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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5년 2월 8일 미국에서 귀국한 후인 3월 5일 김대중의 모습.
 지난 1985년 2월 8일 미국에서 귀국한 후인 3월 5일 김대중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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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외교부가 공개한 1985년 외교문서가 화제다. 특히 그 해 2월 '김대중 귀국' 문제를 두고 이뤄진 한국 정부-미국 정부-김대중, 이 3 주체 사이의 논의와 행동은 한국 현대사 이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함의가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김대중 귀국'을 통해서 드러난 여러 사실들은 현재 한국 야당 정치의 앞 날을 고민하는 데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문서를 통해서 본 1985년 1월과 2월 상황

1985년 1월 18일 김대중은 성명서를 발표하여 2월 6일 미국을 출국해서 일본 나리타 공항을 경유해 2월 8일 서울에 도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번 문서에는 김대중의 성명 발표 이후 한미 양국 고위급 인사들 사이에서 이뤄진 논의 내용이 그대로 담겨 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의 초기 입장은 김대중이 귀국하면 재수감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미국 측은 우려를 표명하였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전두환 정권에 대한 압박 차원에서 그 해 4월에 예정되어 있던 전두환 대통령의 방미 계획 발표 연기를 검토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이에 전두환 정권은 한 발 물러나서 4월 방미 이후에 5월에 귀국하면 재수감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미국 정부에 전달했다. 미국 정부는 이와 같은 한국 정부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래서 이와 같은 중재안을 갖고 김대중을 만나서 귀국 연기를 설득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이를 거부하였고 원래대로 귀국을 강행하였다.

이 문서를 보면 각 주체들이 궁극적으로 관철하려던 내용을 알 수 있다.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의 귀국을 2월 총선과 4월 자신의 방미 이후로 미루고 싶었던 것이다. 미국 정부는 김대중의 신병에 관심을 두고 그의 재수감을 막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김대중은 공언한 대로 2.12 총선 전 귀국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왜 김대중의 귀국을 늦추려고 했나?

전두환 정권이 김대중에 대한 재수감을 시사한 것은 실제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기보다 협상카드의 성격이 강해 보인다.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의 망명 활동과 그 성과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고, 김대중이 귀국하겠다고 한다면 궁극적으로 이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2.12 총선을 앞두고 그가 귀국하는 것은 막고 싶었을 것이다. 선거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쉽게 이해된다. 그러면 4월 자신의 방미 이후까지 미루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전두환 정권은 자신들이 사형선고를 내린 김대중에 대해서 비이성적인 거부감과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전두환 정권은 본능적으로 김대중이 귀국하면 재수감 이외의 방식을 동원해서라도 그에 대해 억압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 귀국 이후 수시로 그를 가택연금 했다.

그런데 재수감이 아니어도 이미 국제적인 인물이 되었고 미국사회에도 잘 알려진 김대중에 대한 인권 탄압 조치는 국제적인 여론 악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 정권은 이와 같은 것이 방미 기간 중에 불거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대중 귀국을 4월 이후로 미루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 정부는 왜 그와 같은 입장을 내세웠을까?

외교부가 지난 17일 공개한 198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귀국 관련 한미의 막후협의 외교문서.
 외교부가 지난 17일 공개한 198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귀국 관련 한미의 막후협의 외교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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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를 보면 미국 정부의 근본적인 관심사는 '김대중에 대한 재수감 저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미국 정부는 왜 그와 같은 입장을 취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알기 위해서는 냉전시대 미국 대한정책의 기본적 성격을 알아야 한다.

냉전시기 미국 대한정책의 기본 방향은 동북아에서 대소 봉쇄를 위해 한국이 강력한 반공주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우익 권위주의 정권이 수립되어도 상관없다는 것이 미국의 태도였다.

그런데 미국이 우익 권위주의 정권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미국은 우익 권위주의 정권이 무리수를 두어 정권의 기반을 스스로 약화 시키는 행동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제어했다. 1973년 김대중 납치, 1980년 김대중 사형선고 등의 사건 이후 미국 정부가 김대중 구명을 위해서 노력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특히 1980년 광주 참상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미국 사회에서도 한국 정부의 인권탄압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강화됐다. 그리고 김대중이 망명생활을 하면서 한국 정부의 인권탄압을 미국 사회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미국 내 리버럴 세력들 중심으로 점증하는 한국 인권 문제에 대한 비판 여론을 미국 정부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기본 태도는 여전히 전두환 정권의 안정적 유지에 있었다. 이는 이번 문서에서 나온 미국 관계자들의 발언을 봐도 확인된다.

위와 같은 것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보면, 미국은 전두환 정권을 지지하기 때문에 전두환 정권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래서 '김대중 재수감 저지'에 정책적 목적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김대중은 왜 총선 전에 귀국하려고 했는가?

1983년 12월과 1982년 2월까지 이뤄진 김대중의 2차 망명은 김대중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1972년 10월 유신 직후에 한 1차망명은 반유신 투쟁을 위해 그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때는 1983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출소한 이후 강제출국을 당해서 이뤄진 타의에 의한 망명이었다.

그래서 김대중은 미국 도착 이후부터 미국 내 지인들을 상대로 한국 귀국 시점과 관련된 설문조사를 할 정도로 '귀국'을 염두에 둔 활동을 전개했다. 망명 도중 여러 활동을 전개했지만 특히 김영삼과의 관계 회복은 그의 귀국과 관련해서 새롭게 주목해야 한다.

1983년 5월과 6월 사이 김영삼이 23일간 단식투쟁을 하자 김대중은 이에 대한 지지활동을 전개했다. 이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복원되었다. 갈등과 경쟁으로 이어진 두 사람의 관계가 이 때 전격 복원된 것이다.

이것이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과 신민당 창당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당시 신민당은 김대중 귀국 직후 실시된 2.12 총선에서 관제 야당인 민한당을 크게 제치고 제1야당이 되었다.

김대중은 2.12 총선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선명야당인 신민당이 성공해야 민주화 세력의 구심점을 새롭게 구축할 수 있었다고 봤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민주화투쟁이 크게 확산되었다. 그와 함께 전두환 정권의 폭압적 성격에 분노한 학생운동권 사이에서 극단적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김대중은 이들의 깊은 절망을 위로하고 이들이 극단론에 빠지지 않도록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 자신과 같은 리더급 인사들이 새롭게 구심점을 구축해 민주화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대중은 전두환 정권의 협박과 미국 정부의 회유 및 중재에도 불구하고 2월 8일 귀국했다.

김대중 귀국, 지금 야당 정치에 주는 함의는 무엇인가?

우선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김영삼 사이의 연대를 부담스러워했다. 김대중의 귀국은 1983년 단식투쟁 이후 선명야당의 부활을 위해 국내에서 노력한 김영삼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김대중-김영삼 두 정치 지도자의 업적은 많은데, 그 중에서도 1985년 2.12 총선에서 신민당 돌풍을 일으킨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두 정치인은 그 당시에도 정치적 경쟁 관계에 있었지만, 힘을 합쳤고 이는 큰 효과를 발휘했다.

만약 1987년 대선에서도 동일하게 성공했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아마도 지금 한국은 훨씬 더 좋은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야권의 정치지도자들은 이 점을 명심해야만 한다.

그리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고 이들이 극단론에 빠지지 않도록 정치적 구심점이 되겠다고 한 김대중의 판단은 지금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물론 절망과 극단의 내용이 그 때와 다르지만, 지금 청년을 비롯해서 우리 사회 많은 구성원들이 겪는 고통은 매우 심각하기 때문이다.

정치와 사회가 사람을 위로하고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정신적 스트레스만 주는 것이 현재 우리의 현실이다. 이번 총선 결과는 이러한 깊은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절망이 폭발해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야당 정치인들이 이와 같은 사람들의 깊은 마음을 제대로 헤아린다고 할 수 있을까? 더민주-국민의당 두 당이 총선을 앞두고 보여준 모습을 본 필자는 이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이다.

그래도 여당보다는 낫다고 하여 야당에게 사람들이 표를 주었으니, 이제라도 야당 정치인들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고 이들이 극단론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귀국을 하겠다고 한 김대중의 정신을 제대로 계승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사회학 박사이며 김대중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태그:#김대중,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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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사료연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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