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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혁신위원장에 선임된 김용태 의원이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정진석 원내대표의 혁신위원장 선임 발표 기자회견 뒤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새누리당 혁신위원장에 선임된 김용태 의원이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정진석 원내대표의 혁신위원장 선임 발표 기자회견 뒤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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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민심의 거센 격랑을 피하려 하거나 거슬러 오르려고 하면 죽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새누리당의 한 의원이 2015년 4월 '성완종 리스트'에 연루된 이완구 당시 국무총리의 사퇴를 촉구하면서 한 말이다. 그는 "친이(친이명박)계의 입장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나는 친이계가 아니라 새누리당 재선 국회의원이다"고 잘라 말했다. 또 "나는 국민의 민심을, 지역구의 민심을 당 지도부에 전달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같은 해 10월 박근혜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방침에도 제동을 걸었다.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 "정부가 일방적으로 국정교과서를 추진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깐요"라며 "정부 방침이 정해지고 나서 차후에 그것을 추인하는 형태의 당론 채택이 이뤄지는 건 이번에 처음 봤다"라고 비판했다.

2012년 7월 저축은행 비리사건과 관련, 정두언 새누리당 의원에 대한 국회 체포동의안 처리가 목전에 왔을 때도 그는 목소리를 냈다. 당시 이한구 원내지도부가 무조건 가결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황임에도 "이번 체포동의안은 법원의 영장실질심사 결과 구속이 결정돼 나온 것이 아니라 강제구인을 위한 절차다, 검찰의 영장 남발을 막아야 한다"라며 부결을 호소했다. 그의 호소 이후 체포동의안은 부결됐고 이한구 원내지도부는 사퇴의사를 밝혔다. 그로부터 2년 뒤 정 의원은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 받았다.

그가 친박(친박근혜)의 반대편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8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형 이상득 의원의 총선 불출마를 요구하는 대열에도 그의 이름이 포함돼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추모 정국'이 형성됐던 2009년 6월엔 권택기·임해규·정태근·조문환·정두언·차명진 의원 등과 함께 '박희태 지도부' 조기 사퇴를 촉구하고 나섰다.

이 모든 사건의 주인공은 15일 새누리당 혁신위원장으로 임명된 김용태 의원(3선. 서울 양천을)이다. 철저히 '비주류의 길'을 걸었던 그가 이젠 당의 혁신을 진두지휘할 입장에 처했다.

MB직계였지만 스스로 택한 '소장파의 길', 당의 민원도 해결할까

어찌보면 그는 '주류'로 편입될 수 있었던 이다. 김 신임 혁신위원장은 2004년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 등의 추천으로 당시 대권을 모색하던 이명박 캠프에 합류했다. 이후 정무기획, 연설문 작성에 참여했고 2008년엔 대통령직 인수위의 최연소 전문위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청와대 비서관으로 시작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물리치고 18대 총선에서 야권의 텃밭인 서울 양천을에 출사표를 던졌다. 또 'MB직계'란 타이틀과 '뉴타운 바람'을 타고 여의도에 입성했지만 앞서 '영포대군'으로 꼽히던 이상득 의원의 불출마를 요구하는 등 소장파의 길을 택했다.

새누리당 혁신위원장에 임명된 김용태 의원(오른쪽)이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임명 소감을 밝히기 위해 마이크 위치를 조정하고 있다. 왼쪽은 정진석 원내대표.
 새누리당 혁신위원장에 임명된 김용태 의원(오른쪽)이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임명 소감을 밝히기 위해 마이크 위치를 조정하고 있다. 왼쪽은 정진석 원내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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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안팎에서는 이 같은 그의 선택을 '민중당'이란 열쇳말로 이해하기도 한다. 민중당은 당시 '노태우 정권 심판'이 목표였던 원외 진보정당이었다. 그는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학생 시절 이 민중당에서 장기표·이재오·김문수·김성식·차명진 등과 연을 맺었다. 일각에서는 이 때의 인연을 바탕으로 그를 '김문수계'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 그는 2012년 5월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장기표 선생이 1992년 서울 동작갑에 민중당 후보로 출마했을 때 서울대 정치학과 학생들이 자원봉사를 나갔는데 나는 그 중 한 명이었을 뿐"이라며 "김문수나 차명진을 나와 같은 선상에 놓는 것은 그 분들에게 누가 된다"라고 말했다.(관련 기사 : "성과 인정하지만 이번 총선이 박근혜의 최대치")

그러나 김 위원장을 김문수와의 인연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김 전 지사가 한나라당에 합류한 뒤 급속도로 보수화된 것에 반해 그는 당내 소장파의 위치를 줄곧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같은 위치 탓에 20대 총선 공천 땐 정두언 의원 등과 함께 끝까지 공천을 안심하지 못하는 처지에 몰리기도 했다. 당시 이한구 당 공천관리위원장은 '윤상현 욕설 녹취록' 사건이 불거지자 앞서 봉합했던 '청와대 살생부' 의혹을 다시 제기하며 단수추천 지역이었던 그의 공천 여부를 계속 미뤄왔다.(관련 기사 : 봉합한 '살생부' 꺼낸 이한구, 윤상현 구명작전?) 결과론적이지만 20대 총선 공천파동의 피해자가 될 뻔했던 김 위원장이 당의 혁신 작업을 주도하게 되는 상황이 된 셈이다. 

특히 '민원해결사'란 별칭에서 드러나듯 그가 현장의 민심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이는 김 위원장이 서울에서 3선 고지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그는 2010년 이후 지역구에서 130회 이상 '민원의 날' 행사를 열어 1만5000명이 넘는 지역구민들을 만났다. 그 같은 노력에 따른 보답은 확실했다. 19대 총선 당시 그는 이용선 당시 민주통합당 후보를 1780표 차로 꺾었다. 당시 새누리당이 얻은 정당 득표는 야당에 비해 1만3758표나 적었다. 즉 '개인기'로 승리를 일군 셈이다. 김 위원장은 '심판풍'이 거셌던 20대 총선 때도 2235표 차로 신승했다.(관련 기사 :  김용태 의원은 지역구 관리의 '달인')

김 위원장은 이날 역시 '민심'을 강조했다. 그는 "혁신의 출발은 우리 국민이 이미 다 알고 있는 새누리당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라며 "국민이 매를 치며 질책한 데 대한 답을 조만간 정확하게 드리겠다"라고 공언했다. 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국민 속에서 국민과 함께 국민 눈높이에 맞춰서 혁신하겠다"라며 "처음부터 끝까지 뼛속까지 모든 것을 바꾸는 혁신을 해서 새누리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신 분들의 마음을 다시 얻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48세의 젊은 나이에 수도권 3선 의원에 오른 그가 당의 '민원'도 해결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태그:#김용태, #혁신위원회, #새누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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