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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살겠다 갈아보자!"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던 1956년, 다가올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이 내건 구호는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갈아봤자 별수 없다'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의 맞대응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성난 민심이 철옹성 같았던 자유당 정권을 흔들었다. 60년이 지난 2016년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요구가 넘쳐났다. 여당인 새누리당은 총선에서 참패했다. 박근혜 정권은 위기를 맞은 것이다.

예측하기 힘든 결과에 새누리당은 경악했다. 더불어민주당이나 국민의당조차도 완전한 승리자라 할 수 없었다. 여야 정당 모두는 '민심의 무서움을 알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언론들도 다르지 않았다. '성난 민심' '앵그리 영 보트(성난 젊은 유권자)의 반란'이 박근혜 정부를 심판했다고 입을 모았다. 수많은 정치평론가, 여론조사 기관들은 빗나간 예측 앞에서 성난 민심을 읽지 못했음을 인정했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던 성난 민심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1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중앙선대위 해단식에서 20대 총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대표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 고개숙인 김무성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1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중앙선대위 해단식에서 20대 총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대표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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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누구보다 가장 놀란 건 유권자인 국민들이었다. 하루아침에 1당과 2당이 바꾸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주역· 4대강 예찬론자 등 이명박근혜 정권의 권력 실세들이 줄줄이 낙마했다. 약자에게 한없이 강한 존재였던 김무성 대표가 고개를 숙였고, 살아남은 자들도 지역주의와 여당의 프리미엄이 더 이상 철밥통이 될 수 없음을 절감했다. 한 장의 가치가 7000원 정도(20대 총선 유권자는 총 4018만 5119명으로 선거비용예산액에 유권자수를 나누면 약 7113원이 나온다) 라는 투표권이 거대 여당을 붕괴시키고 권력을 무릎 꿇릴 것이라는 예상은 유권자 어느 누구도 하지 못했다.

8년 전 대선에서 BBK 주가 조작 사건이 불거지자 당시 이명박 후보는 자기와는 관련 없음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후보의 거짓말에 속은 것이 아니라 747 정책으로 경제만 살릴 수 있다면 그 정도의 흠결은 눈감아야 한다고 유권자가 스스로를 속인 것이다.

후보자의 거짓과 유권자의 자기기만. 부당한 거래로 탄생한 정권은 당연한 듯 국민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다. 4대강·방송장악·FTA 체결에서 국민의 반대 목소리는 무시됐다. 경제난이 가중될 때마다 대출을 풀어 국민을 회유했고, 저임금 개선, 손쉬운 해고 개선 요구에는 세계 경제가 다 어려운데 징징 대냐고 눈을 부라렸다. 대통령과 정치권력은 점점 더 비대해져 갔고 정경유착은 기업이 잘돼야 국민이 잘산다는 논리로 점철됐다.

반면, 국민들은 빚내서 경제를 떠받치면서도 선거 때마다 이번에는 거짓 공약이 아닐 거라며 미신 같은 믿음으로 표를 몰아줬다. 이렇게 해서 이명박 정권과 닮은 박근혜 정권이 탄생했고 한나라당은 국민의 지탄을 받으면서도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는 퍼포먼스로 19대 국회에서 거대한 제1당을 차지했다. 지난 8년, 대통령과 정부 여당의 오만은 국민권력이 가진 힘을 망각하고 유권자 스스로 자기기만에 빠진 후과라 할 수 있다.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부터 시작된 일본의 불황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잃어버린 20년으로 불리는 경기침체는 국민들을 정치·경제적으로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아베 정권의 탄생은 일본 국민의 정치 무관심의 산물이다. 끊임없는 양적완화·군국주의의 부활·아베노믹스 정책이 잃어버린 20년의 탈출구가 될 것이라 하지만 빈부의 차이는 커지고 경제의 암흑은 더 짙어지는 모양새다. 그럼에도 아베정권의 지지율이 올라가는 기현상은 사실 4.13 총선 이전 우리의 모습이다.

정치적 무관심의 악순환 끊을 가능성을 보여줬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대위 대표가 15일 국회에서 열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대위 대표가 15일 국회에서 열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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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총선에서 가장 눈 여기 봐야 할 것은 여소야대나 제3당의 출현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이 국민권력의 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치권력·국회권력은 국민권력에 의해 선택되어지고 버려질 수 있음을 자각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정치 무관심이 혼용무도의 정권을 만들고 그 정권에 의해 정치·경제가 피폐해져 국민들이 무기력해지는 나쁜 순환. 일본의 이야기일 수는 있어도 대한민국은 악순환을 벗어날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거다.

정치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가장 고차원의 활동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인은 스스로 제 역할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존재다. 조금이라도 지지율이 오르면 군림하려 하고, 유권자의 감시가 소홀하면 옆길로 빠져드는 게 정치인의 나쁜 습성이다. 항시 감시하고 독려하고 언제라도 갈아치울 수 있다는 신호를 줘야만 정치는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정치인은 아나바다의 대상도 아니다.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아껴 쓰고 다시 쓸 필요도 없다.

총선은 300여 개의 부품을 점검하고 바꿔 끼워 4년을 달리는 국민버스와 같다. 지역주의에 현혹되고, 갈아봤자 소용없다는 허무주의 때문에 낡은 부품을 교체하지 못하고도 불량부품을 잔뜩 끼워 넣는다면 버스를 삐꺽거릴 수밖에 없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버스에 올라타야 하는 국민의 몫이다. 국회의원 노령화와 신인 정치인의 적체 현상만 보더라도 4년마다 찾아오는 총선은 다시 쓰는 것보다 바꾸는 게 우선되어야 한다.

20대 총선에서 유권자는 유권자 노릇을 제대로 했다. 바꿈이 익숙하지 않았던 보수 정당의 아성 대구와 부산, 경남의 선거 결과는 유신의 향수와 지역주의 종말의 전조라 할 수 있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노회한 권력들은 낙마와 신인 정치인의 입성은 폭정에 맞서는 민심의 시그널이 건재함을 보여주는 증거다. 유신의 그림자와 지역주의가 옅어지고 민심은 더 이상 정치권력의 독선을 방치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못살겠으면 대선도 갈아보는 게 정답이다

그러나 정치권력, 국회권력은 국민이 한눈을 팔면 금세 딴 짓을 한다. 지금이야 제1당이 된 더불어민주당, 제2당으로 추락한 새누리당, 국회에 새로 입성할 국민의당, 모두가 국민을 떠받들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지만 오롯이 믿을 것만 못된다.

새누리당은 벌써 반강제적으로 떠밀어낸 탈당 당선자를 영입해 몸짓불리기를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은 세월호 2주기 행사에 당 차원의 참석조차 없었다. 세월호 특별법의 약속을 믿어야 할지 의심스럽다.

20대 총선이 다음 대선의 전초전이라고 한다. 내년이면 대선이고, 올 하반기 정도면 대권을 향한 이합집산이 난무할 것이다. 다음 대선에서도 'MADE IN 새누리당' 후보를 택할지, 다른 선택을 할지는 오로지 유권자의 선택이다. 그러나 후보나 후보를 배출했던 정당의 흠결을 알고도 달콤한 공약에 박수를 보냈던 후과는 의외로 컸다.

지역주의, 유신의 향수에 묻혀 했던 선택의 고통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20대 총선. 유권자 스스로 놀랄 일을 했다. 7000원 가치의 투표권. 이것도 잘 쓰면 무소불위의 권력이다. 못살겠으면 이번 대선에서도 갈아보는 게 정답이다. 


태그:#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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