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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서쪽 교외 고다이라 시내 중심부 공원에는 울창한 잡목림이 있다. 시민들이 무시로 찾는 명소라고 한다. 2009년 이곳을 관통하는 도로 건설 계획이 발표되었다. 반 세기 전에 수립된 계획이었는데, 현재로서는 건설 타당성이 별로 높지 않아 보였다. 마침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도로가 공원 부근을 지나고 있었다.

공원과 잡목림을 아끼던 대다수 시민들은 도로 건설 계획에 반대했다. 건설 계획이 철회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시 당국은 도로 건설 추진 작업을 본격화했다. 시민들을 대상으로 형식적인 설명회를 개최했다. 이에 반대 시민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주민투표조례 발의 서명을 받아 투표를 진행했다.

투표율은 35.17퍼센트로 나왔다. 하지만 투표율이 50퍼센트에 미달하면 투표가 무효가 되고 개표하지 않는다는 조례 수정안에 따라 시민들의 뜻은 관철되지 못했다. 투표 용지 공개를 요구하는 재판이 상고 법정(대법원)까지 갔으나 무산되었다.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날 시 당국은 시장실 결재로 투표용지 5만 000여 장을 신속하게 파기했다. 이 책 <다가올 민주주의>의 출발점이 된 '사건'이었다.

▲  <다가올 민주주의> 겉표지
 ▲ <다가올 민주주의> 겉표지
ⓒ ⓒ 오래된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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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민주주의>는 일본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가 썼다. 인상적인 책이다. 주권자(국민)를 무시한 정책이 행정에 의해 결정되어 시행된다. 어떻게 민주주의 사회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문제의식 아래 여전히, 또는 영원히 미완성인 민주주의 문제를 풀어가고 있는 정치철학서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개념화 한 '다가올 민주주의'가 해법 모색의 디딤돌이다.

지금의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정치체제 안에서는 "거기 비켜!"라고 말하면 비켜야 하고, "그거 이리 줘!"라고 말하면 넘겨줘야 하는 그러한 행태는 아직 없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한 일이 태연하게 행해지고 있다. 즉 "민주주의라는 이름에 걸맞은 값을 하는 민주주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다가올 것으로 남아 있다." 민주주의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민주주의는 실현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가 지향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경우 '다가올 민주주의'란 실천을 요구하는 명령이다. (203쪽)

'다가올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저자의 문제의식이 터를 잡고 있는 지점은 크게 두 가지다. 의회제 민주주의(의회제도)의 근원이 된 근대정치철학의 한계가 첫 번째다. 저자에 따르면 의회라는 입법부의 힘으로 모든 것을 통치할 수 있다고 보는 전제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실제로 통치를 위한 많은 결정을 내리는 것은 행정이기 때문이다. 사실상의 통치 행위를 행정이 한다는 것.

이에 뒤따르는 두 번째 문제가 심각하다. 국민들은 선거를 통해 입법 권력에 부분적으로 관여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의 통치 과정에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행정 권력에는 거의 관여할 수 없다. 도지사나 시장 등 지방자치단체장을 뽑는 일을 할 수 있으나 실제 개개의 정책이 실행되는 과정에는 전혀 간섭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사회를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저자는 그 이유를 행정기관은 결정된 일을 실행하는 집행기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찾는다. 국민의 주권을 입법권으로 보는 근대정치철학의 전제가 강력하기 때문에 매사를 결정하는 행정의 결정 과정에 국민이 전혀 관여할 수 없어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법은 행위의 제한이니까 법이 많으면 많을수록 국가는 전제적이게 된다. 이에 반해 제도는 행위의 모델이니까 제도가 많으면 많을수록 국가는 자유로워진다. 제도가 있어서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행위의 수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중략) 전제란 많은 법과 약간의 제도를 갖춘 정치체제이고, 민주주의란 많은 제도와 극소수의 법을 갖춘 정치체제이다. (147~148쪽)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말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결론의 전제와 출발점으로 삼기 위해 내세운 주요 논지가 담겨 있다. 저자는 의회 제도의 개선과 같은 일원론적인 해법 구상만으로는 진짜 민주주의에 다가서기 힘들다고 말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행정의 결정과정을 복수화한 체제, 가령 주민투표나 공론수렴제도의 강화 시스템을 제안한다.

이즈음 수 권의 민주주의 저작들을 읽고 있다. 국내 학자들 책은 거의 없다. 이진경 등 수유너머N 연구원들이 주축이 되어 쓴 <국가를 생각하다> 정도가 국내 학자가 쓴 책 중 볼 만했다. 민주주의의 이상과 허상, 현실과 미래를 구체적인 현장 사례에 터해 분석한 국내 저작을 언제쯤 볼 수 있을까.

<다가올 민주주의>는 일본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본질과 한계를 깊이 돌아보도록 만든다. 시민들이 실제 일어나고 있는 지역 현안에 관심을 갖고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자연스럽게 깨닫게 해 준다. "민주주의라는 이름값을 하는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실현을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205쪽)라는 저자의 마지막 말이 크게 다가오는 이유다.

제20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내년에는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예정돼 있다. 저자의 문제의식에 따르면 4~5년마다 돌아오는 선거와 투표 '따위'만으로는 더 온전한 민주주의공화국 건설이 요원해 보인다. 이 책을 통해 '다가올 민주주의'의 의미를 깨닫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다가올 민주주의: 왜 민주주의 여전히 미완성일까?>(고쿠분 고이치로 지음, 김윤숙 옮김 / 오래된생각 / 2016.1.10. / 254쪽 / 1,3000원)

덧붙이는 글 | 정은균 시민기자의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렸습니다.



다가올 민주주의 - 왜 민주주의는 여전히 미완성일까?

고쿠분 고이치로 지음, 김윤숙 옮김, 오래된생각(2016)


태그:#<다가올 민주주의>, #고쿠분 고이치로, #주민투표, #의회제 민주주의, #정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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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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