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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세계가 시끌시끌했다. 사고 이후 핵발전소가 안전하고 친환경적인 시설이 아니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나는 부산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부산 시내에서 차로 30분만 이동하면 기장군에 있는 고리 핵발전소를 만날 수 있다. 일본에서 일어난 사고가 부산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것 같았다. 제2의 후쿠시마가 되지 않기 위해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2011년 여름, 학생운동을 함께하던 동료와 부산 기장군 신고리 핵발전소가 건설 예정인 마을에 찾아갔다. 그 마을은 이미 신고리 핵발전소 건설 예정지로 지정돼 한전과의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가 할 수 있었던 건 오랜 시간 동안 핵발전소 문제로 싸워왔던 주민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이었다. 그리고 평생 한마을에 살다가 이주하게 될 마을 주민의 소소한 추억을 남기기 위해 '포토 에세이'를 만드는 활동을 하려고 했다.

당시 학생활동가들은 제2의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일어나지 않기 위해선 신고리 핵발전소가 건설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현장 활동에서 '반핵'을 주요 슬로건으로 외쳐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마을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해운대역 앞에서 발대식을 열고 "주민 밀어내는 핵발전소 당장 건설 중단하라!"라고 외쳤다. 우리의 활동은 <국제신문> 사회면(주민 밀어내는 핵발전소 건설 안 돼)에 실렸다.

마을이 발칵 뒤집어 지다

2011년 5월 30일 건설 중이었던 신고리 핵발전소 3·4호기.
 2011년 5월 30일 건설 중이었던 신고리 핵발전소 3·4호기.
ⓒ 배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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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대식을 마치고 신고리 핵발전소 건설 예정 마을로 들어갔다. 학생활동가들은 부산환경현장활동이 언론에 보도돼 신이 난 상태였다. 하지만 우리를 기다리던 마을 주민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마을 이장은 국제신문 기사가 현재 마을 상황과 맞지 않다고 말해줬다. 현재 마을은 이주대책을 협상 중인데 기사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반핵운동을 시작한다고 하니, 주민들 입장에서는 난감했던 것이다. 의욕에 앞서 외쳤던 구호가 마을 사람들에게는 독이 됐다.

결국 마을에서 철수하게 됐다. 활동을 시작하지도 못한 채 마을에서 하루 묵고 조용히 철수했다. 활동에 실패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단순히 마을 사정을 잘 알지 못했다는 반성뿐이었다. 다음에 활동을 할 때는 제대로 사전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마을에서 철수한 이유는 동일한 입장에 서지 못했기 때문

우연히 활동을 마치고 신영복 선생이 쓴 <강의>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을에서 철수한 것은 마을 주민들과 활동가 사이의 관계가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았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한국 사회에서 '관계'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글을 쓴 신영복 선생의 가르침이 필요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강의> 중에서)

책을 읽다가 혼자 신이 났다. 신고리 핵발전소 예정 마을에서 철수한 이유를 제대로 꼬집는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신고리 핵발전소 예정 부지 마을주민들과 동일한 입장에 서지 못 했던 것이었다. 그저 우린 '반핵'이라는 우리의 입장만 강요했던 것이다. 주민들의 생존권 문제에 대해서 단 한 번도 고민하지 않았던 것이 우리가 마을에서 철수한 진짜 이유였다.

우리는 낮은 자세로 사전에 주민들과 만나 상의를 했어야 했다. 그들의 입장에 맞춰서 환경현장활동 주요 슬로건을 만들어야 했다. 의욕에 앞서 '반핵'을 외치기 전에 말이다. 아쉽고 후회가 남았다. 우리의 고집을 버리고 주민들 입장에 서서 활동을 기획했다면 2011년 여름 부산환경현장활동은 핵발전소 건설로 마을을 떠나야 하는 주민들에게 큰 추억이 됐을 테다.

선생님. 청구회 추억과 함께 편히 가십시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빈소가 16일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 대학성당에 마련되었다. 신 교수는 지난 2014년 피부암 진단을 받아 투병중, 최근 암이 다른 장기로 급속히 전이되면서 병세가 악화되었다.
▲ 성공회대에 마련된 고 신영복 교수 빈소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빈소가 16일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 대학성당에 마련되었다. 신 교수는 지난 2014년 피부암 진단을 받아 투병중, 최근 암이 다른 장기로 급속히 전이되면서 병세가 악화되었다.
ⓒ 성공회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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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새벽 신영복 선생의 부고를 들었다. 사회운동을 하면서 큰 울림을 줬던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어떻게 추모를 할지 고민이 앞섰다. 직접 빈소에 찾아가서 인사를 하는 게 맞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찾아가진 못했다.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선생이 살아생전에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이야기를 더욱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우연히 신영복 선생의 기사를 검색하다가 '청구회 추억'이라는 영상을 볼 수 있었다. '청구회 추억'은 신영복 선생이 여섯 꼬마들과 보낸 2년 남짓한 시간을 추억하며 감옥에서 쓴 글이다.

'청구회 추억'에서 인상 깊은 장면은 어린 꼬마들과 관계를 시작하는 신영복 선생의 태도다. 선생은 어린 꼬마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들의 입장에 서서 고민하며 말을 거는 사람이었다.

"어린이들의 세계에 들어가는 법은 첫 대화를 무사히 마치는 일이다. 꼬마들에게 던지는 첫마디는 반드시 대답을 구하는 질문을, 그리고 어린이들이 가장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놀림의 느낌이 전혀 없는 질문을 궁리하며 말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꼬마들과 선생은 매달 정기적으로 모이게 됐다. 모임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더 흥미롭다. 꼬마들은 매번 예정된 약속 시각보다 일찍 약속 장소에 나왔다고 한다. 시간에 맞춰 나와도 된다는 선생의 말에 꼬마들은 '모임을 하는 게 너무 기대돼 일찍 나왔다'며 선생에게 부담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선생보다 오히려 꼬마들이 선생과의 만남에 더 큰 의미를 두고 매번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던 것이다.

모임은 시간이 지날수록 건설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선생과 꼬마들은 매달 10원씩 자기 손으로 번 돈을 저금하자고 뜻을 모았다. 그리고 함께 독서하며 생각을 나누고 선생이 함께하는 모임들을 연합해 따뜻한 봄날에 소풍을 가 서로의 삶을 배우는 자리도 만들게 된다.

'청구회 추억'은 선생이 작은 공동체에서 얻은 아름다운 추억이다. 사실 사회운동을 하면서 회의감도 많이 느꼈다. 아등바등해도 부패한 정치는 바뀌지 않고 자본주의 경제는 뒤집히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독서 모임에서 사람들과 무언가를 작당을 할 때 세상은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크게 역사는 바뀌지 않아도 잘못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삶을 바꿔가고 있었다. 작은 공동체에서 사람들과 소소한 실천을 함께할 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영복 선생의 말을 우린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의 장기성과 굴곡성을 생각하면, 가시적 성과나 목표 달성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과정 자체를 아름답게, 자부심 있게, 그 자체를 즐거운 것으로 만드는 게 중요해요. 왜냐면 그래야 오래 버티니까. 작은 숲(공동체)을 많이 만들어서 서로 위로도 하고, 작은 약속도 하고, 그 '인간적인 과정'을 잘 관리하면서 가는 것"

신영복 선생님, '청구회 추억'과 함께 안녕히 가십시오.


태그:#신영복, #신영복 부고, #청구회 추억, #청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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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 부산본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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