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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이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남편이 먼저 일어나더니 느닷없이 말했다.

"오늘 설거지 내가 할게."
"응? 뭐라고?"

난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남편 다시 한 번 물어봤다.

"오늘 저녁 설거지는 내가 한다고. 왜 싫어?"
"싫다니, 무슨 소리!"

그래도 나는 설거지를 한다는 남편이 믿기지 않았다. 설거지하는 남편의 모습을 살며시 훔쳐봤다. 아주 진지한 태도로 그릇을 닦고 있었다.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모른 척하면서 거실서 TV를 보고 있었다. 설거지를 마친 남편이 거실로 돌아온다.

"서방님 수고했어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해주니 남편은 조금은 멋쩍은 얼굴로 웃으면서 "응~~"이란다.

궁금했다. 평소엔 식탁에 수저와 물컵만이라도 놔달라는 부탁을 잊어버리기 일쑤였는데, 무슨 바람이 불어 설거지까지 할 마음이 생겼는지. 남편의 대답은 무척 듣기 좋았다.

"지난번 아들과 며느리가 함께 설거지를 하는 걸 보고는 그 모습이 좋아 보이기도 했고, 여태까지 내가 설거지를 한 번도 해줘본 적이 없어서 당신이 섭섭한 마음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

70살 앞둔 남편이 주방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남편이 주방에 섰다.
 남편이 주방에 섰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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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70세를 앞두고 있다. 그 나이대 남성들에겐 '남자가 주방에 들어가면 큰일 난다'는 인식이 강해 주방일을 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나 역시도 남편에게 설거지를 해달라는 말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이가 들면서 남편이 주방일을 너무 몰라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수저랑 물컵이라도 놔줬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그러다 보면 주방과 친해지고 범위가 조금씩 넓어질 것이란 계산이었다. 내가 없을 때 밥을 찾아먹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발전이란 생각을 해봤다.

밥을 한다거나 설거지를 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아들과 며느리가 설거지를 한다고 해서 남편이 그런 생각을 했으리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난 남편에게 "갑자기 그런 마음이 왜 들었을까?"라고 물었다. 남편은 답했다.

"아들도 여태까지 설거지를 안 했었잖아. 그런데 장가가더니 달라진 모습이 다르게 보이더라고. 지 아내 지가 위하는데, 난 내 아내한테 해준 적이 한 번도 없었잖아. 나도 모르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러고 보니 아이들이 설거지를 할 때, 남편은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때 나는 "그러게, 아들도 장가 보내면 다 소용 없다더니, 그 말이 꼭 맞아, 아들 결혼시키면 해외동포로 생각하라더니 틀린 말이 아니라니까"라고 말했다. 그때 남편도 웃었다.

남편의 설거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었네

남편의 설거지 실력은... 상당했다.
 남편의 설거지 실력은... 상당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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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뒤로도 남편은 밥을 다 먹고 나면 반찬 그릇을 냉장고에 자주 넣어줬다. 그뿐만 아니었다. 사실 나는 설거지도 일회성 이벤트로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평일 저녁에 설거지를 미뤄놓고 다른 일을 하고 있으면, 남편은 슬며시 주방에 들어가 설거지를 하곤 했다. 그러면서 "이러다 버릇 되는 거 아닌가 몰라" 혼잣말을 했다. 나는 못 들은 척했다.

그러더니 지난 13일 성당 갈 시간에 늦어 밥만 먹고 설거지를 못한 채 집을 나섰다. 미사가 끝나고 집에 와보니 깨끗하게 설거지가 돼 있었고(심지어 나보다 더 깨끗하게 해놨다), 주방 정리정돈이 잘 돼 있었다. 행주도 뽀얗게 빨아 널어놨다. 난 고마워서 "설거지 내가 하려고 했는데…, 정말 깨끗하게 잘해놨네, 수고했어요"라고 말해줬다. 고마운 마음에 따끈한 대추차를 끓여서 한잔씩 마셨다.

"그렇게 잘하는 사람이 그동안 왜 한 번도 안 했어?"
"군대 갔다 온 남자라면 다 잘해. 아들도 군대 갔다 와서 그렇게 하는 거야."

아들은 호주에서 1년 동안 혼자 생활을 해서 마음만 먹으면 잘할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었다.

남편이 변한 모습이 낯설긴 하다. 남편이 설거지하는 동안 가만히 있는 내 모습도 낯설기는 마찬가지. 그런 반면 마음 한구석에선 '남편이 늙기는 늙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짠해졌다.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씩 남편이 주방일을 한다면 그보다 더 고마울 수는 없을 것이다.


태그:#남편이 달라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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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사는이야기를 씁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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