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돔 타워에서 성당 가는 길 옆으로 난 쪽문으로 들어가면 만날 수 있다. 사진 왼쪽으로 지붕이 보이는 건물이 성당이다.
▲ 성당 회랑의 정원 돔 타워에서 성당 가는 길 옆으로 난 쪽문으로 들어가면 만날 수 있다. 사진 왼쪽으로 지붕이 보이는 건물이 성당이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Where is the Utrecht college?" (위트레흐트 대학이 어디 있죠?)
"Which college do you want to go?" (어느 대학을 가려고 하는데요?)
"Utrecht!" (위트레흐트!)
"…"

위트레흐트 중앙역에서 만난 현지 주민들과 오간 대화의 내용이다. 위트레흐트 대학이 어디 있냐는 질문에 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연신 이렇게 되물었다. "어느 대학을 가려고 하는데요?" 잘못 알아들었나 싶어 큰소리로 다시 '위트레흐트'를 외치면, 또 다시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다른 사람을 붙잡고 물어도 대화 내용은 달라지지 않았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관광안내소에서 일하는 친절한 어르신을 만나기까지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분과의 대화도 처음엔 똑같았다. 그런데, 네덜란드어로 적혀있어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도시의 지도를 펴놓고 우리에게 일일이 영어로 설명해주는 과정에서 눈치껏 간파해냈다. 위트레흐트가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대학 도시라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은 도시가 곧 대학이었다.

말하자면, 우리로 치면 본관은 시청에 있고, 문과대는 신촌, 공과대는 용산, 도서관은 동대문에 있는 셈이다. 물론, 대학의 주요 건물들은 기차역에서도 가깝고 도시의 규모가 작아 웬만하면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도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반문에 다짜고짜 '위트레흐트'라고 답할 게 아니라, 이를테면 학과나 건물 이름을 대야 했던 거다.

대학 본관은 시청에, 문과대는 신촌에, 도서관은 동대문에?

중앙역에서 위트레흐트 대학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간이 화장실이다. 위에서 보면 쉼표 모양으로, 안에 들어가 일을 보도록 만들어졌는데, 보면 볼수록 '깨는' 물건이다.
▲ 무엇에 쓰는 물건일까? 중앙역에서 위트레흐트 대학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간이 화장실이다. 위에서 보면 쉼표 모양으로, 안에 들어가 일을 보도록 만들어졌는데, 보면 볼수록 '깨는' 물건이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암스테르담에서 기차로 불과 40분 남짓이면 위트레흐트에 닿는다. 기차 편수도 많아 굳이 위트레흐트에서 숙박을 하는 여행자는 많지 않지만, 대학 도시라는 명성 때문에 지나치는 길에 한 번쯤 들르게 되는 곳이다. 그렇지만 걷다보면 네덜란드의 여느 도시처럼 예스러운 골목길과 운하도 거닐 수 있고, 소담한 공원과 예쁘게 꾸민 집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어느 도시를 가든 박물관과 학교, 도서관 등은 우리 가족이 여행 계획을 짤 때마다 늘 맨 앞자리에 두는 최고의 관광지다. 그중에서도 도서관은 결코 빠지지 않는 단골 코스다. 도서관엘 가보면 그 지역과 학교의 현재와 미래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더욱이 대학 내 도서관에는 부담없는 가격에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착한' 식당이 자리하고 있어 주머니가 가벼운 여행자들에게는 금상첨화다.

아무튼 그냥 위트레흐트 대학의 도서관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도 막무가내로 대학의 이름만 읊었던 이유는, 그저 우리네처럼 교문을 들어서면 대학 본부 건물이 나오고 그 언저리에 박물관과 도서관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이 되물은 이유도 모르고, 되레 영어로 의사소통이 안 되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던 모습이라니.

현대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중앙역을 벗어나니 곧장 고풍스러운 대학가가 펼쳐졌다. 누가 대학가 아니랄까봐 맨 처음 보이는 가게가 '복사집'이었다. 이곳의 대학생들도 우리처럼 비싼 책값 때문에 허덕이나 싶어 설핏 웃음이 났다. 또, 젊음의 거리답게 가게의 이름보다 와이파이가 무료라는 광고를 더 크게 써 붙인 작은 카페들과 몇몇 낯뜨거운 섹스숍도 눈길을 끌었다.

지루할 틈 없는 거리는 네덜란드의 여느 도시가 그렇듯 온통 자전거 차지고, 길가에 늘어선 앙증맞은 건물들은 그 자체로 색다른 볼거리다. 마치 인형이 살고 있을 것 같은 집들과 동화 속 풍경 같은 골목이 대학을 포위하듯 감싸고 있다. 듣자니까 우리나라에서도 '뽀로로'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고 있는 어린이들의 친구, '미피'가 태어난 곳이 바로 이곳 위트레흐트란다.

높이가 113미터로, 현재 네덜란드에 남아있는 고건축 중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꼭대기에 오르면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 위트레흐트의 랜드마크, 돔 타워 높이가 113미터로, 현재 네덜란드에 남아있는 고건축 중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꼭대기에 오르면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거리엔 온통 젊은이들뿐이다. 자전거 위에도, 보도 위에도, 자동차 안에도, 가게 안에도, 나보다 손위로 보이는 이는 거의 없었다. 물론 과장 섞인 표현일 테지만, 위트레흐트 인구의 절반이 대학생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오가는 사람들이 젊다보니 족히 수백 년은 됐음직한 길도, 건물도, 심지어 이끼 낀 성당조차도 생기발랄하게 느껴졌다.

그 길의 끝에 장대 같은 돔 타워가 서 있다. 바로 옆의 성당과 꼭대기의 십자가로 미루어 성당에 딸린 첨탑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정작 성당보다 더 유명한 위트레흐트의 상징이 됐다. 시내 어느 곳에서도 보일 만큼 높아 도시의 이정표 역할을 한다. 중앙역에서 도서관 가는 길을 알려준 어르신도 돔 타워가 나침반이라면서 오로지 그것만 보고 가면 될 거라고 말했다.

원래 돔 타워는 성당의 일부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자연재해로 파손되어 지금은 그 사이에 길이 나 도심을 사통팔달로 이어주고 있다. 로터리 역할을 하고 있는 주변 광장이 성당의 일부였던 셈이다. 크게 훼손되었을지언정 거대한 성채 같은 성당의 일부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꾸며졌고, 부속 건물이었을 2층짜리 아카데미아 빌딩은 대학의 강당 역할을 하고 있다.

할아버지들도 모여 공부하는 대학 도서관

현재 위트레흐트 대학의 중심 건물로,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 성당과 이어진 아카데미아 빌딩 현재 위트레흐트 대학의 중심 건물로,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위트레흐트 대학의 학과 건물들은 도시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 작은 운하나 길을 걷다보면 두루 만날 수 있다.
▲ 위트레흐트의 경영사회(?) 대학 위트레흐트 대학의 학과 건물들은 도시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 작은 운하나 길을 걷다보면 두루 만날 수 있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대학이 이렇게 어수선해도 되는 것일까. 전공 학과별로 건물들이 마치 남남처럼 떨어져 있고, 심지어는 대학 건물 사이에 공부에 방해가 될 술집들이 버젓이 영업을 하고 있다. 성당 초입에 섹스숍까지 있는 마당에 뭐가 대수냐 싶지만, 이렇듯 학교 주변이 '정화'되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도 네덜란드를 넘어 유럽에서도 내로라는 대학이라는 게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다.

잔뜩 찌푸렸던 하늘에 빼꼼히 해가 얼굴을 내밀자 운하 주변으로 조깅을 하는 대학생들이 몰려나왔다. 도시 전체가 운동장이고, 운하와 나란히 난 길이 트랙인 셈이다. 도서관을 찾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은 채 한참 동안 도심 거리 곳곳을 산책했다. 어딜 가든 학과 표지판을 매단 대학 건물이 나타났으니 대학을 벗어났다거나 길을 잃었다는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마냥 걷다 보니 거짓말처럼 목적지인 중앙 도서관에 닿았다. 입구는 초라했고 외관은 낡았지만 내부는 현대식 쇼핑몰처럼 세련된 모습이었다. 배낭을 메고 카메라를 들었으니 누가 봐도 이방인 여행자 행색이었지만, 출입을 방해받지 않았다. 안내 데스크에 부러 찾아가 짓궂게 물었더니, 외국인의 경우에도 반출만 안 될 뿐 책과 논문을 자유롭게 열람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도서관에서 '쉬었다' 가란다.

옛 건물인 외관은 낡았으나 내부는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했다. 3층으로 구역은 나눴으나 특이하게 벽이나 문이 없이 개방했다.
▲ 대학 도서관 내부 모습 옛 건물인 외관은 낡았으나 내부는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했다. 3층으로 구역은 나눴으나 특이하게 벽이나 문이 없이 개방했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암스테르담 중앙역 근처에 자리한 국립 도서관의 지하 어린이실은 놀이터처럼 꾸며놓았다. 전등의 모양까지 배려한 세심함이 놀랍다.
▲ 국립 도서관 어린이실 내부 암스테르담 중앙역 근처에 자리한 국립 도서관의 지하 어린이실은 놀이터처럼 꾸며놓았다. 전등의 모양까지 배려한 세심함이 놀랍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하긴 암스테르담 국립 도서관에 갔을 때도 그랬다. 그들은 도서관을 놀이터나 휴식 공간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서가와 열람실의 구분이 없고, 책과 음악이 공존했으며, 심지어 도서관 내에 자체 방송국이 설치돼 있었다. 도서관 어디를 가든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책상이 갖춰져 있었고, 개방된 세미나실과 꼭대기에는 웬만한 마트 규모의 식당과 카페가 마련되어 있었다.

책만 아니었다면 어린이 놀이터로 착각했을 지하 공간은 모서리 없는 서가와 쿠션, 방 크기만 한 소파 등이 '널브러져' 있었다. 벽과 천장에 설치된 전등까지도 동심을 고려해 세심하게 디자인돼 있었다. 1층에는 내키는 대로 가서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가 설치되어 있는가 하면, 층 전체가 다양한 음악을 꺼내 들으며 편히 쉴 수 있도록 앨범을 꽂아놓은 서가로 활용되는 곳도 있었다.

도서관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을 보며, 그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참 '편안하고 즐겁게' 공부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국립 도서관 꼭대기 식당에서 만난 두 어르신의 '학구열'은 잊히지 않는다. 족히 일흔 대여섯은 돼 보이는 두 어르신이 그리스어 초급 교본을 가지고 알파벳과 발음 기호를 서로의 노트에 적어가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연세에 다른 나라 말을 배워서 어디에 쓸까'라는 생각조차 불경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돋보기 안경 너머 그들의 치열하고도 해맑은 눈빛이 자못 감동적이었다.

규모의 차이는 있어도 위트레흐트 대학 도서관의 구조도 대개 비슷했다. 각 층은 물론 오르내리는 계단조차 개방돼 있어서 소란스럽고 어수선할 법도 하건만 다들 괘념치 않는 표정이었다. 귀마개를 끼고 면벽수도 하듯 공부하는 우리네 도서관 풍경과는 너무도 달랐다. 어디서든 책과 노트북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화를 했고, 그렇다고 눈치를 주는 사람은 없었다. 이래서야 제때 졸업은 할 수 있으려나 싶을 정도였다. 참고로, 네덜란드는 별도의 대학 입학시험이 없다. 대학 진학이 쉬운 만큼, 졸업하고 학위를 따기가 매우 까다롭다고 한다.

열람실과 통하는 구내식당도 그 흔한 출입문 하나 없이 개방돼 있다. 소란스러움도 그렇지만, 음식 냄새가 열람실과 서가에 배어들지나 않을지 괜한 걱정마저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들어서자마자 네덜란드 치즈의 독특한 향이 코끝을 찔렀다. 뷔페식으로 원하는 음식을 각각 그릇에 담은 뒤 무게를 달아 계산하는 방식이었는데, 그래선지 다들 잔반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특이한 건, 도서관 내에서는 현금 결제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식당이나 매점을 이용할 때는 물론, 심지어는 자판기에서 0.5유로짜리 커피 한 잔을 뽑아 마실 때도 현금을 사용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신용카드가 보편화됐다고는 하지만, 대부분 현금과 겸용하도록 돼있다. 듣자니까 이곳 대학 자체적으로 화폐 없이 생활하는 실험을 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식당의 운영방식부터 도서관의 구조, 대학 건물의 배치, 나아가 위트레흐트 거리 곳곳이 온통 낯설다 못해 '깨는' 것투성이다. 명색이 '대학 도시'인데, 관행과 편견에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대학의 본령이라고 생각하면 딱히 놀랄 건 없다. 그러나 대학이 도시와 함께 호흡하고 있는 모습은 부럽기만 하다. 아참,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위트레흐트는 '대학 도시'가 아니라, 도시가 곧 대학이라는 사실을.

위트레흐트 대학 도서관은 현금 사용이 일체 불가능하다.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뽑아 마시려해도 카드를 사용해야 한다. 공정무역 상품이라는 로고가 눈에 띈다.
▲ 화폐 없는 세상 실험중? 위트레흐트 대학 도서관은 현금 사용이 일체 불가능하다.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뽑아 마시려해도 카드를 사용해야 한다. 공정무역 상품이라는 로고가 눈에 띈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태그:#베네룩스, #위트레흐트 대학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