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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요! 대한민국 어린이들!
 힘내요! 대한민국 어린이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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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가 있다. 강원도에 대한 큰 오해. 내가 삼척에서 교사하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부러워한다. 같은 월급이면 공기 깨끗하고 물 맑은 곳에서 신선놀음하면 얼마나 멋지냐고 한다. 학교에 제자들이 직접 캔 더덕을 가져오냐고 물어본 친구도 있었다. 빈정거리는 그 녀석의 이마를 삼척 홈ㅇ러스 멤버십 카드로 한 대 치고 싶었다. 2003년 개봉한 영화 <선생 김봉두>의 강렬한 이미지는 여전히 유효한 듯했다. 하긴 선생인 나도 목장 소풍을 간 경험이 아니었다면 몰랐으리라.


 
영화 <선생 김봉두> 포스터. 대표적인 강원도 편견 메이커.
 영화 <선생 김봉두> 포스터. 대표적인 강원도 편견 메이커.
ⓒ 시네마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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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가을 횡성의 한 목장으로 소풍을 갔다. 출발하기 몇 주 전 체험학습 계약을 마치고 혼자 두근거렸다. '상쾌하게 산책하며 양과 소들이 살고 있는 산속 보금자리를 구경하는 코스라니!'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안 그래도 시골에 사는 녀석들을 더 깊은 산골짜기로 데려가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철컥철컥' 출발하는 날 아침, 버스 안에서는 좌석벨트 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괜히 아이들 눈치가 보였다. '선생 좋자고 가는 여행도 아닌데...' 오늘 하루만큼은 특별히 친절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안전점검 하면서 아이들의 표정을 살폈다. 평범했다. 흥분과 들뜬 기분을 눈빛에서 읽을 수 없었다. 시선을 얼른 회피했다. '에ㅇ랜드나 롯ㅇ월드에 간다고 했으면 입꼬리가 하늘까지 솟았겠지?' 부릉부릉 고속도로의 차들이 버스를 추월해갔다. 시작부터 김이 빠졌다.


"차가운 소똥 냄새다!'"



더운 버스 안에서 졸고 있던 아이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목장 안내판을 보고 누군가가 창문을 열었고 그 사이로 서늘한 기운과 묵직한 향기가 들어왔다. 뒷자리에 탄 세민이가 코를 막았다. 그 옆자리에 있던 호동이는 인상을 찌푸렸고  두 칸 뒤에 있던 지혜도 손을 얼굴 쪽으로 갔다 댔다.



'기어코 이렇게 되는구나' 혹시나 했던 불안이 현실이 되어 펼쳐지고 있었다. 목적지를 잘못 설정한 탓이라 여기고 침울해지려던 찰나, 먼저 버스에서 내린 무리가 내지르는 함성이 들렸다.



"우와~ 여기 진짜 짱이야!!"


 
이 땅에서 소도 풀을 뜯고 사람도 달리며 논다.
 이 땅에서 소도 풀을 뜯고 사람도 달리며 논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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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인원들도 짐을 챙겨 나갔다. '아~ 푸르다!' 끝없이 펼쳐진 초지가 나타났다. 고개를 좌우로 돌려 보았다. 싱싱한 녹색 식물들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안구정화라는 말을 설명하기에 딱 알맞은 순간이었다. 약간 경사진 비탈을 따라 잔디보다 부드러운 풀이 촘촘히 자라고 있었다. 생김새와 질감이 독특하여 안내원에게 물어보니 '티모시' '오차드' '그라스'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관람객이 없으면 소들이 내려와 풀을 뜯어먹는다고 했다. 좀비처럼 처져있던 아이들이 풀밭으로 뛰어갔다.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무언가에 이끌리듯 나아가는 그들을 따로 제지하고 싶지 않았다.


소가 자유롭게 먹고 노는 땅에서 우리 꼬맹이들이 뒹굴며 웃고 있었다. 신난 꼬마들은 폭신한 목초 위에 눕거나 양말 차림으로 초원을 내달리기도 했다. 여자아이들은 키 큰 나무 아래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했다. 피자 만들기 체험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관계자에게 30분만 늦게 해 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바람은 시원했고 풍경은 아름다웠다. 카메라를 들어 인상적인 장면들을 기록하고 나도 아이들 틈으로 끼어들었다.


 
지구에 다양한 생물이 살고 있다는 진리를 확인하는 아이들.
 지구에 다양한 생물이 살고 있다는 진리를 확인하는 아이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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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강원도 끄트머리에 붙은 인구 7만명가량의 삼척시 초등학생들이 겪은 목장 이야기다. 위성지도로 보면 거주지는 코딱지만 하고 짙푸른 자연의 모습만 가득한 지방 소도시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이렇다. 우리 아이들은 영화 <선생 김봉두> 속 강원도 학생처럼 더덕을 캐는 능력이 없다. 또 순하디순한 당나귀에게 먹이 주는 일을 어려워했고, 소똥 냄새는 낯설어했다. 일기장엔 풀밭에서 뛰어놀았던 추억이 일 년 중 가장 특별했다고 적은 고백이 수두룩했다. 


하물며 큰 도시에 사는 또래들은 어떻겠는가? 강원도가 죄다 오지 깡촌일 거라는 오해보다 어른들이 먼저 풀어야 할 오해가 있다. '어린이들이 그냥 잘 자라고 있다'는 속 편한 오해. 한국의 어린 친구들은 세계에서 제일 공부를 많이 하고 몸과 마음은 지쳐있다. 이들은 행복하게 성장할 권리가 있다. 아이들에게 풀 밟을 기회와 시간을 주자. 아인슈타인도 문제가 안 풀리면 뜨끈하게 목욕을 하면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까지 기다렸다. 우리도 좀 믿고 기다려주자.

 

태그:#친환경, #목장, #자연,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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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산지니 2021>, <선생님의 보글보글, 미래의창 2024> 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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