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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일생동안 가장 꿈 많고, 가장 고민 많고, 친구들 간에 우정도 가장 많이 쌓고 성장하는 시기. 10대의 마지막을 보내며 여물어 성년을 준비하는 때.

'입시공화국'이 돼버린 대한민국에서 이런 시간들을 오롯이 지켜내고 있는 가톨릭 대안교육 특성화학교 양업고(교장 장홍훈, 충북 소재) 졸업식이 1월 29일 열렸다.

전국 각지에서 거주하는 학부모들을 위해 이날 오후 2시부터 시작된 졸업행사(졸업미사와 졸업식)는 오후 5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더욱이 졸업생을 비롯해 모든 교직원과 재학생 전원, 학부모와 친지들이 대거 참석하는 바람에 행사장은 돌아다니기 힘들 정도로 북적였지만, 불평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무려 3시간이나 되는 의식행사의 모든 내용들이 주인공인 16기 졸업생 39명에 맞춰졌기 때문에 무엇 하나 불필요하거나 무의미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지루할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졸업식에 앞선 1부 졸업미사에서 강론에 나선 장홍훈 교장신부는 졸업생들이 지원 당시 양업고를 선택한 이유로 가장 많이 꼽은 자유와 꿈을 언급하며, "지난 3년 동안 양업고에서 자유로웠는가" "꿈을 찾았는가" 물었다. "네~" 졸업생들이 밝고 힘찬 목소리로 응답했다.

평범한 식순에 담긴 의미

양업고에서는 졸업장을 졸업생과 학부모가 함께 받는다
▲ 졸업장 수여 양업고에서는 졸업장을 졸업생과 학부모가 함께 받는다
ⓒ 민주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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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은 의외로 평범한 식순으로 진행됐다. 학교마다 바람직한 졸업식 문화를 만든다며 공연 등 특색행사가 유행이지만, 이 학교는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교육의 본질을 추구해온 그간의 행보처럼 그저 해오던 대로 '양업스러운' 시간을 마련했다.

졸업장 수여, 축사, 시상, 영상시청, 송사와 답사, 축가와 답가, 교가 제창 등 매우 전형적인 형식들에는 스승의 마음, 상의 의미, 후배들의 정성, 떠나는 사람의 아쉬움이 진하게 담겼다. 졸업식 문화의 문제는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었음을 일깨우는 시간이었다.

졸업생들은 부모와 함께 앞으로 나와 교장으로부터 졸업장을 받는다. 전교생 기숙사 생활을 원칙으로 하는 이 학교는 가족관계를 중시해 매 주말마다 단 한사람도 예외 없이 학생들을 모두 귀가시킨다. 가족과의 소통을 위한 '가족관계숙제'라는 특별과제도 주어진다.

학부모들은 한 달에 한 번 부모교육과 회의에 참석하며, 학교의 주요행사에도 당연히 참여하기에 손님이 아닌, 학교의 일원이다. 졸업은 학부모에게도 3년 동안 정들었던 학교와 선생님, 심지어 학교가 위치한 마을과의 헤어짐을 의미한다. 부모와 함께 받는 졸업장은, 그런 의미다.

식사에 나선 장 교장신부가 졸업생들에게 묻는다. "지금 행복한 사람 있나요?" 이 순간을 행복하다고 해야 할지, 슬프다고 해야 할지 생각을 고르는 사이 누군가 그렇다고 대답을 했는가 보다. 교장이 학생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며 나오라고 한다. 한 남학생이 성큼 단상에 오르더니 마이크에 대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자리를 내어주고 뒷자리로 물러섰던 장 교장은 얘기가 길어지자, 아예 자리에 앉아 경청한다.

교장 대신 졸업생 즉석 연설

교장의 식사 시간에 즉석 소감발표를 하고 있는 졸업생. 자유로운 양업고의 분위기가 느껴진 시간.
▲ 즉석 소감발표 교장의 식사 시간에 즉석 소감발표를 하고 있는 졸업생. 자유로운 양업고의 분위기가 느껴진 시간.
ⓒ 민주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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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년 동안 학교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이해가 안 가는 일도 있었지만, 지나고 나니 모든 양업고에서의 생활이 인생의 백신같은거라 생각한다. 우리가 예방주사를 맞으면 쑤시고 열도 나지만 결국 그것이 병을 막아주지 않나. 그런 것처럼 3년 동안 무엇을 느꼈고 어떻게 살아갈지 말해보라면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앞으로 살아가면서 어떤 순간들을 만났을 때 양업고에서 배운 것들이 나올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 포함 16기 모두 수고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터지고, 이 학생은 유유히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꼭 얘기하라는 건 아니었는데, 많은 청중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을 줄 아는 당당함. 장 교장은 서운한 기색 하나 없이 "나보다 식사를 더 잘한 것 같아 내가 더 할 얘기가 없다"며 "한 사람의 영혼의 무게와 부피는 바다보다, 우주보다 무겁고 깊다. 양업고 16기 39명 졸업생 한 명 한 명의 젊은 영혼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가. 지난 3년 동안 여러분의 웃음소리와 활기찬 움직임은 바다를 가르고 우주를 뚫고 들려오는 천상의 소리였다. 행복한 양업고에서 배우고 받고 들은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벗으로서 함께 했던 부모님과 스승들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는 당부의 말로 마무리 했다.

이 학교가 어떤 분위기에서 학생들의 자유의지를 살려왔는지 짐작되는 순간이다. 하기야 교장에게도 '홍훈 신부님'이라 스스럼 없이 부르는 학교 아니던가.

이어 1998년 개교 당시부터 15년 동안 이 학교 교장을 지내며 기틀을 다진 윤병훈(청주교구 총대리) 신부가 축사에 나선다.

"어떤 학생이 양업고의 자랑은 밥맛이 좋은 거라고 하더라. 밥맛이 좋다는건 살맛이 난다는 얘기고 3년을 잘 지냈다는 얘기다. (양업고 학생들이 1학년 해외이동수업으로 가는 네팔 안나푸르나의 지진피해 복구 봉사에 여러차례 다녀온 경험담을 얘기한 뒤) 산을 오르는 것은 무척 힘이든다. 그러나 산을 힘들게 오르는 동안 시야는 변화되고 더욱 아름답게 달라짐을 알게 된다. 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이 똑똑히 보인다.

산에 오를 때 고통을 이겨낸 사람만이 정상에서 희열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또한 고통을 이겨내는 동력이 된다. 산에서 얻은 교훈을 십분 활용해 살아가기 바란다. 3년 동안 양업에서의 좋은 그림을 많이 그렸을 것이다. 힘들 때마다 그 그림을 자주 꺼내보며 살아가는데 힘찬 동력을 삼았으면 좋겠다.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다. 행복을 향해 성실히 매진하라"

웃음바다 된 졸업생 답사

재학생 후배들의 축가 '수고했어 오늘도'에 이어 졸업생들이 답가 '걱정말아요 그대'를 부른 뒤 박수를 치고 있다.
▲ 졸업생 답가 재학생 후배들의 축가 '수고했어 오늘도'에 이어 졸업생들이 답가 '걱정말아요 그대'를 부른 뒤 박수를 치고 있다.
ⓒ 민주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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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들이 직접 만든 3년 동안의 영상이 상영된다. 39명 선배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특성과 바람을 담은 문구가 인상적이다. 선후배간의 밀도 있는 관계가 보이는 듯 하다.

졸업식의 하이라이트인 재학생대표의 송사와 졸업생 대표의 답사가 너무 짧게 끝나 어리둥절 한데, 졸업생 대표가 부연설명을 한다.

"원래 더 길게 준비했는데, 앞서 좋은 말씀들이 많이 나와 시간관계상 다 잘라냈다"

눈물바람이 되어야 할 답사가 웃음바다가 된다.

학생자치문화가 일상화된 이 학교에서는 축가와 답가 역시 학생들 스스로 정한다. 올해 재학생 축가는 '수고했어, 오늘도' 졸업생 답가는 '걱정말아요, 그대'다.

"...후회 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노래하는 졸업생들의 얼굴이 빛나 보인다.

힘찬 목소리로 마지막 교가제창이 끝나고 나니, 이 학교 졸업식의 전통이라는 '석별의 정 나누기' 가 진행된다.

양업고 졸업식의 전통, 마지막 순서인 '석별의 정 나누기'. 교사와 재학생, 학부모들이 둘러서서 졸업생 한사람, 한사람과 포옹하며 축하의 말을 전하고 있다.
▲ 석별의 정 양업고 졸업식의 전통, 마지막 순서인 '석별의 정 나누기'. 교사와 재학생, 학부모들이 둘러서서 졸업생 한사람, 한사람과 포옹하며 축하의 말을 전하고 있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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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짐이 슬퍼서, 자유롭게 꿈을 꾸었던 소중한 시간들이 그리워서 끝내 눈물을 흘리는 졸업생들.
▲ 석별의 정 나누기 헤어짐이 슬퍼서, 자유롭게 꿈을 꾸었던 소중한 시간들이 그리워서 끝내 눈물을 흘리는 졸업생들.
ⓒ 민주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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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자들 모두가 큰 원 대형으로 서서 졸업생 한 사람 한 사람과 포옹하며 이별의 인사를 나눈다. 졸업식 내내 밝은 표정으로 웃고 박수 치며 즐기던 졸업생과 재학생, 교사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포옹하면서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만다. 특히 졸업생들은 3년 동안 단순한 지식전달자를 넘어 벗이자 부모였던 스승의 품에 안겨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성 빼고 이름 끝에 쌤이라는 호칭만 붙여 부르는 제자들을 버릇없다 탓하지 않고 품어주던 교사들도 제자들의 어깨를 토닥이며, 눈시울을 붉혔다.

헤어짐이 아쉽고, 행복한 시절을 더 즐기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해도, 이제 또 자신들처럼 이곳에서 꿈을 찾고 자유롭고 싶어하는 신입생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줘야 할 시간이다.  

인생의 가장 빛나는 3년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고교 졸업식의 의미를 충실히 담아낸 이날 행사가 끝난 뒤에도 졸업생과 학부모들은 한참동안 교정을 서성였다.

올해 양업고를 졸업하는 16기 학생들.
▲ 우리는 양업고 16기 올해 양업고를 졸업하는 16기 학생들.
ⓒ 김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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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양업고, #대안학교, #졸업식, #가톨릭, #대안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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