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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노래는 아니지만 북한의 유행가 가운데 '심장에 남는 사람'이라는 곡이 있다. 만해 한용운 '님의 침묵'의 '님'처럼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심장 속에 남은 이 있네"라는 강렬한 가사로 인해 들어본 이들이라면 기억할 수밖에 없는 곡이다.

북한의 정치인 중에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대부분의 전문가는 장성택을 꼽는다. 그는 평범한 혁명가 집안에 태어나 김일성의 딸이자, 김정일과 한몸에서 나온 김경희의 남편이 되어 북한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막 태동해 혼란하던 김정은 시대의 초반 정지 작업을 했고, 적잖은 공헌을 한 그는 2013년 12월 12일 갖가지 루머를 뿌리고 처형된다.

북한 전문가들에게 장성택의 처형은 김일성, 김정일의 사망에 비견될 만큼 큰 사건이었다. 그로 인해 나타날 수 있는 남북관계, 북중관계는 물론이고 북한의 국제외교에 큰 변화를 예고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신정의 불온한 경계인이라는 부제에 알맞게 복잡한 정치적 흐름을 탔던 장성택의 삶을 잘 재현했다
▲ 라종일 교수 신작 '장성택의 길' 표지 신정의 불온한 경계인이라는 부제에 알맞게 복잡한 정치적 흐름을 탔던 장성택의 삶을 잘 재현했다
ⓒ 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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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라종일 한양대 석좌교수가 쓴 <장성택의 길>(알마 간)은 당대 북한 정치에서 가장 복잡한 인물인 장성택을 온전히 우리 옆으로 끌어온 흥미로운 저작이다.

라종일 교수는 DJ정부에서 국가정보원 차장으로 시작해 대통령 비서실 국가안보보좌관을 역임한 국내 최고의 북한 전문가다. 2004년 주일대사로 갈 때까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 대통령의 복심으로 북한에 대한 전략부터 세세한 부분을 책임진 실무자였다.

이런 라종일 교수에게 장성택은 가장 연구해야 할 대상이었을텐데, 이번 책을 통해 그 당시 정책통들의 수준을 느낄 수 있어 반가웠다. 또 MB정부 이후 벌어진 난맥상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책을 읽어가면서 가장 큰 즐거움은 북한 수뇌부의 흐름을 보는 것이다. 과거는 미래를 볼 수 있는 거울이기에 북한의 과거를 보는 것은 한반도 문제를 보고자 하는 이에게 가장 필수적인 사항이다.

북한 수뇌부 흐름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말이 책의 부제(신정神政의 불온한 경계인)에서 사용된 '신정'이라는 말이다. 곧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최고 지도자 뿐만 아니라 '백두 혈통'으로 대표되는 김씨 집안의 구조를 이 책은 두루두루 보여준다.

이런 백두혈통과 혼사는 물론이고 김일성대학에 들어가기조차 어려운 성분의 장성택은 운좋게(?) 동년배인 김경희가 마음을 쏟게 되는 비극(?)적인 운명에 처한다. 다행히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은 김경희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더욱이 아버지 김일성으로부터 후계자로 완전히 자리하기 위해서 집안 정치력이 필요했던 김정일이 도와주면서 장성택은 신정 집안의 경계인으로 들어온다.

김경희와의 결혼으로 반신이 된 장성택은 김정일이 주관하는 파티의 주요한 멤버가 되면서 불가피하게 아내인 김경희와도 말하기 어려운 거리를 두게 된다. 이혼은 하지 않으면서 각자의 이성관계를 묵인해주는 묘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런 묘한 딜레마는 훗날 유일한 자식인 장금송이 자살하는 고통으로 이어진다. 고국이 강요한 결혼 압박으로 2006년 29살의 나이에 파리에서 목숨을 끊은 것. 유일한 자식의 죽음은 이 부부 사이를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좀 더 차갑게 만들고, 둘은 상처받은 채 죽음을 기다리는 짐승들처럼 스스로를 혹사하면서 살아간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2008년 여름 김정일이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북한의 정치상황은 더욱 복합하게 돌아간다.

후계자조차 세우지 못한 상황에서 자신의 건강 문제가 불거진 김정일은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신정의 한 구성원인 장성택을 선택한다. 장성택은 이 위기를 잘 극복해내고, 김정일로부터의 신임은 물론이고, 후계 구도를 짜는 중요한 역할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런 중요한 위치는 결코 완전한 신이 될 수 없는 피의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것도 타고난 팔자였다.

김정은 역시 등극 이후에 믿을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정치적 거목이 장성택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많은 권한을 준다. 하지만 장성택은 권력을 위해 모든 것을 내칠 수 있는, 또 자신을 위협하는 2인자는 싹부터 짤라야 하는 속성을 망각하는 일들을 종종 벌였다. 그 결과2013년 12월 결국 처형 당하는 처지에 이른다. 장성택의 처형을 두고, 저자는 다양한 근거와 역학관계를 통해 이유를 설득력있게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책의 가장 큰 미덕 가운데 하나는 북한 정치의 근간을 일반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쓴 것이다. 이런 룰을 안다면 최근 벌어진 북핵문제나 개성공단 폐쇄 과정이 쉽게 이해된다. 반면 이 정부의 핵심 브레인은 물론이고 전략통이라는 이들은 이런 기반 지식은 물론이고 간단한 외교의 원칙조차 잊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차이가 왜 생겼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가장 낭만적인 정치가였던 장성택은 '온갖 특혜를 누리더라도 사람은 애완동물처럼 살 수 없다'(217페이지)는 것을 보여준 드문 정치가다. 때문에 저자는 장성택의 처형으로 이 정도의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정치가가 북한에 10년 안에 나올 수 없을 것이다고 말한다.

이 말은 장성택이 생각했던 중국과 같은 개혁개방이나 국제관계를 감안한 핵무기 통제 등을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는 말이다. 결국 북한을 두고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신정국가'라는 확실한 전제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김정일의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나 성혜랑, 이한영 등 저자만이 가능했던 다양한 취재원들을 통해 장성택의 삶의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반입될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지만 김경희가 이 책을 읽는다면 진심으로 고마워 할 정도라고 본다.

역사의 곡절에는 수많은 인물이 나타나고 사라진다. 북한 당대 역사에서 장성택은 우리 역사로 본다면 정도전의 삶과 비교되는 인물로 느껴진다. 정도전이 새로운 권력자 이방원에 의해 제거되듯 장성택 역시 비극적으로 삶을 마무리한다. 때문에 이 책은 지루한 평전이 아닌 초한지나 삼국지 읽는 것 같은 흥미를 갖게 해준다.


장성택의 길 - 신정의 불온한 경계인

라종일 지음, 알마(2016)


태그:#장성택, #라종일, #김경희, #북한, #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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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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