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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9일, 그날은 '불금'이었다. 하루의 피로는 자양강장제 한 병으로 어찌 풀어본다지만, 한 주의 피로는 불금에 해소하지 않으면 근육과 뼛속 깊이 축적돼 심각한 병을 유발할 수도 있다. 뻣뻣해진 뒷덜미는 돼지껍데기나 삼겹살로 적당히 윤활유를 쳐야 하고, 각종 공해물질이 쌓인 내장은 알코올 소독이 필수인 게다. 그런데 하필 그날은 큰 아이 유치원 졸업식 전날이었다.

'그깟 유치원 졸업식이 뭐 대수냐!'라고 심장은 요동쳤지만, 사후 뒷감당에 대한 충분한 경험을 가진 대뇌는 아내의 싸늘한 눈빛을 상기시키며 조기 귀가 지침을 내렸다. 깊은 고민과 번뇌 끝에 졸업식에 가져갈 꽃다발을 들고 집으로 향하긴 했지만, 몸 구석구석의 세포들이 자신들을 이대로 내치지 말아달라고 외치는 절규는 잠들기 전까지 계속됐다.

유치원 문턱에도 못 가본 내겐 유치원 졸업식은 공익근무 소집해제쯤으로 여겨져, 너무 호들갑 떠는 게 아니냐는 삐딱한 시선이 있었다. 물론 불금을 고스란히 바친 아쉬움과 씁쓸함에 대한 반감도 없지 않았지만,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써 내색할 수 없는 노릇이기에 묵묵히 유치원을 향했다. 그리고 나의 이런 철없는 편견은 한방에 무너져 내린다.

'위대한 부모님상'을 받았어요

동생들이 졸업하는 형님들에게 빼곡히 적은 글들이 인상적이다.
▲ 유치원 졸업식 종이 현수막 동생들이 졸업하는 형님들에게 빼곡히 적은 글들이 인상적이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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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1층에 전시된 졸업사진과 졸업 앨범.
▲ 졸업 사진과 졸업 앨범 유치원 1층에 전시된 졸업사진과 졸업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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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부모님상에 꼭 집어서 아빠 이름만 적은 기특한(?) 큰 아들 녀석과 함께한 사진
▲ 위대한 부모님상 기념 사진 위대한 부모님상에 꼭 집어서 아빠 이름만 적은 기특한(?) 큰 아들 녀석과 함께한 사진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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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의 작은 강당에서 시작한 스물두 명 아이들의 유치원 졸업식(2월 20일). 국민의례와 원장님 인사말씀을 거쳐 각종 상장 수여식이 진행됐지만, 거기까지는 특별히 흥미를 끌만한 것은 없었다. 그러다 '위대한 부모님상'을 받으러 부모 중 한 사람이 나오라는 말을 듣고는 당연하게 아내를 떠밀었다. 그런데 아이에게 갔던 아내가 약간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오더니 아빠에게 상을 줬다며 나더러 나가라는 것이었다.

'위대한 부모님상'이란 아이가 부모들에게 주는 상으로 대부분의 아이들은 엄마 혹은 부모 모두의 이름을 적었는데, 큰아들 녀석은 제 아빠의 이름만 적었던 것이다. 아내에게는 좀 미안했지만, 감동받았다. 지난 한 해 아이와 함께한 시간들이 스쳐갔다. 아빠 때문에 다리를 다치고, 오히려 사이가 더욱 돈독해진 큰아들 녀석은 잘 때도 꼭 나를 찾는다. 아이의 상상력을 키워주기 위해 녀석이 잠들 때까지 이야기를 지어서 해주던 숱한 밤들이 떠올랐다.

심장의 떨림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어진 담임선생님의 회고사 혹은 송별의 말씀은 참석한 모든 이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워낙 눈물이 많은 분이라서 사전에 제작된 동영상 편지로 대체했는데, 그게 오히려 잔잔한 감동을 줬다. 아이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부르며 적어 내려간 편지글은 나의 눈물샘을 두드렸고, 애써 참으려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댔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 아빠들 중에 나만 눈물을 참고 있는 게 아니었다.

울먹이는 아이들을 하나씩 안아주고 다독이시는 담임선생님의 얼굴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지난 여름 캠프 때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썼던 편지와 아이들의 꿈을 모아 만든 졸업 문집에는 정성이 넘쳐났고, 가족들과 졸업생들을 위해 직접 준비한 짜장면은 섬세한 배려의 끝을 보는 듯했다. 어느 지방 도시의 작은 유치원, 스무 명 남짓한 아이들의 졸업식장이 이렇듯 감흥을 불러일으킬 줄이야.

부모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던 졸업식

동영상으로 잔잔하게 흐르는 담임선생님의 송별편지에 아이들도 부모들도 모두 울음바다가 되었다.
▲ 담임선생님 송별사에 울음바다가 된 졸업식장 동영상으로 잔잔하게 흐르는 담임선생님의 송별편지에 아이들도 부모들도 모두 울음바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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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가를 부른 직후 아이들을 꼭 안아주시는 담임선생님
▲ 안녕을 앞에 두고 졸업가를 부른 직후 아이들을 꼭 안아주시는 담임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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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하면 떠오르는 짜장면을 유치원에서 직접 만들어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많은 것을 배려한 시골 유치원의 진심이 느껴진다.
▲ 유치원에서 직접 만든 짜장면 졸업식하면 떠오르는 짜장면을 유치원에서 직접 만들어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많은 것을 배려한 시골 유치원의 진심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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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의 지난 졸업식들을 되돌아본다. 대학원까지 총 다섯 번 중에서 내 기억에 남는 졸업식이 과연 있었던가? 여전히 졸업식이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콧잔등이 시큰한 걸 보면 무언가 남아있긴 한 모양이다. 맑게 갠 하늘을 배경으로 흐릿하던 기억들이 조금씩 선명해진다.

국민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갔던 곳은 짜장면집이 아닌 시장의 순댓집이었다. 코앞의 유명한 중학교를 두고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변두리의 산골짜기 중학교에 배정받은 억울함은, 같은 반 반장이었던 현역 국회의원 아들의 유명 중학교 배정(누구나 예상했지만)과 맞물리며 아버지의 분노와 허탈을 자아냈다. 이는 결국 돈가스와 짜장면을 밀어내고 순대라는 안주를 택하게 만들었다.

졸업식 전날 늦게까지 장사를 마치고 피곤하셨는지, 어머니는 졸업식이 다 끝나고 난 뒤, 헐레벌떡 뛰어오셨다. 훗날 친구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되는 원망의 눈물이 앞을 가리던 중학교 졸업식이었다. 철없는 중3짜리 큰아들을 달래느라, 미장원에 손님이 많더라는 핑계를 대시며 어찌할 바를 모르던 어머니의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날 처음으로 경양식집이라는 곳에 가서 수프를 먹고 나이프와 포크를 쥐어봤다.

괜한 멋이었는지, 부모보다 친구가 소중한 나이었는지, '용돈이나 좀 챙겨주시고 졸업식은 안 오셔도 돼요'라고, 지금 와서 생각하면 서운함을 안겨드렸을 고등학교 졸업식. 교복에 계란과 밀가루를 떡칠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시내를 활보하던 무모함과 우리 꼭 성공해서 담임선생님 자동차(그 당시 '프라이드 베타'라는 기아자동차) 뒤에 날개를 달아드리자고 결의하던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리고, 학사모를 몇 번이나 고쳐 쓰고 사진 찍으시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숨기고 싶지 않으시던 대학교 졸업식. 20년 식당일의 보상을 하루에 다 받아내시려는 듯, 그리도 행복해 하시는 부모님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이제는 당신의 숙제를 다 해치웠다며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겠다는, 지나가듯 던진 말씀이 귀를 타고 명치로 흘러내렸다.

지나고 보니 모든 졸업식에는 각각의 사연과 감정이 담겨있다. 유치원 졸업식이라고 하찮게 여겼다가 큰 코 다친 셈이다. 졸업식은 여전히 새 출발을 위한 기쁨과 이별에 대한 아쉬움으로 눈물겨운 것이다. 어금니 꽉 물고 눈물을 삼켜야 했던 큰 아이의 유치원 졸업식이 무사히 마무리됐다. 화병으로 들어간 꽃들만이 그 여운으로 남아있다. 이제 한발 더 학부모에 다가선 셈이다.

끝으로 졸업식 중에 소개된 <대추 한 알>이라는 시의 일부를 옮겨 본다. 그랬다. 저 녀석들이 저절로 저렇게 컸을 리가 없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 장석주 <대추 한 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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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캠프 때 아이에게 보낸 편지들이 포함되어 있다. 노란 편지는 필자가 큰 아이에게 썼던 편지글.
▲ 유치원 졸업문집의 일부 작년 여름 캠프 때 아이에게 보낸 편지들이 포함되어 있다. 노란 편지는 필자가 큰 아이에게 썼던 편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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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유치원 졸업식, #위대한 부모님상, #대추 한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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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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