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13일 오전 서울 용산구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TV 모니터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 대국민담화 발표 생중계를 지켜보고 있다.
▲ 박근혜 대통령 대국민 담화 지켜보는 시민들 지난 13일 오전 서울 용산구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TV 모니터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 대국민담화 발표 생중계를 지켜보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제 의무는 말을 하는 겁니다. 저는 역사의 공범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 에밀 졸라

1893년 1월 13일은 작가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발표한 날이다. 당시 에밀 졸라는 드레퓌스 사건이 프랑스의 수치로 기억될 것을 두려워해 펜을 집어 들었다. 왜 드레퓌스 사건이 프랑스의 수치였을까?

사건의 발단은 파리 주재 독일대사관에서 프랑스군 기밀이 적힌 메모가 발견되면서부터였다. '명세서'라고 불린 이 메모엔 프랑스군이 사용하는 포의 재원, 그리고 포병대 배치도가 상세히 담겨 있었다. 19세기엔 포병의 비중이 날로 커지는 추세여서 관련 정보는 고급 군사기밀에 속했다. 게다가 적국인 독일 대사관에 기밀이 흘러들어 갔기에 프랑스는 큰 충격에 빠졌다.

프랑스에서 반역자로 몰린 드레퓌스

군 당국은 즉각 진상조사에 들어갔다. 이어 포병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를 용의자로 지목했다. 훗날 끈질긴 구명운동에 힘입어 진범은 페르디낭 에스테라지 소령으로 드러났으나, 군 당국은 한동안 드레퓌스가 범인이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 속내는 아주 복잡했다.

19세기 프랑스군에는 변화의 물결이 밀어닥쳤다. 무엇보다 장교 육성 과정이 근대식으로 개편됐다. 장교의 출신배경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고급 장교 중에는 과거 귀족 출신이 많았다. 그러다가 이 시기 즈음해서 자수성가한 유대인 출신 신흥 엘리트가 속속 군 장교로 임관되기 시작했다. 드레퓌스 사건의 두 주인공 에스테라지와 드레퓌스가 그랬다. 드레퓌스 대위는 신식 교육을 받은 유대인이었던 반면 에스테라지는 구 귀족 출신이었다.

사실, 당시 모든 정황은 에스테라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문제의 명세서가 발견되기 이전 에스테라지는 6차례나 독일 대사관을 방문했다. 에스테라지는 정부를 두며 호화생활을 했고, 그래서 품위 유지비가 많이 필요했다. 그러나 군 당국은 이 점을 문제 삼지 않았다. 마침 프랑스 사회엔 반 유대주의가 횡행했다.

따지고 보면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군 내부에서 벌어진 신구 세대 간 싸움에 반 유대주의가 뒤얽힌 일대 혼란이었던 셈이다. 지금도 역사가들은 드레퓌스가 신식 군사교육을 받지 않았고, 유대인이 아니었다면 용의자로 지목될 가능성이 작았을 거라는 데 대체로 견해를 같이한다.

결국 드레퓌스는 역적으로 몰려 유배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활발히 이뤄졌다. 먼저 가족들이 그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지식인들이 여기에 동참했다. 작가 베르나르 라자르는 <법정 오류 –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이라는 책을 써서 드레퓌스 재판의 허점을 조목조목 짚어냈다. 이러자 여론 사이엔 재심 요구가 높아졌고, 군 당국은 마지못해 재심에 나섰다.

살해 협박에도 침묵하지 않은 에밀 졸라

바로 이 대목에서 에밀 졸라가 등장한다. 드레퓌스 사건은 재심 과정에서 조작임이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었다. 그런데도 군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군의 체면이 실추될 것을 더 걱정했다. 에밀 졸라는 드레퓌스 사건을 둘러싼 일련의 전개과정이 프랑스의 명예를 더럽힌다고 보았다.

그의 필봉은 칼보다도 더 매서웠다. 그는 당시 공화국 대통령 펠릭스 포르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며 이렇게 써내려갔다.

"역겨운 드레퓌스 사건이 당신의 이름을, 아니 당신의 정권 그 자체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진실과 정의를 파괴하는 최악의 오점입니다. 일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프랑스는 더럽혀졌습니다. 역사는 당신의 정권 아래에서 프랑스 사회를 배반한 범죄가 자행되었다고 기록할 것입니다."

프랑스는 다시 한 번 발칵 뒤집혔다. 여론은 '드레퓌스주의자'와 '반 드레퓌스주의자'로 갈렸고, 서로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며 격렬히 대립했다. 졸라에게도 화가 몰아닥쳤다. 가톨릭이 중심이 된 반 유대주의자들은 그에게 살해 협박을 가했다. 명예훼손 소송도 이어졌다. 결국 그는 후폭풍에 시달리다 영국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그러다가 1902년 자택에서 가스 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지 4년 뒤 법원은 드레퓌스의 무죄를 확정했다.

지난 13일 오전 서울 용산구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TV 모니터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 대국민담화 발표 생중계를 지켜보고 있다.
▲ 박근혜 대통령 대국민 담화 지켜보는 시민들 지난 13일 오전 서울 용산구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TV 모니터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 대국민담화 발표 생중계를 지켜보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2016년 1월 13일 대한민국 서울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기자회견에 앞서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과 기자 간 '즉각적인 질의응답'이 이뤄진다"고 약속했고, 이 같은 호언장담은 주요뉴스로 다뤄졌다.

사실 기자회견은 즉각적인 질의응답을 하고자 열리는 것이다. 게다가 대통령은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자신의 철학을 활발히 개진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이번 기자회견도 치밀한 각본 하에 진행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전혀 새삼스럽지 않게도 말이다. 대통령은 앞서 두 번의 신년기자회견을 가졌었다. 두 차례 모두 사전 조율된 각본에 따라 회견이 이뤄졌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런데도 이번 기자회견에서는 박 대통령이 '기자들의 질문을 다 기억하고 있다'고 자랑까지 했다. 이쯤 되면 언론도 부끄러운 수준이다.

1893년 프랑스와 다른 2016년 1월 13일 한국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를 기고했던 19세기 프랑스 사회와 21세기 대한민국 사회는 여러모로 닮은꼴이다. 사회적으로 만연한 현상, 타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가 특히 그렇다. 그러나 1898년 프랑스에서 지식인들, 언론인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드레퓌스 재심과 무죄판결을 끌어낸 주인공이 바로 당시 지식인들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21세기, 특히 2008년 이명박 정권 집권 이후 대한민국 언론은 민감한 쟁점이 불거질 때마다 정권의 편에 서서 '물타기'에 앞장서 왔다.

과거 에밀 졸라는 자신의 기고문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자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진실이 전진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늪지대를 지나가야 하는 것일까."

오늘날 대한민국의 많은 언론인은 어떨까? 과연 험한 늪지대를 지나가려고 생각이나 할까? 1893년과 여러모로 대조를 이루는 2016년 1월 13일의 풍경이었다.


태그:#에밀 졸라, #드레퓌스 사건
댓글10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