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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둔사에 활짝 핀 납월매. 해마다 남도의 봄소식을 앞장서 전해주는 꽃이다.
 금둔사에 활짝 핀 납월매. 해마다 남도의 봄소식을 앞장서 전해주는 꽃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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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달같이 달려오던 봄의 발걸음이 주춤했다. 큰 추위 없이 곧장 봄으로 이어지는가 했더니, 아니었다. 한 차례 들이닥친 한파가 가까이 와있던 봄을 다시 밀어냈다. 하지만 자연의 순리는 거스를 수 없는 일. 다시 봄의 기운이 더 강해지기 시작했다. 아직 꽃을 시샘하는 추위가 남아있지만, 봄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직감한다.

젊은 연인들처럼, 계절도 '밀당'에 들어간 모양이다. 겨울과 봄이 서로 밀고 당기기를 거듭하면서, 시나브로 봄이 우리 곁에 다가온다. 입춘이 지난 지 벌써 여러 날이다. 설날 연휴를 보내면서 바람결이 한결 보드라워졌다. 그러고 보니 절기상 우수가 며칠 남지 않았다.

새봄을 마중하러 간다. 지난 10일이다. 해마다 분홍빛 옷고름 휘날리며 봄소식을 앞서 전하는 전라남도 순천이다. 섣달부터 피고지는 납월매(臘月梅)가 이른 봄소식을 전하는 곳이다. 그 가운데에 금전산(668m)이 품은 절집 금둔사가 있다.
 
순천 낙안에서 바라본 금전산 전경. 금전산의 중턱에 금둔사가 자리하고 있다.
 순천 낙안에서 바라본 금전산 전경. 금전산의 중턱에 금둔사가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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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둔사 일주문. 옛 절집에서 풍기는 기품은 없지만, 해마다 납월매로 봄소식을 앞장서 전해주는 절집이다.
 금둔사 일주문. 옛 절집에서 풍기는 기품은 없지만, 해마다 납월매로 봄소식을 앞장서 전해주는 절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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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들판을 내려다보는 금전산 중턱의 금둔사는 본디 통일신라 때 지어졌다.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사라진 절집을 지허스님이 1983년부터 복원했다. 고색창연한 옛 절집의 기품은 없다. 그럴지라도 납월매로 봄소식을 일찍 전하면서 해마다 이맘때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는 절집이다.

메타세쿼이아 나무 줄지어 선 길을 따라가면 일주문이 반긴다. 계곡을 가로질러 놓인 돌다리를 건너 대웅전과 만난다. 한파로 발걸음이 더뎌진 봄이 대웅전 앞마당에 여장을 풀어놓고 있다. 산신각, 설선당 등 전각 사이에서 분홍빛깔의 홍매화가 꽃망울을 속속 터뜨리고 있다.

화사한 분홍빛 꽃에 눈이 환해진다. 황량하던 마음에도 금세 봄빛이 스며든다. 봄마중 나온 덕에 누리는 호사다. 꽃의 생김새도 겹겹으로 성글다. 외래종 매화와 달리 향기도 짙고 그윽하다. 한겨울에 꽃을 피우는 납월매의 고혹적인 매력이다. '납월(臘月)'은 불가에서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음력 섣달을 가리킨다. 음력 섣달에 꽃을 피우는 홍매화다.
 
금둔사에 핀 납월매. 해마다 겨울 칼바람과 추위를 견뎌내고 꽃을 피우고 있다.
 금둔사에 핀 납월매. 해마다 겨울 칼바람과 추위를 견뎌내고 꽃을 피우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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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오락가락했어요. 원래 납월매는 12월에 피는데, 겨울 날씨가 따뜻해서 11월부터 피었지요. 한창 꽃을 피우다가, 지난달 찾아온 혹한에 꽃이 다 시들어 떨어져 버렸어요. 이제 다시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데, 올해는 개화가 조금 더디네요. 예년 같으면 지금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낼 때인데."

금둔사를 복원하고, 여기에 납월매를 심은 지허 회주스님의 얘기다.

스님의 얘기 때문일까. 겨울의 혹독한 칼바람과 추위를 견뎌내고 다시 꽃을 피우고 있는 납월매가 더 대견해 보인다. 예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납월매를 예찬하는 것도 이런 연유였을 터다.

'찬 서리 고운 자태 사방을 비춰/ 뜰 가 앞선 봄을 섣달에 차지했네/ 바쁜 가지 엷게 꾸며 반절이나 숙였는데/ 갠 눈발 처음 녹아 눈물아래 새로워라// 그림자 추워서 금샘에 빠진 해 가리우고/ 찬 향기 가벼워 먼지 낀 흰 창문 닫는구나/ 내 고향 개울가 둘러선 나무는/ 서쪽으로 먼 길 떠난 이사람 기다릴까.'

신라 때 시인 최광유가 금둔사의 매화를 보고 읊은 시 '납월매'다.
 
금둔사 납월매. 꽃의 생김새가 겹겹으로 성글다. 외래종 매화와 달리 향기도 짙고 그윽하다.
 금둔사 납월매. 꽃의 생김새가 겹겹으로 성글다. 외래종 매화와 달리 향기도 짙고 그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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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둔사에 핀 납월매. 꽃이 요사와 어우러져 더 멋스럽다.
 금둔사에 핀 납월매. 꽃이 요사와 어우러져 더 멋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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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 정말 진하지요? 본디 우리꽃의 향이 진해요. 꽃의 생김새와 열매의 양으로, 돈으로 따지는 외래종하고는 비교할 수 없지요. 예부터 꽃은 향기가 생명인데. 우리 선조들도 꽃의 향을, 매화의 그윽한 향을 음미하고 노래했잖아요. 지금은 모두가 외적인 아름다움만 좇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지허스님의 말에 우리꽃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배어있다. 납월매는 한꺼번에 꽃을 피웠다가 한순간에 다 떨어뜨리지 않는다. 나비와 벌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의 힘으로 오랫동안 피고지고 한다. 납월매의 힘이다. 우리꽃의 자존심이고 매력이다.

금둔사에는 납월매 여섯 그루가 자라고 있다. 지허스님이 절집을 복원하면서 낙안마을에서 얻어다 심은 것들이다. 낙안마을의 어미 납월매는 진즉 고사하고 없다. 이곳의 납월매가 한반도에 남은 마지막 납월매일 것이라는 게 스님의 얘기다.
 
금둔사에서 자유분방하게 자라는 차나무. 야생의 차나무가 절집 주변에 지천이다.
 금둔사에서 자유분방하게 자라는 차나무. 야생의 차나무가 절집 주변에 지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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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둔사 주지 지허스님이 삼층석탑과 석불비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금둔사에서 만나는 문화재다.
 금둔사 주지 지허스님이 삼층석탑과 석불비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금둔사에서 만나는 문화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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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을 둘러싸고 있는 차나무도 납월매와 함께 절집의 품격을 높여주는 귀한 존재다. 비료나 거름을 따로 주지 않고 야생이 키운 차나무다. 오래 전부터 봄과 가을에 잡풀을 베어 깔아주기만 했다.

수백 년 된 고목에서부터 10여 년 된 어린 나무까지 제멋대로 자라고 있다. 선다일여(禪茶一如)를 실천하는 절집답게 면적도 넓다. 3만 3000㎡가 넘는다. 지혜를 크게 해주는 차밭이라고 지현다원(知玄茶園)이다.

금둔사지 삼층석탑과 석불비상도 보물이다. 돌계단을 올라서 만나는 삼층석탑의 조각수법이 꽤나 세련됐다. 통일신라 때 양식이다. 석탑과 나란히 선 석불비상도 비슷한 시기에 조각됐다. 높이가 3m 가량 된다. 보물(제945호, 제946호)로 지정돼 있다.
 
금둔사 비로자나마애불상. 연잎 모양의 바위에 새겨져 눈길을 끈다.
 금둔사 비로자나불상. 연잎 모양의 바위에 새겨져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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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둔사의 약수. 싱그러운 새봄의 기운이 가득하다.
 금둔사의 약수. 싱그러운 새봄의 기운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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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잎 모양의 바위에 새겨진 해수관음보살과 비로자나마애불도 눈길을 끈다. 대웅전 앞마당을 지키고 서 있는 울퉁불퉁한 향나무도 별나다. 선방과 선방을 이어주는 돌담과 오솔길은 단아하다. 그 길을 따라 하늘거리는데, 납월매의 그윽한 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내 가슴도 새봄의 기운처럼 설렌다.

우리네 일상도 매향처럼 가슴 설레게 하는 일이 많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에도 순하고 따뜻해지면 더 좋겠다. 남도에서 기지개를 켠 새봄처럼.
 
금둔사 풍경. 절집의 선방을 이어주는 돌담과 오솔길이 다소곳하다.
 금둔사 풍경. 절집의 선방을 이어주는 돌담과 오솔길이 다소곳하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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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과 선방을 이어주는 돌담과 오솔길. 납월매의 그윽한 향이 넘실댄다.
 선방과 선방을 이어주는 돌담과 오솔길. 납월매의 그윽한 향이 넘실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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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찾아가는 길
호남고속국도 승주 나들목으로 나가 서평삼거리에서 낙안·벌교방면 857번 지방도를 탄다. 낙안·벌교 이정표를 따라 죽학삼거리와 금산삼거리를 지나면 금둔사 입구에 닿는다. 낙안읍성 민속마을 2㎞ 못가서 왼편에 있다.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납월매, #금둔사, #납월홍매, #지허스님, #홍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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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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