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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만 맛있다면 술기행은 불만이 없다.
 술만 맛있다면 술기행은 불만이 없다.
ⓒ 허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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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첫 번째 주말에 '막걸리 원정대'라는 이름으로 충북 청주로 29차 술 기행을 떠났다. 요즘은 술 기행을 바라고, 술 기행을 기획하는 곳들이 제법 생겼다. 나의 일정만 하더라도, 4월 두 번째 주말에는 코레일과 연계해 1박 2일 해남 강진 술 기행을 가고, 4월 세 번째 주말에는 부산막걸리학교에서 울산 포항으로 술 기행을 가고, 4월 다섯 번째 주말에는 <경향신문>에서 문경 찻사발 축제와 연계해 문경 술 기행을 가고, 5월 첫 번째와 두 번째 주말에는 강원도 관광주간 행사로 평창으로 발효기행을 떠날 예정이다. 

몇 해 전보다 술 기행이 좀 더 많아지고 쉬워진 것은 개방적인 양조장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양조장은 위생적으로 관리돼야 하기 때문에 발효실 안까지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꺼린다. 그래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술을 내주기는 하지만, 구경까지 시켜주기에는 쉽지 않다. 그런데 2013년부터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찾아가는 양조장 사업을 시행하면서, 전국에 18개 양조장이 선정되고 문을 열기 시작했다.

여행지는 여행객을 환대해야 발길이 이어진다. 힘겹고 고통스러운 여행도 있지만, 그것은 여행자 스스로 각오하는 것이지 타인이 제공하는 건 아니다. 찾아가는 양조장이 생겨나면서 굳이 설득하고 사정하지 않더라도 술 기행을 수월하게 갈 수 있게 됐다.

실내 가득 술 향기... 양조장은 이런 것

양조장 마당 항아리에 적힌 시.
 양조장 마당 항아리에 적힌 시.
ⓒ 허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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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청주에 있는 조은술 세종 양조장은 2015년에 찾아가는 양조장에 선정됐다. 찾아가는 양조장이 되기 전과 후의 모습은,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할 만큼 큰 변화를 겪었다. 이전 모습은 시멘트 마당에 철근 패널 구조의 2층 구조물이었다. 효율적으로 위생적으로 관리되는 어느 공단의 무미건조한 건물과 다를 바 없었다.

외부 손님이 오더라도 사장실 말고는 앉을 곳이 없었다. 그런데 찾아가는 양조장이 된 뒤로 담장에 기와지붕이 얹히고, 마당에 양조용 항아리가 도열해 있고, 사장실이 시음 홍보관으로 바뀌고, 견학 동선이 생겼다. 2층에는 4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체험 문화원까지 생겼다. 이전 공간이 '누구시죠? 왜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다면 새 공간은 '어서 오세요, 무엇을 보여드릴까요?'로 바뀌었다.

발효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경기호 대표.
 발효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경기호 대표.
ⓒ 허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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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음 홍보관을 거쳐 1층 제조장에서 막걸리가 빚어지는 공정을 살펴봤다. 막걸리를 병에 담는 밀폐된 공정실, 막걸리를 박스에 담는 포장실, 막걸리의 도수와 맛을 조절하는 제성 탱크를 보고, 창문을 통해서 발효실을 들여다봤다. 양조장에 안에 들어섰다는 느낌은 우리를 거대하게 휘감고 있는 술 향기만으로도 충분했다.

2층에 올라가 누룩을 만드는 방을 봤다. 보온과 냉각이 가능한 누룩 제조 장비가 있었다. 양조장에서 가장 세심하게 온도와 위생 관리를 하는 곳이다. 누군가 양조장을 방문하고 왔다고 했을 때, 얼마나 봤는지 재는 척도로 하는 두 가지를 묻는다. 하나는 진땡이라고도 부르는 원주를 맛보았습니까? 다른 하나는 누룩방의 따뜻한 온기를 느껴보셨습니까?라고. 우리는 조은술 세종에 와서 그중 하나, 누룩방의 온기를 느껴볼 수 있었다.

2층에는 대형 증류기가 있었다. 조은술 세종은 막걸리 양조장으로 시작했지만 2015년에 증류식 소주 '이도'를 상품화했다. 양조장 이름은 세종이고, 소주 제품명은 세종대왕의 이름인 이도다. 그래서 알코올도수도 42도로 맞췄다. 큰 인연도 없이 세종시가 세종 이름을 사용했다면, 청주시는 세종대왕과 인연이 있어 세종의 이름을 사용한다.

세종과 청주의 인연

조은술 세종에서 만든 이도 소주.
 조은술 세종에서 만든 이도 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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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 청원구에 세종대왕의 행궁이 있었던 초정 약수터가 있다. 세종대왕은 1444년 1월 27일 청주목 초수리에서 초수가 발견됐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당시 내섬시윤 김흔지를 파견해 행궁을 짓도록 했고, 그로부터 한 달여 뒤인 3월 2일 초수리 행궁에 당도했다. 세종대왕은 이곳 행궁에 두 차례에 걸쳐 117일간이나 머물렀다고 한다. 이를 기념해 청주시에서는 세종대왕과 초정약수 축제를 열고 있다.

증류주 시설을 구경하고서 2층 맨 안쪽에 자리잡은 체험 문화원으로 들어갔다. 뒤 벽면에 붙은 세계지도에는 각국의 대표 술들이 표시돼 있었다. 지도 옆으로 한국의 대표 술들도 전시돼 있었다. 한쪽 벽으로 길게 개수대가 설치돼 있어서 체험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게 해뒀다.

이날 우리는 주정계를 이용하여 증류주의 알코올 도수를 재봤다. 알코올이 얼마나 들어있느냐에 따라 액체의 부력이 달라지는 원리를 이용한 측정법이었다. 그리고 42도 이도 소주를 물과 혼합해 20도로 재조절해보는 실험을 했다. 그리고 우리가 기다리던 조은술 세종에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술들을 시음했다.  

지역 농산물과 연계한 세종의 발걸음

조은술 세종의 체험장.
 조은술 세종의 체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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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한 잔에 양조장의 지나온 날들이 담겨있다. 처음 맛본 술은 청주 생막걸리였다. 막걸리는 지역 기반 산업이다. 2000년 이전에는 생막걸리의 경우 시나 군 안에서만 팔도록 제한됐다. 생막걸리의 위생적인 관리를 위해서 지역 제한을 뒀는데, 냉장 시설과 유통 산업이 발달하면서 지역 제한이 풀렸다.

지역 제한이 풀리다 보니 양조장들끼리의 경쟁이 심해졌고, 그 와중에 청주의 막걸리 제조장들도 문을 닫고 말았다. 조은술 세종의 경기호 대표는 1997년에 막걸리 유통을 하면서 막걸리업계에 입문했는데, 청주에 양조장이 하나도 없는 게 아쉽고 지역 자존심도 상하는 일이기도 해 2007년에 양조장을 창업하게 됐다. 청주 생막걸리가 생겨난 배경이다.

조은술 세종의 인상적인 행보는 이천 임금님표 쌀막걸리, 민들레 막걸리, 우도 땅콩 막걸리, 유기농 막걸리로 이어지는 제품군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2010년 햅쌀 막걸리가 이름을 얻기 시작할 무렵에, 조은술 세종은 이천시와 연계해 임금님표 이천쌀 막걸리를 만들었고, 세븐일레븐 편의점을 통해서 판매했다.

이천시에서 이천쌀로 빚는 차별화된 막걸리가 필요했는데, 이를 구현해줄 양조장을 찾다가 조은술 세종과 연계됐다. 민들레 막걸리는 '4H(머리, 가슴, 손, 건강) 농민운동'을 했던 경기호 대표가 청원구의 민들레 작목반과 연계해 만들어낸 작품이다. 제초제를 뿌리지 않고 재배한 민들레와 왕우렁이쌀로 빚은 막걸리로, 지역 특산물을 이용한 차별화된 상품이었다.

지역 농산물과 연계된 상품 개발의 히트작은 우도 땅콩 막걸리다. 제주도, 특히 우도를 여행한 사람들은 우도 땅콩 막걸리를 맛봤을 것이다. 그 우도 땅콩 막걸리도 우도 땅콩 재배 농가와 연계된 제품이다. 지역 농산물과 연계하면서 새로운 막걸리 시장을 개척해가고 있다는 점에서 조은술 세종의 행보는 신선하다. 이는 농민운동과 막걸리 유통업을 했던 경기호 대표의 이력이 자연스럽게 녹아든 결과다.

하지만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 특산물 생산자나 유통업자와 연계된 주문제작은 자칫 독점권 논쟁이나 유사 상품 난립으로 이어질 수 있다. 모든 시장에 존재하는 위험 요소이지만, 종종 상품의 경쟁력을 높이는 쪽으로 기여하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우리가 맛본 조은술 세종의 최신 막걸리는 '유기농 막걸리'와 '대전 부르스'였다. 유기농 막걸리는 2015년에 충북 괴산에서 열린 세계유기농산업엑스포 대회를 위해서 만들어진 제품이다. 조은술 세종에서는 유기농 행사에 맞춰 유기농 막걸리뿐 아니라, 유기농 약주, 유기농 소주인 이도까지 함께 만들었다.

"이런 힘은 어디서 나올까?" 새 제품을 볼 때마다 경기호 대표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게 된다. 대전 부르스는 대전에서 막걸리 유통하는 이의 요청으로 기획된 제품이라고 한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요사이 주점에서 0시 50분까지 마시는 술로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주점 주인과 손님들이 대전 부르스의 노래 가락, <대전발 0시 50분>에서 꺼낸 이야기란다.

조은술 세종을 찾아간 게 오전 10시 반이었는데, 점심도 먹기 전에 우리 일행은 막걸리로 배를 채웠다. 하지만 밥배 다르고 술배 다르다고 하니, 양조장과 담장을 나눠 쓰고 있는 짜끌이 찌개집으로 이동했다. 돼지고기와 야채를 넣고 짜글짜글 끓여서 낸 요리인데, 집밥 백선생이 다녀간 뒤로 더 유명세를 타서인지 신발장이 비좁았다. 봄날 청주로 떠난 술기행의 정오는 조은술 세종의 막걸리와 짜글이 찌개가 함께 어우러져 짜글짜글 요란했다.

청주생막걸리와 짜글이 찌개.
 청주생막걸리와 짜글이 찌개.
ⓒ 허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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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세종, #조은술, #청주, #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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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평론가, 여행작가. 술을 통해서 문화와 역사와 사람을 만나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술문화연구소 소장이며 막걸리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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