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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나이를 먹었지만 고향집에 핀 풀꽃은 어린시절 그대로다.
 사람은 나이를 먹었지만 고향집에 핀 풀꽃은 어린시절 그대로다.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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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건너 형오가 꽃을 달아주고 간다야..."

어버이날, 이른 아침부터 어머니의 입이 귀에 걸렸다. 일곱 자식에게도 받지 못한 카네이션꽃 한 송이에 감동하셨나 보다.

경기도 성남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는 후배는 어버이날을 맞아 고향을 찾았다. 카네이션 세 송이를 사온 후배. 한 송이는 그의 모친에게, 다른 한 송이는 부친 산소에 그리고 마지막 한 송이는 숙모라고 불렀던 우리 어머니에게 달아주었다.

후배는 한때 모친의 젖이 부족해 우리 어머니 젖을 먹고 자란 어린 시절이 있었다. '먼 사촌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속담이 이런 때 쓰는 모양이다. 꽃 한 송이 달아준 후배가 일곱 자식보다 났다. 아련한 고마움이 밀려왔다.

작은 꽃 한 송이에 어머니는 '감동'

7남매를 키우신 어머니는 아버지 없는 결혼식장에서 일곱번을 울었다.
 7남매를 키우신 어머니는 아버지 없는 결혼식장에서 일곱번을 울었다.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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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소중함이 더 절실한 계절 5월이다. 블로그에서 읽은 내용이다. 직장인들이 가정의 달 5월을 부담스러워하는 이유 1위로 '각종 선물과 용돈 등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을 꼽았단다.

또 화목한 가정을 위해 꼭 필요한 조건 1위는 '관심과 대화, 일상의 소소한 기쁨'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돈과 물질을 최고의 선(善)으로 삼는 현대인들에게 가족의 의미에 대해 한번쯤 되새겨야 할 문구다.

올 어버이날은 유난히 긴 연휴가 겹쳤다. 민박을 하는 어머니는 요즘 바쁘다. <아빠 어디가>에 이어 <불타는 청춘> 메인세트장이 된 우리 집에 밀려든 예약손님 때문이다. 이런 관계로 형제들은 올 어버이날을 제때 못 챙겼다. 다들 바쁘고 섬이라 동선 맞추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연휴가 끝나면 어머니와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다.

며칠 전 홍성에 사는 남동생네가 어머니를 찾아뵙고 갔다. 늘 제수씨가 고마울 따름이다. 나 역시 전날 일을 마치고 배를 타고 섬집으로 향했다. 밤에 급히 가느라 그 흔한 카네이션도 준비를 못했다. 섬에 내려오지 말라던 어머니는 아들과 손자가 오자 마냥 기뻐했다.

외동딸로 태어난 어머님은 젊은 시절 백바지에 노란셔츠를 입은 아버지에게 반해 섬에서 섬으로 시집을 왔다. 그 당시 가난한 살림으로 결혼식은 꿈도 못 꿨다. 둘은 정화수 한 그릇 떠놓고 천지신령님께 빌었다.

"천지신령님! 우리 부부 무탈하게 아들 딸 많이 점지해주소서."

할아버지에게 숟가락 하나도 물려받지 못한 아버지 탓에 섬에서 셋방살이 신혼집을 차렸다. 목수였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직접 벽돌을 찍어 방 두 칸짜리 집을 지었다. 이곳에서 자식 7남매를 낳아 키웠다.

한때 동해로 오징어잡이를 간 아버지가 납북되는 바람에 홀로 자식을 키워야 했던 어머니는 모진 삶을 견뎠다. 이후 몇 년 만에 아버지가 송환됐다.

7남매 둔 중년 부부의 특별한 웨딩마치

어버이날 여수에서 배를 타고 고향에 갔다. 이미 해가 저물어 밤이 고요한 가운데 달빛에 비친 고향집의 모습
 어버이날 여수에서 배를 타고 고향에 갔다. 이미 해가 저물어 밤이 고요한 가운데 달빛에 비친 고향집의 모습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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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뿐인 막내 삼촌의 죽음은 가장 큰 슬픔이었다. 장어잡이 배 선장이었던 삼촌은 태풍을 만나 풍랑사고로 배가 침몰했다. 어릴 때 용돈을 잘 주시던 삼촌이었기에 지금도 삼촌 모습이 아련하다.

이후 어머니는 장어가 동생을 잡아갔다며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그 좋아하던 장어는 입에도 대지 않는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와 아버지는 결혼식을 올렸다. 혼인신고만 하고 살아온, 자식 일곱 둔 중년 부부의 웨딩마치는 이맘때쯤 5월로 기억된다. 고기를 잡아 여수로 팔러 나오신 두 분은 남부끄럽다고 친척들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둘만의 조용한 결혼식을 했다.

어머니가 차려주신 고향 밥상. 반찬이 걸다.
 어머니가 차려주신 고향 밥상. 반찬이 걸다.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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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면사포와 양복을 입은 두분의 얼굴에 주름이 가득했지만 사진에 비친 모습은 세상 그 어느 결혼식보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이제 좀 살만 하니 아버지는 55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어머니는 그때 나이 40대 후반이었다. 막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는 시기였다. 어디 혼자 산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인가마는 당시 재혼은 꿈도 못 꿨다.

어머니는 홀로 자식들을 다 출가시켰다. 아버지 없는 7남매 결혼식장에서 어머니는 일곱 번을 울었다. 지금 생각하면 자식된 도리로 어머니를 재혼이라도 시켜드렸어야 했는데 그리 못했다. 늘 안타깝고,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이다.

소원 이룬 어머니... 오래오래 사세요!

교회가는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바다로 나가 고기잡이로 자식들을 키우신 어머니는 이제 관절이 다 달아서 다리가 불편하다.
 교회가는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바다로 나가 고기잡이로 자식들을 키우신 어머니는 이제 관절이 다 달아서 다리가 불편하다.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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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이라 교회를 간다며 집을 나선 어머니가 다시 돌아왔다. 어머니 걸음으로 큰 동네까지는 50분이 소요되지만 배로 가면 5분 거리다. 배로 태워드리기로 했다. 선착장까지 함께 걸었다.

"엄니 우리 모자지간에 사진 한 컷 찍어요."
"사진은 무슨? 난 사진을 찍으면 눈이 감겨 짝눈이 되드라. 어제 도사님께 기 치료를 했더니 어깨와 다리가 한결 수월하다."

함께 동행한 도사님의 염력이 효염이 있었나 보다. 내가 사는 여수에서 섬까지는 먼 거리다. 하지만 고향에 오면 어머니가 있어 늘 마음이 편하다. 이사 가던 날 70살이 되면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오겠다던 어머니는 그 소원을 풀었다.

시골에서 온 가족이 명절을 쇤 지 2년이 넘었다. 시골에서 특별한 명절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른다. 지금 어느 때보다 행복하신 어머니는 지병으로 고생이 많다. 이제 80, 90세까지 더 건강하고 아픈 데 없이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아버지가 못 사신 명까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수넷통> <전라도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가정의달, #어머니, #지양님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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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하고 싶은 일을 남에게 말해도 좋다. 단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라!" 어릴적 몰래 본 형님의 일기장, 늘 그맘 변치않고 살렵니다. <3월 뉴스게릴라상> <아버지 우수상> <2012 총선.대선 특별취재팀> <찜!e시민기자> <2월 22일상> <세월호 보도 - 6.4지방선거 보도 특별상> 거북선 보도 <특종상> 명예의 전당 으뜸상 ☞「납북어부의 아들」저자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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