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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복 11시간. 주행거리 700km. 2박 3일 강원도 여행이 남긴 기록이다. '뭐야, 이런 시답잖은 내용을 가지고 여행기를 쓰겠다고? 나도 얼마 전에 그렇게 다녀왔는데…'라면서 당혹스러워 하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걱정마시라. 이번에는 내비게이션(아래 내비)을 떼놓고 떠나는 여행기다. 차 떼고 포 떼고 두는 장기에 넘겨볼 맛이 있고 훈수 두는 재미가 있는 법이니까.

자동차 내비가 한 달 전부터 먹통이었다. 출퇴근용으로만 주로 사용하다보니 특별히 불편한 것도 없고, 고치러 갈 시간 내기도 애매해서 그대로 방치했다. 타고난 기계치란, 기계를 다룰 줄 모르는 것 이상으로 기계에 관심조차 없는 이를 말한다. '언젠가 고치겠지' 하는 마음으로 지켜보다가 마침내 가족들과 강원도 여행을 가기로 한 날(2월 28일)이 다가왔다.

여느 집 같았으면 난리가 났을 게다. '도대체 그동안 뭐했냐고!'부터 시작해서 '저런 인간을 믿고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겠느냐'는 회한의 한숨까지 여행 전 기분을 초치는 데 이만한 이벤트가 있으랴. '내비' 없는 2박 3일 초행길. 하지만, 긍정적 사고로 뭉친 우리 집은 체념이 빠르다. 새로운 콘셉트의 여행인 걸, 10년 전만해도 '내비' 없는 집이 더 많았다고, 어째 모험을 떠나는 기분이야. 긍정과 무대책은 종이 한 장 차이다.

혹자는 스마트 의 길 찾기 앱을 이야기할지 모른다. 두 달 전에 스마트폰에서 탈출한 내게 '앱'이란 단어는 이미 잊힌 지 오래다. 아내의 최저가 요금제 데이터는 사막 위의 물병과도 같아 늘 바닥에서 찰랑거렸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지도 들고 '국도(지방도로) 대장정'을 떠나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 속에 가물거리는 제대로 된 아날로그 여행 말이다.

그래, '국도대장정'이다!

네비게이션의 도움 없이 지도만 들고 떠난 강원도 여행
▲ 지도 들고 떠나는 강원도 여행 네비게이션의 도움 없이 지도만 들고 떠난 강원도 여행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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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전날 밤, 지도를 펼쳤다. 예전 같았으면 차에 한두 권 정도는 비치해뒀을 '대한민국관광지도' 책은 요즘 흔히 보기 힘든 아이템이다. 캠핑 가이드북에 끼여 나온 지도 한 장을 어렵게 구했다. 색연필로 선을 주욱 그었다. 이렇게 가서, 요렇게 갔다가, 저리로 돌아오면 되는 거야. 뭐 별로 어려울 게 없지. 아내는 나의 의기양양한 말투에 반신반의한 표정을 지으며 잠이 들었다.

드디어 출발이다. 전날의 자신감과는 달리 슬슬 걱정이 몰려온다. 목적지인 정동진까지 대여섯 시간의 거리를 지도와 이정표만으로 찾아간다니. 원래 운전에 소질이 있고, 드라이브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느낄 수도 있으나, 서두에 밝혔듯이 나는 천성이 기계치라 기계와 오래 붙어 있는 걸 싫어한다. 긴 여행이 될 것이란 예감이 엄습했다.

네비게이션이 고장난지 한 달이 되었다. 이리저리 미루다 결국 고장난 네비게이션을 달고 여행을 떠났다.
▲ 고장난 네비게이션 네비게이션이 고장난지 한 달이 되었다. 이리저리 미루다 결국 고장난 네비게이션을 달고 여행을 떠났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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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에서는 문제될 게 없었다. 그저 빠져나갈 나들목만 잊지 않고 통과하면 되고, 규정된 속도만 정확히 준수하고 유지하면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으니까. 이론대로라면 말이다. 하이패스를 통과하고부터 거의 10분 단위로 "다음 IC가 뭐지?"라고 물어댔다. '내비' 덕택에(?) 이정표 보는 데 익숙하지 않은 데다, 속도계를 주시하며 운전하다 보니 이정표가 머리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럭저럭 영주 나들목을 빠져나와 본격적인 국도 기행이 시작됐다. 36번 국도를 타고 봉화를 거쳐 울진까지 가는 1차 관문이었다. 중간 중간 갓길에 차를 세우고 지도상에서 위치를 파악하며 더듬어 갔다. 아침부터 뿌옇던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내 빗방울이 떨어졌고, 빗줄기는 거세졌다. 내비 없는 초행길에 빗길운전이 시작된 것. 장시간 운전에 지친 아내와 아이들은 잠든 지 오래고, 쓸쓸하고 고독한 수행의 길이 시작됐다.

'길잡이' 없는 상태에서 대설특보... 여행 접어야 하나

정동진에 도착하자 비가 눈으로 바뀌었고, 점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눈보라로 변했다. 여행을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 정동진 대설특보 정동진에 도착하자 비가 눈으로 바뀌었고, 점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눈보라로 변했다. 여행을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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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로만 보고 멋진 해안도로를 기대하며 선택한 울진을 거쳐 가는 국도 길은 나의 생각과는 달랐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듯한, 파도가 '철썩' 치면 도로까지 바닷물이 흩뿌려지는 그런 운치 있는 도로가 아니었다. 그냥 가끔 바다가 힐끗 보이는 해안 옆에 위치한 도로가 7번 국도의 본질이었다. 빗길에 전방주시를 놓칠 수 없기에 더더욱 바다 보기는 힘들었다.

눈에 익지 않은 지명들 가운데 목적지와 관련된 곳만 매직아이처럼 잡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나라 도로의 이정표는 생각보다 잘 돼 있다. 삼척시내에서 한 번 길을 잘못 들었던 것을 제외하고, 출발한지 다섯 시간 만에 간신히 정동진에 도착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나오니 빗줄기가 눈발로 바뀌었다. 내리는 눈이 범상치 않았다. 나중에 숙소에 고립되고 나서야 강원 지역에 대설특보가 내린 걸 알았다. 여행을 포기할까 망설였다.

강원도 시골 도로변의 설경. 흰 눈과 나무와 하늘빛의 조화가 너무 아름답다.
▲ 강원도 국도변 풍경-1 강원도 시골 도로변의 설경. 흰 눈과 나무와 하늘빛의 조화가 너무 아름답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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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만 오면 도로가 마비되는 경북과는 달리 깔끔하게 제설작업이 된 강원도의 지방도로
▲ 제설작업이 잘 된 강원도의 시골 도로 눈만 오면 도로가 마비되는 경북과는 달리 깔끔하게 제설작업이 된 강원도의 지방도로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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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3월 1일) 아침, 맑게 갠 하늘은 딴청부리는 아이와 같았다. 그렇다고 상황이 달라진 건 아니다. 빗길이 눈길로 바뀐 것뿐이다. 꽃샘추위로 전국이 영하권으로 떨어졌다. 빙판길이 된 도로 위에서 '네비'없이 이리저리 미끄러질 슬픈 내 영혼이 떠올랐다. 둘째 날 목적지인 용평리조트로 떠나는 발걸음이 물먹은 택배상자만큼이나 무거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강원도의 제설 작업은 단연 돋보였다. 길을 잘못 들어 동해 고속도로를 타기 전까지 시골 국도를 한 시간 쯤 달려야 했는데, 눈이 얼어붙은 곳이 거의 없었다. 이는 3일째 진부에서 정선을 거쳐 영월로 향하는 도로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한두 군데 공사하는 곳을 제외하고는 도로가 깨끗하게 제설작업이 돼 있었다.

운전하던 차를 멈추고 내려서 한참을 보게 만드는 풍경이다.
▲ 눈덮인 산 아래 시골 마을 정경 운전하던 차를 멈추고 내려서 한참을 보게 만드는 풍경이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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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성을 자아내는 알프스도 울고 갈 강원도 설경
▲ 도로 양 옆으로 펼쳐진 강원도 설경 탄성을 자아내는 알프스도 울고 갈 강원도 설경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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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국도 주변의 설경을 담기 위해 반대편 차선의 가드레일을 넘다 발을 헛디뎠다. 민망한 부위의 외상이 있어, 지금도 의자에 앉기가 좀 힘들다. 그 장면을 제때 잡아내준 아내의 프로정신에 감사한다.
▲ 설경을 담기 위해 강원도 국도 주변의 설경을 담기 위해 반대편 차선의 가드레일을 넘다 발을 헛디뎠다. 민망한 부위의 외상이 있어, 지금도 의자에 앉기가 좀 힘들다. 그 장면을 제때 잡아내준 아내의 프로정신에 감사한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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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눈 쌓인 주변 경관은 여행 최고의 선물이었다. 진부에서 정선까지 오대천에서 이어지는 수항계곡을 왼쪽에 끼고 가는 도로는 중간에 차를 몇 번이나 세우도록 만들었다. 눈 덮인 시골 마을 풍경부터 도로를 감싸는 눈꽃 길에, 처마에 매달린 아이 키만한 고드름까지 돈 주고도 못 볼 광경들이 끝없이 펼쳐졌다. 차 댈 곳이 마땅치 않아 사진에 담지 못한 설경들이 훨씬 많았다. 그냥 찍기만 해도 달력 그림이 되는 강원도였다.

물론 설경을 감상하는 데 희생도 따랐다. 너무도 멋진 백두대간의 모습에 차를 세우고 반대편 차선의 가드레일을 뛰어넘었다. 아니, 뛰어 넘고 싶었다. 가드레일 높이와 나의 다리길이 차이를 잘못 계산한 채 의지만 가지고 넘었다가 착지 지점의 눈밭에 한쪽 다리가 빠지면서 민감한 부분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집에 와 살펴보니 엉덩이 주변이 온통 피멍투성이다. 함부로 흉내내지 마시라.

내비의 빈자리를 차지한 것들

지도와 이정표만으로 길을 찾아가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 이정표를 따라 가는 강원도 여행 지도와 이정표만으로 길을 찾아가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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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가 없었던 탓에 국도를 선택한 여행의 방향성이 폭설과 맞아떨어지며 예상치 못한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옆에서 연신 셔터를 눌러대던 아내도 "국도 대장정 하기를 참 잘했다"라면서 절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산과 강으로 둘러쌓인 예쁜 마을 정선에서 곤드레밥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영월까지 오는 길에도 눈의 아름다운 환송은 계속됐다.

내비게이션은 우리에게 편리함을 안겨준다. 반면, 동물적 방향 감각과 인간 특유의 모험 정신은 빼앗아 갔다. 네비의 안내대로 고분고분 말을 들으며 운전하던 습관은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의 성취감마저 상실하게 만들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기계 위에 존재하는 인간의 위대함을 새삼 깨우쳤다면 과대망상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내비를 버리니 그 자리에 훨씬 소중하고 아련한 것들이 채워지더라는 것이다.


태그:#강원도 여행, #정동진, #네비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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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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