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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두 평등하다"

이런 평범한 진리가 보편화된 것은 그다지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세계인들에게 자유와 인권과 민주주의의 나라라고 평가받는 미국이라는 나라는 불과 150년 전에는 흑인 노예가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며 노동을 하는 나라였다. 신대륙에 정착하려는 백인이 당면한 문제는 노동력 부족이었다. 일손이 많이 필요한 담배가 주요 생산물이었던 남부에서는 이 노동력 부족의 문제를 흑인 노예로 해결했다. 아프리카에서 총칼로 흑인들을 잡아 노예선에 태우고 쇠사슬을 묶어 짐짝처럼 차곡차곡 쌓아 그들의 땅으로 데리고 왔다.

당시 최고의 상품인 인간을 최소공간에 최대로 넣는 방법을 보여주는 유명한 설계도다. 배 안에 시체를 넣는 곳도 보인다. 많은 흑인이 운송 도중에 죽었음을 알려준다.
▲ 18세기 영국의 흑인 노예선 설계도 당시 최고의 상품인 인간을 최소공간에 최대로 넣는 방법을 보여주는 유명한 설계도다. 배 안에 시체를 넣는 곳도 보인다. 많은 흑인이 운송 도중에 죽었음을 알려준다.
ⓒ 미국사 다이제스트.가람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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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엇 터브먼의 생애

그들은 백인들의 총칼과 폭력 속에 두려움에 떨면서 농장에서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 노예의 자식들도 부모의 삶을 이어받아 똑같은 노예의 삶을 살았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진리를 가슴에 품고 스스로 자유를 찾고 동료 흑인들의 자유까지 찾으려 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이 바로 해리엇 터브먼(1820~1913)이다.

그녀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백인들에 의해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흑인 노예선에 실려왔던 사람들이었다. 당시 미국 사회는 농업 중심의 남부와 공업 중심의 북부로 나누어져 있었다. 남부와 북부 모두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나 남부에서는 흑인 노예들을 아무런 임금 없이 짐승처럼 대했다. 하지만 북부의 공장주들은 노동력 확보를 위해 남부의 흑인 노예들에게 약간의 임금과 자유를 보장했다.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던 흑인 노예의 입장에서 북부는 천국이었다.

그렇게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흑인들은 남부의 흑인 노예들을 북부의 자유지대로 탈출시키는 이른바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어 활동했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해리엇 터브먼이었다. 비밀 지하조직으로 운영되다 보니 경로와 조직원들은 모두 철도 용어에서 따온 은어로 불렀고 안내자는 '차장'으로, 은신처는 '역'으로, 그곳 책임자는 '역장'으로 불렀다. 또, 돈을 지원하는 사람은 '주주'로, 탈주 중인 노예는 '승객'이나 '화물'로 명명했다.

남북전쟁이 끝난 1865년 비로소 운행이 종료된 이 지하철도는 최대 10만 명 정도의 흑인 노예를 탈출시켜 그들에게 자유의 새 삶을 선사했다. 그녀는 이 지하철도 조직에서 '차장'으로 활동하며 힘들게 모은 돈을 털어 흑인 노예들이 자유를 찾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861년 미국 북부와 남부 사이에는 전쟁이 터졌고 그녀는 흑인 해방을 위해 북군에 종군했다. 그녀는 북부 연합군의 일원으로 요리사로 간호사로 또는 무장정찰병으로 스파이로 맹활약하였다. 4년에 걸친 전쟁으로 북부는 승리를 거두었다. 형식적으로 흑인들은 자유를 얻었지만 뿌리 깊은 차별과 멸시는 지속되었다.

미국은 오랫동안 '동등하게 대우하지만 분리한다'는 애매한 정책으로 여전히 흑인들을 차별하였고 그 차별과 그에 따른 흑백 갈등은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녀는 남북전쟁 이후에도 "죽을 때까지 자유를 위해 싸우겠다"라는 말을 하며 흑인 인권과 여성 참정권 운동을 계속했고 죽어서 미국 전역에서 우상이 되었다.
여성단체가 해리엇 터브먼을 모델로 만든 가상 20달러 이미지
▲ 20달러 가상 이미지 여성단체가 해리엇 터브먼을 모델로 만든 가상 20달러 이미지
ⓒ AFP=연합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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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달러 새 지폐의 모델이 된 노예출신 흑인여성인권운동가

그 해리엇 터브먼이 미국의 20달러 지폐의 모델이 되었다. 미국 재무부는 20일 20달러 지폐 앞면 모델을 앤드루 잭슨 전 대통령(7대)에서 노예 출신 흑인 여성 인권운동가 해리엇 터브먼(1822∼1913·사진)으로 변경한다고 발표했다. 150명의 흑인 노예를 소유했던 잭슨 전 대통령은 지폐 뒷면에 들어간다.

잭슨 전 대통령은 원주민 인디언들을 강제로 이주시킨 정책으로 최근 들어 많은 비판을 받는 인물이며 중앙은행과 지폐 사용을 반대하기도 했다. 뉴욕타임스(NYT) 등은 이에 대해 "터브먼이 잭슨을 내쫓았다"고 표현했다. 미국 지폐모델로 여성이 등장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더구나 흑인 노예해방에 앞장선 흑인 여성운동가를 모델로 그려 넣는다는 것 자체가 미국 사회는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재무부의 발표 이후 공화당 대선주자 도널드 트럼프는 '정치적 결벽증'의 사례라고 비판하고 있고, 잭슨 전 대통령의 고향 테네시주의 라마르 알렉산더 상원의원도 비판 성명을 냈다. 하지만 이러한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미국 재무부는 2020년에 새 지폐 도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2020년은 미국에서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헌법 개정안이 비준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 5만 원권의 모델 신사임당

우리나라는 미국보다 앞서 여성이 화폐 모델로 통용되고 있다. 5만 원권의 신사임당이 그 주인공인데 신사임당은 조선시대 현모양처의 상징이자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다. 1960년대 박정희 정부 제3공화국이 그녀의 아들인 이이와 시댁 친족인 이순신을 국가 영웅으로 추앙하면서, 신사임당 역시 다시 부덕(婦德)의 상징이 되었다. 이로 인해 국사·국어·미술 교과서에 시와 작품이 실리고 위인으로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2007년 당시 여성계와 시민단체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양성평등을 기치로 내세워 신사임당을 5만 원권 지폐 주인공으로 도안하였다. 신사임당이 5만 원권의 모델로 결정되자 여성 단체를 포함하여 많은 시민단체와 학계가 비판을 했다.

역사적으로 많은 여성이 있음에도 역사적 인물로서 신사임당은 유교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이상적인 여성의 전형이며 이를 여성의 대표 인물로 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실제로 당시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은 개인의 성취가 공동체의 발전과 타인의 삶에도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이유로 유관순 열사를 추천하기도 했다. 미래 이프지 김신명숙 이사는 "오늘날 신사임당이 대변하는 '현모양처'의 이데올로기는 일본 식민통치의 잔재"라면서 "화폐 모델 선정만큼은 절대로 여론조사에 의존해선 안 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신사임당이 도안된 한국은행 5만원권
▲ 5만원권 지폐 신사임당이 도안된 한국은행 5만원권
ⓒ 한국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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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신사임당이 들어간 5만원 권 화폐는 발행되었고 지금도 통용되고 그 가운데 상당량은 시장에서 오고 가는 것이 아니고 부자들의 금고 속에 보관되고 있다. 신사임당의 여성 대표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우리의 화폐 모델을 보면 인물 선정의 편협함에 너무 화가 난다. 액면가액 순으로 신사임당, 세종대왕, 이이, 이황, 이순신까지 모두 조선시대 사람이다. 또한 모두 성씨가 '이씨'이며 신사임당도 '이씨' 집안 며느리다. 그리고 신사임당과 이이는 모자가 함께 후세의 화폐 모델로 기용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한다.

신사임당은 과연 화폐 모델의 선정기준에 맞는가?

한국은행에 따르면 화폐 모델은 업적이 위대해 국민에게 존경받아야 하고, 역사적 검증을 거쳐 논란의 소지가 없을 뿐 아니라 도안으로 쉽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5만 원권 도입 당시 한국은행의 한 관계자는 일반 국민이 가장 많이 추천한 유관순이 5만 원권에 못 실린 점을 아쉬워했다. 반대자들은 그가 요절했기 때문에 큰 업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 반대자들에게 다시 묻고 싶다. 신사임당은 48년의 생애 동안 과연 어떤 업적이 있었는가? 남편과 10년간 별거생활을 하며 남편의 외도에도 꿋꿋하게 견디며 아들과 딸들을 훌륭하게 교육한 것이 화폐에 실릴 만큼 업적이 위대하고 국민에게 존경받을 일인가?

역사적 인물에는 여러 가지 평가가 있을 수 있고 존경과 비판이 상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역사적 인물을 한 국가 경제의 얼굴이라고 하는 화폐 모델로 선정하는 경우에는 그 논란이 더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논란의 소지를 없애려고 지금까지의 인물을 그대로 두거나 일반 국민들이 가장 많이 추천한 유관순 열사를 두고 신사임당 같은 조선시대의 평범한 여성을 5만 권으로 도입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바꿀 수 있으면 바꿔야 한다

2030년이 되어 한 미국인이 한국에 여행을 와서 해리엇 터브먼이 도안된 미국의 20달러 지폐를 가지고 우리나라 한 청소년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고등학생이 질문한다.

"아저씨, 그 지폐의 모델은 어떤 인물인가요?"
"응, 흑인 노예가 있던 시절 노예해방운동을 하던 흑인 여성인권운동가 해리엇 터브먼이야."

이번에는 미국인이 우리나라 신사임당이 도안된 5만 원권 지폐를 들고 고등학생에게 묻는다.

"이 지폐에 있는 이 인물은 어떤 사람이니?"
"신사임당이라는 여성인물인데요.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서 시, 서, 화에 능하고... 그리고..."

물론 과장된 이야기고 만든 이야기이다. 하지만 지폐에 실릴 역사적 인물은 한 문장으로 설명이 가능해야 하지 않을까?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해리엇 터브먼과 한국의 여류문인화가 신사임당 중에 어떤 인물이 그 나라의 역사를 잘 표현해주는가? 그리고 여성독립운동가 유관순과 여류문인화가 신사임당 중에 어떤 인물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잘 표현하는가?

그리고 한가지 더! 대한민국 역사 인물 가운데 존경받는 인물은 "이씨"성을 가진 인물 밖에 없는가?


태그:#해리엇 터브먼, #20달러 지폐, #신사임당, #5만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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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에 행복과 미소가 담긴 글을 쓰고 싶습니다. 대구에 사는 시민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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