽃다발을 저와 제 아들의 스승님과 곡진한 마음으로 함께 하고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태그:#스승, #스승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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