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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화 국회의장의 테러방지법 직권상정

지난 23일 정의화 국회의장이 국회 본회의에서 테러방지법을 직권상정했다. 대한민국의 현 시국을 국가비상사태라고 판단하고 국회법 85조에 따라 테러방지법안을 직권상정한다는 것이다.

야당은 즉각적으로 반발했다. 지금은 국가비상사태가 아니기에 국회의장에게 직권상정을 할 권한이 없고, 법안의 실상이 국정원과 권력에 거대한 힘을 실어주는, '테러방지법'이라는 이름의 탈을 쓴 '전국민감시법'이기 때문이다.

직권상정의 무효 논란이나 테러방지법의 독소조항을 일일이 언급하며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 부분에 대해 국민은 이미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지난 9일간 진행되어 온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국회의원들의 필리버스터 덕분이다.

야권의 반응은 그야말로 사.이.다.

국회의장에 의해 직권상정된 테러방지법을 막기 위한 야당의원들의 무제한토론(필리버스터)이 1주일째를 맞이한 가운데 29일 오전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 많은 시민, 학생들이 방문해 방청하고 있다.
 국회의장에 의해 직권상정된 테러방지법을 막기 위한 야당의원들의 무제한토론(필리버스터)이 1주일째를 맞이한 가운데 29일 오전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 많은 시민, 학생들이 방문해 방청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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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화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이후 국민은 또다시 익숙한 절망에 빠져 들었다. 새누리당의 불법함과 그를 막지 못하는 야당의 무능함은 이미 지난 기간 충분히 체험하고 있는 터였다. 국민 스스로 헬조선이라 자학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번 테러방지법 직권상정 이후에 보여준 야권의 태도는 달랐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108명 국회의원 전원 명의로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신청한 것이다. 이전의 새누리당의 횡포에 무기력하게 끌려가기만 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필리버스터 안을 들고 나와 국민에게 한 번 제대로 싸워보겠다는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야당다운 야당의 모습이었다.

우리나라처럼 국회와 정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국가가 있을까. 많은 국민에게 정치란 불신의 대상이요, 무관심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일시에 불식시켜준 것이 바로 의원들 자신이었다. "여기 국회의원 있어요"라고 그들은 그렇게 국회 본회의장 연단에 서서 외치고 있었다.

국민은 국회의원들과 함께 역사적 시각에서, 문학적 시각에서, 경제학적 시각에서, 정치학적 시각에서, 법률적 시각에서 때론 의원 개인의 경험을 투영하여 테러방지법과 대한민국 현실정치를 공부했다. 국회 연설이 아닌 수준 높은 강연들이었다. 지루하지 않았고, 오히려 행복했다.

이후 며칠 밤을 새었을까. 많은 국민이 잠잘 시간을 줄여가며 국회방송을 통해 의원들의 발언을 경청하고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국민들이 '마국텔(마이 국회 텔레비전)'이라는 애칭을 붙인 국회방송은 한밤을 넘어 새벽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에도 3만 명이 넘는 실시간 시청자 수를 기록할 정도로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국민은 경청을 하고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는 소극적 지지에서 끝내지 않았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찾아 적극적으로 의원들을 응원했다. 필리버스터 참여 의원들을 응원하는 페이지를 만들거나 온라인과 SNS상에서 뜨거운 지지선언을 보내거나 직접 국회 본회의장 견학을 하는 등의 방법으로 필리버스터에 참여했다.

이번 필리버스터는 정치에 대한 국민의 목마름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많은 국민들이 얼마나 정치에 대해 사이다처럼 톡 쏘는 시원함을 기대했던가.

국민은 국회에서 숨겨진 보석들을 발견했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23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테러방지법을 직권상정하자, 더불어민주당 김광진 의원이 본회의 의결을 막기 위해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을 하고 있다.
▲ 김광진 의원, 테러방지법 반대 무제한 토론 정의화 국회의장이 23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테러방지법을 직권상정하자, 더불어민주당 김광진 의원이 본회의 의결을 막기 위해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을 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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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 이번 필리버스터를 통해 국민은 비정상적인 언론 환경에 묻혀 미처 알지 못했던 보석들을 발견했다.

김광진, 문병호, 은수미, 박원석, 유승희, 최민희, 김제남, 신경민, 강기정, 김경협, 서기호, 김현, 김용익, 배재정, 전순옥, 추미애, 정청래, 진선미, 최규성, 오제세, 박혜자, 권은희, 이학영, 홍종학, 서영교, 최원식, 홍익표, 이언주, 전정희, 임수경, 안민석, 김기준, 김관영, 박영선, 주승용, 정진후, 심상정, 이종걸 국회의원 등이 그들이다.

이들이 정치 변화의 희망이다. 이들의 발언은 국회의원 개인의 발언만은 아니었다. 이들과 함께 '내가' 뛰고 있었다. 이 불합리한 사회 속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는 절망에 빠져 있는 많은 국민들이 의원들에 자신을 투영해 대리전을 치르게 하고 있었다. 이것이 필리버스터에 열광한 국민의 내심이었다.

그런데 지난 2월 29일 밤 11시경 뜻밖의 소식이 들려온다.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회의결과에 따라 필리버스터를 중단하겠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더불어민주당 소속의원들조차 모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국민의 민심이 들썩였고, 실로 간만에 정치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던 국민들은 분노했다. 필리버스터 중단 과정의 절차와 그것의 공표 과정, 중단 사유가 모두 국민을 설득하지 못 했다. 세련되지도 못 했고, 민심도 읽지 못한 정치 행보였다.

필리버스터는 더불어민주당의 선택사항이 아니다

국회의장에 의해 직권상정된 테러방지법을 막기 위한 야당의원들의 무제한토론(필리버스터) 8일째인 1일 오후 국회본회의장에서 필리버스트를 하던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여당과 거대정보기관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필리버스터를 중단할 수 밖에 없다" "과반 의석을 주시면 국민여러분이 원하는 젊은이들에게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눈물 흘리는 박영선 의원 국회의장에 의해 직권상정된 테러방지법을 막기 위한 야당의원들의 무제한토론(필리버스터) 8일째인 1일 오후 국회본회의장에서 필리버스트를 하던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여당과 거대정보기관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필리버스터를 중단할 수 밖에 없다" "과반 의석을 주시면 국민여러분이 원하는 젊은이들에게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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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일 저녁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국회의원이 필리버스터 33번째 주자로 등장했다. 박 의원은 지난 2월 29일 비상대책위원회에서 이종걸 원내대표에게 가장 강력하게 필리버스터의 중단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 의원은 자신의 필리버스터 발언 중 더불어민주당의 필리버스터 중단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며 "국민들의 마음 속 노여움을 내가 다 안고 가겠다. 나에게 분노의 화살을 쏘십시오"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거대 공룡 정보기관이 파놓은 이념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일견 그의 말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박 의원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이번 필리버스터는 흔한 '이념 프레임' 싸움이 아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국민과 무도한 새누리당, 국민과 불법한 정보기관, 국민과 무능한 청와대의 싸움이었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다만 국민의 싸움에서 대리전을 치르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의 동의가 없는 한 이것을 끝낼 자격이 없다. 그것은 오로지 국민들만이 멈출 수 있는 것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의 오판이었다.

국민은 지속적으로 민의를 벗어나 잘못된 판단들로 일관하는 더불어민주당과 박영선 의원의 교만에 이미 너무 지쳐있다. 박 의원이 자신에게 분노의 화살을 쏘라고 했던가. 이제 국민은 분노의 화살을 쏘기를 원하지 않는다. 민의를 읽지 못하는 대의기관은 교체하면 그만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소수 야당인가

더불어민주당이 이종걸 원내대표의 발언을 끝으로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 종결한다고 밝힌 가운데, 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 김종인 비상대책위 대표가 참석해 야권 통합을 제안하고 있다.
▲ 야권 통합 제안한 김종인 더불어민주당이 이종걸 원내대표의 발언을 끝으로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 종결한다고 밝힌 가운데, 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 김종인 비상대책위 대표가 참석해 야권 통합을 제안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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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이 부당한 법안을 밀어붙일 때마다 더불어민주당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말이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소수 야당이라 막을 힘이 없다"며 "이를 막기 위해 더불어민주당을 다수당으로 만들어 달라"는 말이 그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소수 야당이 아니다.

108석의 국회 의석을 가진 정당이 소수 야당이기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그 당을 다수당으로 만들어 기회를 줄 것이 아니라 모든 의석을 박탈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108석이나 되는 의석을 만들어준 국민을 무시하는 발언이다. 개인 한 사람이 헌법기관씩이나 되는 이들이, 국민이 108석 밖에 안 만들어줘서 우리가 못 싸우고 있다고 '땡깡'을 부리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금보다 더한 정치 환경 속에서 70석도 안 되는 의석으로 한국 정치에 큰 족적을 남겼다. 싸워야 할 때 제대로 싸울 줄 아는 투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명심하라. 현재의 더불어민주당은 표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능력이 없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발언은 단 5명의 국민의원을 가지고도 분전하고 있는 정의당과 같은 진보정당에게 백배사죄해야 하는 일이다. 새누리당에 맞서야 한다며 매번 사표 논리를 앞세워 진보정당에게 가야할 표까지 빼앗아가던 더불어민주당이 아니던가.

김대중-노무현의 정치가 그리운 밤

결과적으로 테러방지법을 막아 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야당의원들이 단 한 번만이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끝까지 처절하게 싸우다 멋지게 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는 것, 그것이 민심이었다는 것을 더불어민주당은 깨닫지 못했다.

지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한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신뢰가 만들어지고 야권의 표가 결집되며 다음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스토리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총선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필리버스터를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완주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고 "이의 있습니다"를 외쳤을 때에야 비로소 민심이 깨어나 진동하고, 바닥에서부터 큰 바람이 불어 올라와 정치를 한 단계 성장시켰다는 것을 더불어민주당 지도부는 깨닫지 못 하고 있다.

유이했던 승리의 경험이 이제는 고인이 되신 두 대통령 김대중, 노무현이었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은 아래로부터 자발적으로 불어온 바람이 붐을 타고 정치판 자체를 흔든 혁명적인 승리의 기록이었다. 현재 미국에서 불고 있는 버니 샌더스 열풍을 우리는 이미 2002년에 겪어보았다. 그러나 두 분이 돌아가신 지 벌써 햇수로 8년째인데도 우리는 별반 승리의 경험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노무현이 열풍을 타고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부당한 것에 대해 언제나 '이의 있습니다'를 외치는 자신의 스토리를 만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의 이번 필리버스터가 국민에게는 어떤 스토리로 기억될까.

이제는 노무현의 시대를 벗어나 국민의 희망이 되고, 국민을 자발적으로 깨어 움직이게 하는 새로운 정치인, 혁신적인 정당이 필요한 시기이건만 아직도 돌아가신 분의 그림자만 밟으며 옛 향수에 기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국민은 언제까지 옛 승리의 기억을 되새김질 하며 버텨야 하는 것일까.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정의당 정진후 국회의원이 필리버스터를 이어가고 있다. 정 의원의 발언이 끝나면 이후 발언자는 정의당의 심상정 당대표와 더불어민주당의 이종걸 원내대표만이 남는다. 두 의원의 발언이 끝나는 순간 필리버스터도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리고 국민의 희망도 막을 내린다.

정치공학은 빛나고, 민심은 절망의 구렁텅이 빠지는 밤이다.


태그:#필리버스터,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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