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해인사다운 현수막
 해인사다운 현수막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주차장과 상가 일대, 그리고 성보박물관 앞뜰을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넌다. 진입로 일대가 아주 어수선하다. 해인사 들어가는 길목이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 싶어 당혹스럽다. 이곳은 최치원이 머물다가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는 홍류 계곡인데, 후대인들의 물욕 때문에 아주 볼품없이 되고 말았다.

지금은 차량 통행만 허용하고 있는 예전의 길이 훨씬 더 운치가 있다. 과연 (걷는) 사람보다 차량(에 탄 사람)이 우위에 있는 기이한 세상이 되고만 것인가. 탄식을 하며 걷노라니, 왼편의 인도와 오른편의 차도가 다시 만났다가 헤어지는 지점에 걸린 현수막 하나가 눈길을 끈다. 팔만대장경보존회가 "5000원으로 팔만대장경의 주인이 됩시다" 하며 후원회원을 모집하고 있다. 진정 팔만대장경을 보관 중인 사찰다운 현수막이다.

해인사 경내의 길에는 가야산의 초목 등에 대해 설명한 안내판들이 많이 세워져 있어 아주 '교육적'이다.
 해인사 경내의 길에는 가야산의 초목 등에 대해 설명한 안내판들이 많이 세워져 있어 아주 '교육적'이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길을 따라가며 세워져 있는 아기자기한 안내판들이 귀여우면서도 뜻깊다. 그중 '죽은 나무도 소중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안내판 하나는 "죽은 나무는 여러 생물들의 안식처가 되고 먹이가 되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죽은 나무는 또 다른 생명을 싹트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하고 나그네에게 말을 건넨다. 안내판은 "나무가 죽으면 아무 쓸모가 없을까요?" 하고 되묻기도 한다.

안내판에 적혀 있는 내용을 읽어본다. 죽은 나무는 장수하늘소의 산란 장소이다. 따라서 장수하늘소의 애벌레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런가 하면, 죽은 나무는 딱따구리의 훌륭한 사냥터가 되고, 버섯과 이끼 종류에게 멋진 영양분을 공급해주는 서식처도 된다. 족제비와 다람쥐는 이곳을 몸을 숨기는 은닉 장소로 활용하기도 한다.

6.25 당시 해인사 폭격 명령을 거부하여 팔만대장경을 구해낸 김영환 공군 장군을 기려 세워진 비
 6.25 당시 해인사 폭격 명령을 거부하여 팔만대장경을 구해낸 김영환 공군 장군을 기려 세워진 비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조금 더 올라가면 절의 분위기와 별로 어울리지 않는 모양의 기념비가 하나 서 있다. 사람들은 이 비에 별로 주목을 하지 않고 스쳐 지나간다. 비 앞에 안내판까지 세워져 있는데도 모두들 그냥 통과해버린다. 해인사를 찾을 때면 다들 팔만대장경만 유난히 염두에 두는 탓인 듯하다.

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은 생각이다. 비문까지는 읽지 않더라도, 안내판의 해설에라도 눈길을 준다면 그런 잘못된 답사는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기념비는 '김영환 장군 팔만대장경 수호 공적비'이기 때문이다.

꼭 읽어보고 지나가야 할 길가의 비석 하나

비문은 '여기 화살같이 흐르는 짧은 생애에 불멸의 위업을 남기고 영원히 살아남은 영웅이 있다'로 시작한다. 비문은 첫 줄부터 장엄하다. 김영환(金英煥, 1921~1954) 장군이 어떻게 '팔만대장경'을 '수호'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는 '불멸의 위업'을 이룩했는지 저절로 궁금해진다.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기념하는 비석, 일주문 앞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기념하는 비석, 일주문 앞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해인사 누리집에 따르면, 공군 편대장이던 김영환 대령은 1951년 9월 18일 오전 6시 30분 '해인사의 공비 소굴을 폭격하여 지상군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김영환 대령은 당시 인민군 낙오자 9백여 명이 숨어서 버티고 있는 해인사 공격 작전에 참여하여 가야산 상공을 비행 중이었다. 하지만 그는 상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 그는 편대의 다른 3대 폭격기를 운행하고 있는 장교들에게 '나의 지시 없이는 절대 폭탄을 투하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다.

해인사 폭격 명령 거부한 공군 대령 김영환

'해인사 대적광전 앞마당에 폭탄을 투하하라는데 왜 명령을 듣지 않느냐?'는 상부의 지시가 다시 떨어진다. 그래도 그는 계속 불복종한다. '다른 비행기의 장교들이 재차 폭격 명령을 내려줄 것을 재촉'하였지만 끝내 그는 해인사 뒤쪽 가야산 너머 산자락에 폭탄을 투하하는 것으로 작전을 마친다. '네이팜탄 한 발이면 팔만대장경판은 물론 해인사 성지 전체가 잿더미로 변할 찰나'의 상황을 그는 '목숨을 걸고' 거부했고, 이는 '대장경판이 보존된 장엄한 순간'이 되었다.

비문의 마지막에 새겨져 있는 시를, 원문의 표기와 띄어쓰기 그대로 읽어본다.

호국하온 민족혼인 고려팔만 대장경판
국난중에 호국하고 재난에도 호민했네
6.25의 위기 맞아 김장군이 지켰으니
호국장군 아깝게도 서른세살 젊은나이
순국으로 산화하니 짧은시간 굵게살다
가야산이 변함없듯 동해바다 고갈되고
백두산이 마멸되나 위대하신 그이름은
이나라와 함께하여 영원토록 빛나리라

경남 합천 창의사, 정인홍 기념관 등에 전시되어 있는 팔만대장경 목판(복제본)과 인쇄본
 경남 합천 창의사, 정인홍 기념관 등에 전시되어 있는 팔만대장경 목판(복제본)과 인쇄본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이날 폭격 명령에 불복종하고 팔만대장경을 살린 김영환 사건에 대해 미국 군사고문단은 한국 대통령 이승만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크게 분노하여 김영환을 총살도 아닌 포살(砲殺)로 죽이라며 화를 내었다. 배석하고 있던 공군참모총장 김정렬(김영환의 형)이 팔만대장경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즉결처분은 모면했다.

"말 안 듣는 김영환을 대포를 쏘아 죽이라"던 이승만

그날 저녁, 미군사고문단 책임자가 한국군 작전참모 장지량 중장과 김영환 대령 및 그의 편대원 전원이 모인 자리로 와서 군인의 가장 큰 죄인 명령불복종 행위에 대해 엄중히 추궁했다. 이미 죽기를 각오하고 폭격 명령을 거부했던 김영환 대령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태평양전쟁 때 미군이 일본 교토를 폭격하지 않은 것은 교토가 일본 문화의 총본산이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뿐만 아니라 영국이 인도를 영유하고 있을 때, 영국인들은 차라리 인도를 잃을지언정 세익스피어와는 바꾸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에게 팔만대장경은 인도하고도 바꿀 수 없는 세계적 보물입니다. 이를 어찌 유동적인 수백 명의 공비를 소탕하기 위하여 잿더미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해인사 일주문. 이곳부터가 진정한 해인사 경내이다. 일주문 아래를 스님 세 분이 지나가고 있다. 현판의 글씨를 쓴 이가 김규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금강산 건봉사와 구룡폭포가 연상된다.
 해인사 일주문. 이곳부터가 진정한 해인사 경내이다. 일주문 아래를 스님 세 분이 지나가고 있다. 현판의 글씨를 쓴 이가 김규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금강산 건봉사와 구룡폭포가 연상된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일주문 닿기 전에 성철 스님 사리 봉안처, 비림(碑林), 해인사 사적비, 아사달 아사녀 전설과 일정 부분 닮은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영지(影池) 등을 만나지만 아무래도 해인사의 진정한 경내는 이 문을 통과하면서부터이다. 마침 세 분의 스님들이 문 아래를 지나 안으로 나란히 들어가신다. 따라붙어 세 분의 말씀을 엿들으며 걸어보려고 발길을 재촉한다. 하지만 일주문 현판 아래에서 걸음은 멈칫 정지되어 버린다. 현판의 글씨 때문이다.

'가야산 해인사' 현판에 글씨를 쓴 이의 이름이 적혀 있다. 해강 김규진(1868∼1933)이다. 김규진은 일제의 침탈로 나라가 식민지가 되고, 제자였던 영친왕이 바다 건너까지 끌려가는 일이 발생하자 복잡한 화법의 그림을 버리고 그 대신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문인화류, 특히 묵죽도(墨竹圖)에 전념한 조선 말기의 화가이다. 그는 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사진관을 연 개척자이기도 하다. (김규진에 대해서는 '김규진의 글씨를 보며 통일을 꿈꾼다' 기사 참조)

건봉사는 쑥대밭이 되었지만 해인사는 6.25 때 무사

하지만 지금 그를 생각하느라 발길이 멈춰선 것은 아니다. 이 현판을 보는 순간 금강산 건봉사의 일주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절 일주문 편액에 김규진이 쓴 '불이문' 글씨가 연상되었고, 낙산사, 신흥사. 백담사 등을 거느린 거대 사찰 건봉사가 6.25전쟁으로 산산조각 파괴된 사실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너무나 해인사와 대조가 되는 그 역사가 가슴아프게 되새겨졌기 때문이다.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건봉사로 723에 있는 건봉사는 1465년에 세조가 원당(願堂)으로 삼은 뒤 어실각(御室閣)을 짓고 전답과 친필 동참문을 하사했던 사찰이다. 한때 3183칸이나 되는 놀라운 규모였지만 1878년 4월 3일 큰 불로 말미암아 전소(全燒)되었다가 복원을 거쳐 1911년에는 9개 말사(末寺)를 거느린 31본산의 하나로 부흥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 휴전 직전까지 2년여에 걸친 아군 5, 8, 9사단 및 미군 제10군단과 공산군 5개 사단이 16차례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건봉산 전투 전적지'에 자리잡고 있었던 탓에, '이때 건봉사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현지 안내판의 내용)'

해인사 일주문의 '가야산 해인사', 대적광전 왼쪽 처마 아래의 '법보단', 금강산 건봉사 일주문의 '불이문', 금강산 구룡폭포 절벽에 새겨진 '미륵불'(빨간 동그라미 부분), 부여 부소산성 사자루의 '백마장강', 모두 김규진의 글씨다.
 해인사 일주문의 '가야산 해인사', 대적광전 왼쪽 처마 아래의 '법보단', 금강산 건봉사 일주문의 '불이문', 금강산 구룡폭포 절벽에 새겨진 '미륵불'(빨간 동그라미 부분), 부여 부소산성 사자루의 '백마장강', 모두 김규진의 글씨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우리나라에서 문화재들이 끔찍하게 파괴되는 것은 대체로 고려 때 몽고군의 침략, 조선 때 임진왜란, 그리고 현대의 6.25전쟁 때이다. 경북 성주군 수륜면 보월리 852번지의 '성주 보월동 삼층석탑' 안내판이 '이 탑은 절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몽골 침입 때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추측된다'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인식의 결과이다. 물론 해설에 6.25가 거론되지 않은 것은 이 탑이 6.25 때 파괴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전쟁을 겪은 생존 주민들이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팔만대장경은 임진왜란을 어떻게 버텨 내었을까? 부인사 초조대장경이 1232년 몽고군의 방화로 사라질 때 해인사 재조대장경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팔만대장경이 그때 파괴되었을 리는 애당초 없는 일이고, 6.25전쟁 때 화를 면한 것은 김영환 장군의 공로 덕분인 것을 알았다. 이제 팔만대장경이 7년 임진왜란의 화를 피할 수 있었던 까닭이 궁금하다.

실제 경상도 지역은 임진왜란의 최대 피해 지역이었다. 굳이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나오는 '우리나라 땅이 좁으므로 (왜적으로부터) 안전한 곳이 거의 없었으나 다만 호남과 호서 우도(충청도의 오른쪽)만이 홀로 안전하였으므로 사녀(士女)들이 많이 여기로 피란하였다'라는 기록을 인용하지 않아도 이는 쉽게 가늠할 수 있는 일이다. 적들이 처음 상륙한 부산포에서 서울로 가려면 지나가야 하는 길이 곧 경상도였기 때문이다.

줄기차게 팔만대장경을 탐내었던 일본

따라서 당연히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임진란 왜적들의 중요 노림 대상이 되었어야 했다. 이는 역사의 사례를 보아도 틀림이 없는 일이다. 적들이 대장경을 탐낸 것은 이미 고려 후반부터였다. 여러 차례 대장경 사업을 시도했다가 결국 실패한 일본은 고려 후기에 벌써 여러 차례 팔만대장경을 자신들에게 달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조선 초기에도 태조 때 네 차례, 정종 때 일곱 차례, 세종 때 아홉 차례에 걸쳐 같은 요구를 반복했다. 임진란 당시 평양 이남의 한반도 전역을 두루 점령했던 그들이 해인사 팔만대장경에 눈독을 들인 것이야 당연한 일이었다.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장경판전 내부의 모습. 일반인은 이 안에 들어갈 수 없고, 사진은 장경판전과 독성각 사이에 전시되어 있는 것을 재촬영한 것이다.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장경판전 내부의 모습. 일반인은 이 안에 들어갈 수 없고, 사진은 장경판전과 독성각 사이에 전시되어 있는 것을 재촬영한 것이다.
ⓒ 해인사

관련사진보기


임진란 일본군들이 해인사 바로 인접인 성주에 들어온 때는 4월 27일이었다. 해인사 누리집은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 보전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가야산을 의지한 경상도 의병이 펼친 전대미문의 유격 전쟁과, 해인사를 목숨 걸고 지키려는 승려들의 헌신 덕분'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팔만대장경이 무사하게 보전될 수 있었던 내력에 대한 누리집의 기술을 좀 더 읽어본다.

<한국불교1600년사>의 소암

소암(昭巖, ?-1605) : 승병장. 임진왜란 중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지켰다. 이름은 대성(大成). 어려서 출가하여 서산대사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휴정의 제자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휴정의 지시로 사명 유정의 도움을 받아 합천 해인사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왜적들이 수 차례 해인사를 침략하려 했으나 그가 지휘하는 승군들의 방어로 전쟁 7년 동안 해인사 주변의 안전과 해인사 소장 팔만대장경을 지켰다. 전쟁 후 적합한 토굴을 찾아 떠났으나 다시 돌아와 해인사의 백련암을 창건했다.

한국불교1600년사
 한국불교1600년사
ⓒ 불교방송

관련사진보기


위는 불교텔레비전(회장 석성우)이 2002년에 간행한 <인물로 본 한국 불교 1600년사>에 기록되어 있는 소암 스님 소개 부분이다. 책은 <선조실록>을 참조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왜적이 부산포에 상륙한 지) 불과 보름만에 경상도 전역의 주요 읍성이 왜군의 말발굽 아래 짓밟혔다. 왜군이 거창이나 성주에서 한발 옆인 합천 해인사로 들어와 팔만대장경을 약탈하는 것은 이제 죽먹기보다 쉬운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더구나 일본은 조선 초기부터 우리 팔만대장경본은 물론 그 경판까지도 줄곧 눈독들이고 요구해 오고 있었던 터였고, 조선의 우수한 문화재와 장인들을 우선적으로 약탈하거나 파괴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거의 절망적인 지경에서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것은 홍의장군 곽재우를 비롯한 거창의 김면 장군, 합천의 정인홍 장군이 이끄는 경상도 의병과 소암(昭岩)대사가 이끄는 해인사 승병이었다.'

누리집은 '이(의병과 승병)들은 한발 더 나아가 힘을 합쳐 5000의 의병으로 낙동강 동쪽 현풍·창녕·영산 등지의 왜군 제9군 1만 1500명과 대결, 이들을 영산성으로 몰아붙이고는 다시 성주성으로 쫒아냈고, 김면 의병군과 정인홍 의병군은 합동으로 손금보듯 잘 아는 고향 땅 지세를 방패삼아 성주성에 몰린 2만 왜군의 발목을 묶었다'면서 '성주성을 둘러싼 (1592년) 8월과 9월, 12월의 대규모 의병 공격에 몰린 왜군은 이듬해 1월에 개령·선산 쪽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낙동강 서쪽 지역이 모두 수복됨에 따라 가야산 해인사의 팔만대장경도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의병과 승병이 팔만대장경을 지켜냈다

합천 창의사 내부의 게시물에도 의병들이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보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자부심 찬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합천 창의사 내부의 게시물에도 의병들이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보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자부심 찬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합천 정인홍 기념관 내부의 게시물에도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의병의 자부심을 담은 기록이 전시되어 있다.
 합천 정인홍 기념관 내부의 게시물에도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의병의 자부심을 담은 기록이 전시되어 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해인사 누리집, 합천 창의사, 합천 가야면 가야시장로 111 소재 정인홍 기념관은 누구 덕분에 해인사 재조대장경이 부인사 초조대장경처럼 되지 않았는지 잘 말해준다. 경상도 의병과 승병들은 세계적 문화유산이 외적의 방화로 말미암아 하루 아침에 한 줌 재로 변하는 비극을 막았다. 그런 점에서, 경상도 의병들과 해인사 주둔 승병들 또한 '화살같이 흐르는 짧은 생애에 불멸의 위업을 남기고 영원히 살아남은 영웅'들임에 틀림이 없으리라.

하지만 해인사 경내를 두루 살펴보아도 의병들과 승병들이 팔만대장경을 지켜내었다는 사실을 일반인이 알 수 있는 표식은 없다. 해인사 누리집에 자세히 실려 있고, 합천 창의사와 정인홍 기념관에도 그 사실이 소략하게 게시되어 있어 다행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좀 더 잡아당길 수 있도록 김영환 기념비 일대를 시각화할 필요도 있고, 하루 빨리 의병과 승병들의 활약을 기리는 새로운 조각물을 건립해야 한다. 위치는 물론 팔만대장경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기념하여 일주문 앞 세워둔 비석 옆이 가장 좋다.

'죽은 나무는 다른 생명을 싹트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고 했다.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 피를 흘린 분들을 잊지 않고 제대로 모셔야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후세들을 강건하게 키울 수 있다. 장경판전 왼쪽에 있는 학사대 전나무(경남 기념물 215호)는 최치원이 지팡이를 거꾸로 꽂은 것이 지금껏 장대하게 자라고 있다는 전설을 품고 있지만, 사람은 결코 그렇지 않다. 사람은 올바른 정신문화가 깃들어 있는 사회 풍토에서 키워야 옳게 자란다.

합천 정인홍 기념관 내부의 소나무 형상 장식물. 사진으로 찍은 것이므로 실물과는 여러 모로 다름.
 합천 정인홍 기념관 내부의 소나무 형상 장식물. 사진으로 찍은 것이므로 실물과는 여러 모로 다름.
ⓒ 정인홍기념관

관련사진보기


이익의 <성호사설>에 따르면, 정인홍은 이런 인식에 대한 문학적 비유를 이미 열한 살 때(1546년) 시 <영송(詠松)>으로 보여주었다. 당시 해인사에서 공부하는 중이었던 정인홍은 "한 자 남짓 외로운 소나무가 탑 서쪽에 있네(一尺孤松在塔西) / 탑은 높고 소나무는 낮아 서로 가지런하지 않구나(塔高松短不相齊) / 지금 소나무가 탑보다 낮음을 탓하지 마오(莫言此日松低塔) / 뒷날 소나무가 자라면 오히려 탑이 낮아지리니(松長他時塔反低)" 하고 노래했다.

소나무가 탑보다 높아지는 데는 거름이 필요하다

후세대들의 역사 인식이 부족하다는 탓만 되풀이할 것이 아니다. 더 이상 발전하기는 어렵고 현상을 유지하며 그 자리에 멈춰있을 뿐인 기성 세대는 탑과 같은 존재이다. 그에 견줘 후세대들은 소나무처럼 쑥쑥 자라날 가능성이 높다.

김굉필의 제자 도형(都衡)이 <소학부(小學賦)>에서 말한 "뿌리를 북돋우면 반드시 가지 뻗고 잎 무성해지리(培根必是枝達葉茂)"의 교훈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실이다. 따라서 후세대들에게 비옥한 토양을 물려주기 위해 진력을 다해야 하는 것은 기성세대의 의무이다. 소나무들을 장대하게 키워야 하기 때문이다. 의사(義士)들을 기리는 선양 사업,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다.

찾기 쉽도록 하기 위해 (2) 대적광전 앞에서부터 길을 안내하면- 가장 뒤, 가장 높은 곳에 (1) 장경판전(대장경 보관)이 있고, 그 왼쪽으로 나오면 장경판전 내부를 보여주는 커다란 사진을 볼 수 있다. (3)의 지점에 가면 독성각과 그 좌측에 있는 (최치원 유적) 학사대 전나무를 볼 수 있다. (4)는 범종각이다.
 찾기 쉽도록 하기 위해 (2) 대적광전 앞에서부터 길을 안내하면- 가장 뒤, 가장 높은 곳에 (1) 장경판전(대장경 보관)이 있고, 그 왼쪽으로 나오면 장경판전 내부를 보여주는 커다란 사진을 볼 수 있다. (3)의 지점에 가면 독성각과 그 좌측에 있는 (최치원 유적) 학사대 전나무를 볼 수 있다. (4)는 범종각이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해인사 답사 순서

(1) 해인사(입장료 3천원, 주차료 4천원) 주차장에서 걸어가며 작은 안내판들 읽기
(2) 성철스님 사리 봉안처 답사
(3) 비림(碑林), 해인사 사적비, 길상탑 안내판 읽으며 보기
(4) 가야산 일원과 해인사에 대한 종합 안내판 읽기
(5) 영지 :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후가 가야산 칠불봉에 들어 스님이 된 일곱 아들들이 보고 싶어 이곳에 찾아왔으나 산에 올라 만날 수가 없어 아들들이 호수의 물에 비치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리자 영지에 일곱 얼굴이 수면에 나타났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작은 연못
(6) 일주문 앞 세계문화유산 지정 기념 비석
(7) 일주문의 김규진 글씨 감상, 봉황문(현판 : 해인총림) 쪽 바라보기
(8) 길 좌우에 있는 고사목들 보기, 고사목 중 하나는 안내판 있음
(9) 봉황문 안으로 들어 국사단 안내판 읽기
(10) 해탈문 지나 석등(유형문화재 255호), 탑(유형문화재 254호), 대적광전(유형문화재 256호) 바라보기, 안내판 읽기
(11) 대적광전 왼쪽으로 가서 비로전 안내판 읽고 법당 내 불상 보기, 대적광전 처마 밑 김규진 글씨 보기(대적광전의 뒤와 오른쪽 처마 아래, 그리고 주련에도 그의 글씨가 남아 있음)

장경판전 안으로 빛과 공기가 통하는 벽면의 모습. 사진 왼쪽 아래의 붉은 빛깔은 출입금지 시설의 상단부이다.
 장경판전 안으로 빛과 공기가 통하는 벽면의 모습. 사진 왼쪽 아래의 붉은 빛깔은 출입금지 시설의 상단부이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12) 대적광전 뒤로 가서 장경판전으로 올라가 건물 벽면의 통풍 시설 보기
(13) 장경판전 서쪽으로 이동하여 장경판전 건물들 사이 엿보기
(14) 출구로 나와 독성전 가기 전 대장경 대형 사진 감상
(15) 독성전, 최치원 유적인 학사대 전나무(기념물 215호) 보고 안내판 읽기
(16) 주차장 위 성보박물관 관람(입장료 2천원, 꼭 볼 만함)


석등, 석탑 뒤로 대적광전이 보이는 풍경. 왼쪽으로 비로전, 오른쪽 뒤로 장경판전 일부가 보인다.
 석등, 석탑 뒤로 대적광전이 보이는 풍경. 왼쪽으로 비로전, 오른쪽 뒤로 장경판전 일부가 보인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태그:#팔만대장경, #김영환, #정인홍, #임진왜란, #김면
댓글2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