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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봉사자 최선 선생님의 지도에 맞춰 운동 전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
 자원봉사자 최선 선생님의 지도에 맞춰 운동 전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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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시간 많이 빼앗기지 않나요?"
"저 지금 공부하는 중이에요."

우문현답으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지난 16일, 고등학교 중간고사를 일주일 앞둔 날이었고 소위 특목고 학생이었기 때문에 던진 질문이었다. 조현경(부산국제외고 2학년) 학생은 봉사활동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서 '화난다'라고 답했다.

"어른들은 공부라고 하면 학교 공부만 생각해요. 학교 안에서 배우는 것이 있고 학교 밖에서 배우는 것이 있어요. 저는 지금 공부하는 중이에요. 그리고 이런 봉사활동을 하면 대학 가는 데 유리하냐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런 질문을 들으면 화가 나요."

먼저 밝히자면, 이 아이들은 작년까지 필자와 함께 교실에서 공부하던 제자들이다. 현재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퇴직한 상태이며, 이런저런 핑계로 그동안 한 번도 함께 하지 못했던 동백섬 봉사 활동에 취재를 구실 삼아 시각장애인 달리기 교실에 참여하였다.

오전 10시가 되자 동백섬 쉼터에 시각장애인분들과 자원봉사자분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지하철을 이용해 직접 오시는 분들도 있었고, 가족들과 함께 차량을 이용해 오시는 분들도 있었다. 교복과 체육복을 입은 부산국제외고 학생들도 이미 서로 얼굴을 익히고 있는 시각장애인분들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동백섬 입구에서부터 손을 잡고 팔짱을 끼고 쉼터로 걸어왔다.

부산시각장애인복지관(www.white.or.kr)에서 주관하는 '동백섬 달리기 교실'은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특히 2001년 결성된 부산지역 마라톤 동호회 '막달리자(http://cafe.daum.net/macrun)' 회원분들이 10년 넘게 함께 하며 트레이닝 코치를 맡아 주고 있다. 부산국제외고 학생들 또한 2008년부터 봉사동아리 '국제나누리'를 자발적으로 만들어 현재까지 봉사활동을 계속 이어오는 중이었다.

비장애인들에게는 간단한 동작이지만 시각장애인들에게는 혼자서 하기 힘든 동작들이 많다.
 비장애인들에게는 간단한 동작이지만 시각장애인들에게는 혼자서 하기 힘든 동작들이 많다.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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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빠짐없이 참석하시는 분들이 많다 보니 서로의 안부를 묻고 반갑게 인사를 한 후 운동 전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비장애인들은 가볍게 할 수 있는 동작들이지만, 시각장애인들은 혼자 하기 힘든 동작들이 많다.

"이 동작에서 봉사자들은 허리를 잡아주셔야 합니다. 봉사자분들 잘 보세요."
"봉사자분들의 손이 장애우분들보다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스트레칭을 지도하고 있는 최 선 선생님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거의 매주 빠짐없이 참여하여 시각장애인들의 운동을 돕고 있는 자원봉사자였다. 세세한 지도 덕분에 아직 서투른 초보 봉사자들도 별 어려움 없이 스트레칭을 마칠 수 있었다.

이날은 마침 부산광역시시각장애인복지관의 조명철 관장님도 참석하여 행사에 도움을 주시는 자원봉사자들과 시각장애인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평소 관에서 주관하는 행사에 나와 자기 소개로 연설하는 분들을 보면 불편함 마음이 있었는데, 조명철 관장님은 작은 인사도 부끄러워하며 시종 '고맙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고개 숙여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스트레칭을 마치고 달리기 교실을 시작하기 전에 물도 한 잔씩 마시고 짝을 이루어 나설 채비를 한다. 학교 수업이었다면 조를 이루고 명단을 정리했을 텐데 여기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알아서 짝을 이루고, 걷는 사람들과 뛰는 사람들이 서로 맞춰 나갔다. 처음 만나는 사이라 어색할 법도 한데 먼저 다가가 손을 잡고 인사하는 아이들이 기특하다.

"처음에는 사실 좀 어색했어요. 봉사활동을 많이 다녀보지도 않았고, 직접 어른들을 뵙고 같이 손잡고 걷는 것은 처음이었거든요. 그런데 장애인분들이 말씀도 따뜻하게 잘해주시고 편하게 해주셔서 어색한 게 금방 없어졌어요. 참, 저보다 길을 더 잘 알고 계셔서 깜짝 놀랐어요."

오늘이 두 번째 참가라는 김민하(부산국제외고 1학년) 학생이 말을 이어갔다.

"중학교 때에는 제대로 된 봉사활동을 할 기회가 없었어요. 봉사활동이 결국 숙제 같은 거여서 고등학교에서는 꼭 제대로 된 봉사활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어요. 그래서 학교에 입학하고 제일 먼저 봉사활동 동아리에 가입했어요. 이제 두 번째 나온 건데 진짜 좋아요."

'좋아요'라는 단어가 참 좋았다. 뭔가 이유를 설명하고 당위성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봉사활동이 하고 싶었고, 해보니 진짜 좋더라는 말에는 꾸밈이 없었다. 뭐가 좋은지 다시 묻는 것은 두 번째 우문이 될 것 같았지만, 현답을 기대하며 뭐가 좋은지 또 물었다.

"안색이 변했어요."
"불만이 없어졌어요."
"인생 상담을 해요."


봉사활동에 다녀오면 친구들이 얼굴색이 변했다고 이야기한단다. 그 전에는 늘 불만이 가득했는데, 봉사활동을 하면서 불만이 없어졌단다. 그리고 인생 상담을 한단다. 학교에 있으면서 아이들과 늘 상담을 했다. 그 자리에는 나는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돌이켜보니 얼굴이 뜨거워졌다. 공부, 수업, 대학 진학... 이번에는 내 안색이 변하는 것 같다.

"오늘은 바다 보러 가자."
"네~ 가요! 근데 저 길을 모르는데요..."
"그쪽 아니야. 이쪽이야."
"우와~ 저보다 길을 더 잘 아시네요."


이현지(부산국제외고 2학년) 학생이 출발 전에 장애인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이들에게 방향을 일러주는 시각장애인분들을 보며 앞을 보는 것과 길을 아는 것이 같은 의미가 아닌데, 우리는 늘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지도 배우고, 나도 배웠다.

부산마라톤 동호회 '막달리자'의 회원분들은 시각장애인분들과 함께 조깅을 한다. 옆에서 같이 달리며 호흡하는 것만으로 서로 방향을 잡고 앞서 걷는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고 달렸다.

비장애인들이 작은 도움을 나눌 수 있다면 시각장애인분들의 제약은 많은 부분에서 해소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작은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과 사회 체계와 제도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다르며 양쪽 모두 아주 중요한 문제들이다.

부산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시각장애인 마라톤대회도 개최하고 있었다. 시각장애인 사랑의 마라톤 대회는 매년 11월에 개최되며 시각장애인과 자원봉사자가 사랑의 끈을 이용하여 해운대 동백섬 순환도로를 달려 순위 및 기록을 측정하고 시상을 하는 대회 프로그램이다(문의 051-338-0017).

"봉사자들 어깨도 주물러 주세요!" 시각장애인 달리기 교실 참가자가 봉사활동에 나선 아이들의 어깨를 안마해주고 있다.
 "봉사자들 어깨도 주물러 주세요!" 시각장애인 달리기 교실 참가자가 봉사활동에 나선 아이들의 어깨를 안마해주고 있다.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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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과 함께하는 달리기 교실은 매주 토요일 10시부터 12시까지 동백섬에서 열린다. 함께 걷고, 함께 뛰며 땀을 흘린 참가자들이 처음 모였던 쉼터에서 마무리 스트레칭을 한다. 이번에도 최 선 선생님의 지도가 계속된다.

"마지막으로 어깨를 주물러 주세요. 이번에는 봉사자들의 어깨도 주물러 주세요."
"아악! 아파요."
"책상에 앉아서 만날 공부한다꼬 어깨가 다 뭉치삤네."
"우와~ 진짜 시원해요."


저쪽 벤치에서 김온유(부산국제외고 1학년) 학생이 할머니의 손을 꼬옥 잡고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가까이 가서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실례가 될 것 같아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무슨 대화를 했는지 물었다.

"비밀이에요~"

대화 내용은 모르지만 온유의 밝은 얼굴을 보니 마음이 또 환해진다. 이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면 세상이 지금보다는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학교와 사회가 아이들에게 경쟁을 가르치는 동안 아이들은 스스로 모여 나눔과 배려를 배우고 있다. 학교는 봉사 활동을 평가 기준에 넣으려 하지만, 아이들은 봉사 활동을 마음에 담으려 하고 있었다.

운동이 끝나고 오늘 행사에 참여한 분들에게 복지관에서 준비한 간식을 나누어 드렸다. 직접 줄을 서서 받아가시기도 하고 아이들이 연신 왔다 갔다 하며 간식을 전해드리기도 했다. 간식을 전해드리는 것에도 빠뜨리지 말아야 할 중요한 노하우가 있었다.

"이건 음료수고요, 이건 과자구요, 이건 떡이에요."

아이들이 장애인분들 옆에 앉아서 하나하나 손에 쥐여 드리며 알려드렸다. 한번만 알려드리면 바로 아신단다. 벤치에 앉아서 간식을 같이 먹기도 하고 가져온 가방에 담아드리기도 했다. 할아버지 보다 연세가 많은 할아버지와 손녀딸보다 나이가 어린 학생들이 마주 앉아 간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취재한답시고 다니며 사진을 찍고 메모를 하고 있는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오늘 진짜 고맙데이." "할아버지 건강하시고요 다음주에 또 뵈어요~"
 "오늘 진짜 고맙데이." "할아버지 건강하시고요 다음주에 또 뵈어요~"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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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마음을 열고 정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람들이 초라해진다. 사실 매주 토요일마다 두 시간을 내어 봉사활동을 하는 아이들이 참 특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자리에서는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시각장애인들은 특별하지 않은 조금 다른 사람들이었고, 자원봉사자들도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저 우리 주변의 이웃들이었다. 그리고 어린 학생들이었다.

준비해 둔 간식까지 나눠 드렸으니 행사가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자원봉사자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오신 분들을 위해 버스나 지하철 정거장까지 함께 걸어서 내려갔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뒷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했던 말이 떠올라 고개를 끄덕였다.

"저 지금 공부하는 중이에요."

분명히 오늘만큼은 이날 행사에 모인 사람 중에 내가 제일 많이 공부한 사람일 것이다. 부산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주최하는 달리기 교실은 매년 4월~6월, 9월~11월 토요일 오전 10시 동백섬에서 열립니다. 나눔은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태그:#동백섬, #자원봉사, #부산시각장애인복지관, #막달리자, #부산국제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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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란 저에게 아이들이 "선생님"이라고 불러줍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은 성실한 여행자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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