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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30일부터 31일, 1박 2일 일정으로 '빗간이섬'에 다녀왔다. 이젠 '횡간도'로 더 알려진, 여수 남면에 속한 작은 섬이다. 횡간도란 한자말보다는 '빗간이섬'란 옛 지명이 더 정겹다. 섬을 비껴 있다는 말이다. 작년 가을 가까운 교수님들과 이 섬을 처음 방문하였고 이번엔 겨울성경캠프를 구실로 교우들과 갔다.

죽은 갈매기를 장대에 매달아 두면 갈매기들이 근처에 오지 않는다고 한다
▲ 장대에 매달린 갈매기 사체 죽은 갈매기를 장대에 매달아 두면 갈매기들이 근처에 오지 않는다고 한다
ⓒ 정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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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간이섬에 가려면 돌산읍 군내항에서 하루 5회 운항하는 해동스타호를 타거나 작금항에서 사선을 이용해 들어가야 한다. 여수 여객선터미널에서 운항하는 배편은 없다. 작금항에서 배를 타면 불과 5분 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 내륙과 무척 가깝지만 도착하면 당장 별천지가 펼쳐진다. 제방엔 갈매기 떼가 즐비하고, 어민들이 녀석들을 쫓고자 본 떼기로 죽은 갈매기를 매달아 놓은 장대도 보인다.

물결은 잔잔한데 가랑비가 계속 내렸다. 다들 따뜻한 방에 눌러 앉아 스마트폰이나 만지작거리거나 한담하며 쉬고픈 눈치였다. 우산도 없는 교우들을 다그쳐 후박나무숲부터 데려갔다. 수령 삼백년 넘는 천연기념물 후박나무 20여 그루가 하늘을 뒤덮고 원시림을 이룬 곳이다. 이 숲을 보지 않고 "빗간이섬에 가보았노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빗간이섬 마을 뒷산 후박나무숲 가는 길
▲ 후박나무숲 가는 길 빗간이섬 마을 뒷산 후박나무숲 가는 길
ⓒ 정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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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어느 곳에서도 이처럼 울창하고 아름다운 후박나무숲을 본 적이 없다. 전국 어디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빗간이섬 마을 뒷산 나무들의 키가 대부분 작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높이 20m, 둘레 2.5m에 이르는 장대한 후박나무숲'은 기이할 정도다. 마을 사람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오랜 세월 이 숲을 잘 보존해왔을까?

숲속을 들어가면 그 중앙의 고목 근처에 벽돌을 쌓아 만든 작은 움막이 하나 보인다. 당산제의 제관이 하룻밤 머물던 제당이다. 주민들에 따르면 빗간이섬 당산제는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정월 대보름 즈음 해마다 열렸다. 후박나무숲에 얽힌 추억거리를 들려달라면 약속이나 했다는 듯 모두가 그 당산제 이야기를 하였다.

빗간이섬의 후박나무숲
▲ 후박나무숲 빗간이섬의 후박나무숲
ⓒ 정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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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제가 시작되면 각 가정마다 정성껏 온갖 음식을 장만해 가져왔다. 그날엔 누군가 식탐을 부리며 아무리 많이 먹어도 혼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른바 '음복'(飮福)이다. 마을 주민 전체가 한상에서 먹고 마시며 종일토록 잔치를 벌였다. 풍물패가 집집마다 돌며 열두 마당을 하는 동안 사람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그 뒤를 따랐다. 이날만큼은 섬 마을 주민 모두가 한데 어우러져 제사하고 춤추며 한 해 동안 우환과 재난이 없고 자손이 두루 복 받도록 빌고 또 빌었다.

제관은 마을에서 가장 착실하고 큰 우환을 겪지 않은 사람에게 맡겼다. 그는 당산제가 열릴 즈음에는 부부관계를 금하고 일체 부정 타는 일을 하거나 보지도 않아야 했다. 당일에는 동네 뒷산 초입의 공동 샘에서 냉수욕을 한 뒤 후박나무숲으로 올라간다. 가다가 돌부리에 걸리기만 해도 내려와 다시금 목욕재계해야 했다. 그렇게 캄캄한 후박나무숲 제당에서 홀로 하룻밤을 지새우는 동안 얼마나 무서웠을까? 한 할머니는 칠순 넘게 살면서도 이 제당이 '무서워' 지금껏 한 번도 들여다보지도 못했단다.

고목이 다 된 당산나무 근처에 보이는 제당
▲ 당산나무 근처의 제당 고목이 다 된 당산나무 근처에 보이는 제당
ⓒ 정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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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간이섬 주민들은 당산 말고도 백년 넘게 관왕(關王) 숭배했다. 관왕숭배란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 장군을 신격화해 섬기던 민간신앙을 말한다. 당산제는 이 관왕숭배와 결합되어 있었던 것 같다. 제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관왕묘가 있다. 빗간이섬의 관왕신과 당산신은 흐지부지 허망한 죽음을 맞았다. 신자가 사라지면 신도 죽게 마련이다. 섬 주민들은 학교, 교회, 텔레비전 등의 영향으로 관왕신과 당산신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

지금은 백여 명 안팎인 전체 주민의 절반 가까이가 마을 교회에 다닌다. 그 중에는 빗간이섬 최고의 메구꾼(상쇠)도 있다.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은 마을 화합을 위한 제사를 드린다면 돈을 낼 수는 있지만 당산제에 참석하진 않겠다고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어느 해 제관으로 뽑힌 사람이 당산제 무렵에 아내와 심한 말다툼을 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그해는 당산제를 걸러야했는데 이듬해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져 당산제는 흐지부지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명절마다 고향을 찾는 이들은 마을의 큰 축제였던 후박나무숲 당산제를 떠올리며 다시 볼 수 없어 많이 아쉬워한다. 한 주민은 "요새는 메구보다 더 재미있는 텔레비전, 스마트폰 같은 게 있어 그런 거 다시 해도 옛날 같지 않고 흥도 나지 않을 거"라 했다. 더욱이 섬 주민 대부분이 고령이라 풍물패를 꾸릴 수조차 없는 상태다. 어느덧 이 섬의 유일한 초등학교는 폐교된 지 오래고 마을의 빈집도 많아졌다.

빗간이섬의 사라진 마을 축제는 다시 열릴 수 있을까? 젊은 귀농자들이 생겨나 기존 당산제에서 미신적 요소를 덜어내고 마을 공동체의 축제 한마당으로 잘 승화시킬 수만 있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사라진지 20여 년 밖에 되지 않아 주민 대부분이 기억에 생생하므로 복원도 크게 어렵지는 않아 보인다. 언젠가 이 섬에 다시금 멋진 후박나무숲 축제가 열리고 마을에 활력이 넘치기를 기대해 본다.


태그:#여수 횡간도, #빗간이섬, #당산제, #후박나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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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솔샘교회(solsam.zio.to) 목사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 함께 꿈꾸며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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