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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스캔들>, <모던 보이>, <각시탈>, <암살>... 이런 시대극을 보다가 묘하게 어색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아예 전통 건축이나 현대 건물이 배경으로 나오면 그렇지 않은데, 서양풍의 근대 건물이 나오면 왠지 배경과 화면 사이에 빈 공간이 끼어 있는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300년 전보다 100년 전의 풍경이 더 흐릿하고 멀게 느껴진다. 화면에 연갈색 필터가 들어가면 노릇노릇 잘 익은 노을을 볼 때의 설렘도 일어난다. 어린 시절 유럽 소설을 읽을 때의 이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도 떠오른다. 정작 그 건물 안팎의 등장인물들은 살 떨리는 분노와 피 튀기는 저항의 식민지를 보여주는데도 말이다.

미쓰코시 백화점과 암살, 그 간극

일본인 거리 본정(명동), 출처 <사진엽서로 떠나는 근대 기행>
 일본인 거리 본정(명동), 출처 <사진엽서로 떠나는 근대 기행>
ⓒ 부산근대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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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협화음의 장면. 일본은 죽도록 싫어도 미쓰코시 백화점에서는 입이 딱 벌어졌던 사람들, 암울한 현실을 비관하면서도 경성역에 가면 들려오는 문명의 소리에 들떴던 사람들, 카페와 살롱에 모여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독립과 모더니즘을 읊어댔던 사람들. 그들에게 이상과 현실, 이성과 감성의 불협화음을 일으켰던 장소, 그 장소를 만들었던 사람들, 그 중에서도 조선인 건축가, 그들의 삶이 궁금한 적이 있었다. 그때 주변의 반응은 썰렁했다.

"뭐 볼게 있다고!" 
"그래봤자, 기술자. 그것도 식민지에서!"

그럴 수도 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 혹하는 사람이라면 정독도서관에서 볼 게 없을 수도 있다. 3차원의 비정형 비대칭 건물이 쑥쑥 들어서는 판에, 비례와 대칭에 충실한 수직 수평 건물은 한물간 고체 덩어리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럴지도 모른다. 당시의 일본건축은 서양건축을 모방하기에 급급했다. 그걸 따라 배우며 설계를 했다면 짝퉁의 짝퉁을 만든 셈, 식민지의 조선인 건축가는 기껏해야 B급일 테지. 혹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기술 덕에 먹고살만했을 사람들에게 뭐 그리 드라마틱한 인생사가 있을까.

그러나 한물간 건물도 첨단의 상징으로 주목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만한 이유도 있었다. 그 이유가 삶의 흔적이나 역사적인 장소성과 연결되면, 한물간 건물은 도시의 나이테를 드러내는 풍요로운 자산이 된다.

조선인 건축가는 앞도 뒤도 막힌 식민지에서 일제의 근대건축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에는 총독부를 비롯한 관공서 설계조직에서 실무를 했다. 토대가 다른 상황에서 그들의 설계를 서구 건축의 비평 잣대로 재어봤자 초라한 결론에 이르기 십상이다. 그들의 건축관을 자의식이 펄펄 살아있던 당대 서구 건축가의 아카데미즘과 비교하는 것도 공정한 게임이 아닐 것 같다. 차라리 그들이 처했던 조건, 식민지 근대(성)을 전제로 하면 그들을 좀 더 가까이 볼 수 있지 않을까.          

백년 전 경성에서 건축가가 사는 법

딱 100년 전이었다. 1916년 일제는 3년제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세웠다. 그곳에 근대건축교육을 실시했던 건축과가 있었다. 1922년에 경성고등공업학교(이하 경성고공)로 개편되었다가 일제 말에 다시 경성공업전문학교로 바뀌었다. 보통 경성공업전문학교를 포함해서 경성고공이라고 부른다.

건축 관련 학교는 경성고공 외에도 있었다. 이미 1907년에 공업전습소가 설립되었고,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전주공업학교, 지역별 직업학교나 공업보습학교가 있었다. 일본 유학생도 있었고, 드물지만 미국과 만주지역 학교 출신자도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건축 활동을 가장 활발하게 한 그룹은 경성고공 출신이었다. 경성고공은 국내 유일의 관립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졸업 후 진출분야도 확실했다. 총독부를 비롯한 관청과 철도국의 설계조직이었다. 당시 건축 공사 대부분이 관 주도의 공공건물이었으니, 경성고공은 학력과 취업을 모두 잡을 수 있는 곳이었다.

원래 경성고공은 조선인이 아니라 조선에 사는 일본인을 위한 학교였다. 당연히 일본 학생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건축과는 해방 전까지 졸업한 조선인이 60여 명에 불과했다. 신무성은 그 시절의 분위기를 이렇게 회상했다.

"일본인이 되라는 교육과 천대하는 대우....일인들의 우월감과 정복감 그리고 도대체 인간의 정상적인 대우가 전면적으로 결여되었다." ( '역사의 흐름 속에서', <건축>, 1975)

차별은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총독부 건축과에서 근무했던 유원준은 조선인의 승진이 어려웠고, 청부업자들도 조선인이 공사 감독을 하면 얕보았으며, 월급도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50%가 많았다고 한다. 

1910년대 조선은행(한국은행 본관) 일대, 출처<사진으로 보는 근대 한국>
 1910년대 조선은행(한국은행 본관) 일대, 출처<사진으로 보는 근대 한국>
ⓒ 부산근대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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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조선인의 관청 취업률이 높은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까지 민간의 건축 수요는 적었다. 건축 공사는 발주부터 설계, 감독까지 관청이 주도했다. 시공은 일본인 건설업자가 독점했는데, 조선인은 거의 채용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학교 선생의 추천으로 관청에 들어가는 것이 그나마 최선이었다. 일본인은 관청이든 민간 기업이든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까지 선택의 폭이 넓었다.

조선인의 승진은 기수까지였다. 총독부 건축조직은 직위가 위로부터 사무관, 기사, 기수, 촉탁/고원 순서였다. 사무관은 건축과 무관한 행정 관료로 동경제국대학 법과 출신이 많았다. 기사는 건축 실무 전반의 책임자였고, 기수는 각 프로젝트를 담당했다. 일본인과 달리, 조선인은 고원이나 촉탁에서 시작해서 기수까지 올라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조선인 건축가에게 기회가 온 것은 1920년대 후반부터였다. 1920년 회사령이 철폐된 이후 성장한 자산가,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개업하기 시작한 의사, 민족의 실력양성을 내세운 사립학교 인사들이 조선인 건축주로 등장했다. 마침 건축가들도 어느 정도 실무를 쌓은 후였다. 이래저래 조건이 맞아 떨어지면서 백화점, 사옥, 공장, 학교, 주택, 병원, 극장 등을 독자적으로 설계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식으로 설계사무소를 열었던 사람은 세명뿐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관직에 있으면서 부업으로 개인 설계를 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일본 유학생이 급증했지만, 일제의 침략전쟁과 경기 침체로 취업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결국 그들은 해방 후 민간 설계사무소나 교육계로 진출했다. 1930년대 후반을 기준으로 선후배 건축가로 나눠보면 차이가 있다. 교육환경과 진출분야의 차이는 해방공간에서 주류와 비주류, 좌익과 우익, 월남과 월북 등 다양한 갈등 양상을 드러냈다.     

왜 '친일' 건축가는 없을까

조선인 거리 종로, 출처 <사진으로 보는 근대 한국>
 조선인 거리 종로, 출처 <사진으로 보는 근대 한국>
ⓒ 부산근대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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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이야기이다. 언뜻 보면 일제의 차별 속에서도 근대 건축을 개척해나아간 성장사쯤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선인 건축가의 식민지 경험은 다른 보통 사람들과 거리가 있다. 당시에 건축은 돈을 많이 버는 직업에 속했다. 기술사 수첩이 있으면 징용을 면제 받고 군대 대신 군수산업체에 갔다. 관공서 건축직에 있으면 징병을 피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직장 안에서 설계했던 것은 일제의 지배와 수탈을 위한 건물이었다. 직장 밖에서 했던 설계는 해방 직후 반민특위에 회부된 사람들의 건물이 많았다. 

이쯤 되면 친일파 논란이 일어날 만하다. 건축계 안에서는 해방직후 좌익 성향의 후배 건축가들이 선배 건축가들을 비판했다. 하지만 잠시였다. 얼마 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좌익 건축가들이 월북을 하면서 잠잠해졌다.

건축계 밖에서는 건축주가 논란거리였지, 건축가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않았다. 대중적인 관심을 받을 만큼 건축가의 전력이 친일의 기준이나 활동 범주에 딱 맞아 떨어지지 않았다. 일단 겉보기에 그들은 매판 기업인도, 고위 관리도, 독립운동자 탄압에 적극 가담한 인물도, 전시체제 하에서 전시동원에 적극 협조한 인물도 아니었다. 건축가는 친일 범주로 분류된 관료, 경찰, 군인, 경제, 언론, 학술, 여성계, 법조, 문학, 음악, 미술, 종교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건축가에 대한 대중의 인식도 무시할 수 없다. 사람들에게 건축가는 정신적인 영향을 미치는 지사적인 이미지는 아니었다. 건축가는 전통 장인이 하던 일을 신식으로 하는 기술자 정도로 보였을 것이다. 문학가가 민족개량론을 말하면 공분을 사지만, 건축가가 재래주택개량론을 말하면 개량 방식이 관심거리이다. 그 밑에 깔린 민족개량론의 관점이나 오리엔탈리즘은 보지 않는다.

경성고공 출신의 총독부 건축가 중에는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사람도 있었다. 어느 프랑스 장군이 조선의 민가를 소외양간으로 오해한 사건에 자극받아 건축을 선택한 사람도 있었다. 일본에게 배운 건축으로 일본을 극복하려던 사람도 있었다. 전통을 망국의 원인으로 보고 모더니즘을 좇던 사람의 설계에 전통요소가 숨어있기도 했다.

그러니 그들 삶의 뚜껑을 열고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독립투사가 아닌 한, 투철한 신념이나 의식을 가지지 않는 한, 그 시대 사람들은 대개 친일과 저항의 꼭짓점이 아닌 그 사이의 무수한 회색지대를 살았다. 그 시대 건축가도 타협과 저항, 동경과 콤플렉스 사이에서 갈등하고 싸우고 변화하고 좌절하고 굳어졌다. 어쩌면 제국주의 시대 건축가와 신자유주의 시대 건축가의 내면에서 닮은꼴을 발견할 수도 있다. 어쩌면 오늘날의 건축 정책과 시스템, 건축의 가치가 100년 전과 별반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 식민의 흉터, 근대화의 상처처럼.


태그:#일제강점기, #경성, #근대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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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이 좋다. 길이 없지만, 내가 걸어가면 길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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