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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화에서 이어집니다)

한국에 전해진 것보다 뉴욕타임즈 움직임을 하루 먼저 알아챈 최고의사결정연구단 다케우치 료타 기획조정실장은 바빠졌다. 모든 사실을 감추기 위해 수용소에 수감돼 있는 문제가 될 만한 미결수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빼돌렸다. 그리고 기사에 나온 동북수용소 관계자들을 모두 문책하고, 긴급히 방호복을 지급해서 기사 내용은 대부분 거짓이라고 반박할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긴급회의 때 다나카 단장은 다케우치를 질책했다.

"다케우치 실장, 일을 하려면 신속한 것도 좋지만 잡음이 생겨서는 안 된다고 몇 번씩이나 다짐하지 않았나. 한국인도 아니면서 뭐가 그리 급해. 그 결과, 이게 무슨 세계적인 망신이냐고.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일단 뉴욕타임즈 기사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부정할 것입니다. 동북수용소를 언론에 공개하고, 관계자들의 실수로 빚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려 해프닝으로 마무리할 계획입니다. 거짓말도 방편이니까요."

"그것은 계획일 뿐이고. 만일 국내에서 의회는 물론 시민단체들이 그런 사실에 대해 규명을 요구하고 나서면 여론을 어떻게 잠재울 수 있겠어. 한 번 불붙기 시작하면 들불처럼 번질 것이 뻔하지 않은가."

"거기에 대해서도 대비책이 있습니다. 지난 번 한국에서 벌어진 핸드폰과 인터넷 대란 때 우리 일본에서 뿌린 백신을 활용하면 여론이 불거지는 것을 충분히 막을 수 있습니다. 인터넷 스크린과 특정 단어 선택문 금지 장치를 통해서 악성 여론의 전파와 악성 기사 인터넷 유포를 차단시키면 됩니다."

다케우치는 일본을 인터넷과 언론의 '갈라파고스섬'으로 만들겠다는 얘기다. 다나카는 다케우치의 이런 주도면밀한 대책에 더 이상 책잡을 수 없게 됐다.

"자네, 그 말에 대한 책임을 확실히 져야 할 걸세. 자리를 걸고서라도."

회의를 끝낸 다음 다나카는 다케우치를 다시 불렀다.

"미우라 총리님, 말씀 들었나?"

"무슨 말씀이신지요."

"선양에 대한 건, 자네가 주장했던."

"아, 네.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비밀리에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건은, 만일에 외부에 노출이 될 경우 자네가 독단적으로 충정어린 마음에서 한 일이라는 점을 확실히 해두고 싶네."

"어떤 뜻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분명하게 해 주셔야 뒤에 오해가 없을 것 같습니다."

"만일이라고 했지 않나. 모든 일이 은밀하게 진행된다고 해도 만에 하나 의도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그때는 연구단 전체가 흔들리는 불행한 상황이 올 수도 있고. 그런 상황을 사전에 막기 위해서 자네 선에서 모든 책임을 종결하는 고육지책을 쓸 수밖에 없다는 말이야."

"……. 네, 알겠습니다."

다케우치는 속으로 '개XX'를 몇 번이나 되뇌면서 단장실을 나온다. 결국 자신의 손에는 피를 안 묻히고, 그 전리품만 갖겠다는 얘기다. 그래서 남자는 구멍가게라도 자기 사업을 하든, 무슨 일을 하려면 그 일에 최고가 되려 하는 것인가 보다.

2011년 영화 <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 상사(Horrible Bosses)>에 나오는 사이코 사장 데이브 하켄(케빈 스페이시)과 다나카 단장은 꼭 빼다 박았다. 출근 시간 전에 회사에 나와도 무조건 자기보다 늦으면 지각이라고 우긴다. 승진을 빌미 삼아 일을 죽어라 시킨 다음 나 몰라라 한다. 무슨 일이든 아랫사람들 의심부터 하고 본다. 부하 직원 공(功)을 자기 것으로 가로채는 데 선수다. 그런 인간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도 너무나 흔한 게 문제다.

영화 <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상사(Horrible Bosses)>에서 사이코 사장인 데이브 하켄(케빈스페이시)은 부하의 공을 가로채는 선수다.
 영화 <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상사(Horrible Bosses)>에서 사이코 사장인 데이브 하켄(케빈스페이시)은 부하의 공을 가로채는 선수다.
ⓒ 영화 '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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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에서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구린내가 나는 곳이나 뭔가 조금이라도 뜯어 먹을 수 있는 곳에는 온갖 똥파리가 날아드는 것처럼 몰린다. 그 모습은 사자가 뜯어 먹고 남긴 영양의 피라도 핥기 위해 저희들끼리 싸우는 하이에나처럼 극성스럽다. 하지만 법적이나 도덕적으로 책임을 질 일에는 야쿠자나 대기업 오너처럼 이른바 '바지 사장'을 내세운다. 지금 다나카는 다케우치에게 최악의 경우 '액막이'를 자처하라고 간교하게 주문한 것이다.

미우라가 만나보라는 사람은 궁내청 장관 쿠로다 아키히로다. 내각부 소속으로 총리가 실질적으로 임명하고, 일왕이 형식적으로 인증하는 직책이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정치적 인물일 수밖에 없다. 내밀한 얘기를 나눌 만큼 보안이 되고 통제된, 다케우치가 자주 찾는 일식집이다.

"장관님, 미우라 총리님께 전반적인 말씀은 들으셨죠?"

"네, 그렇습니다. 아주 잘 결정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아시다시피 저희도 조마조마 합니다. 폐하께서 연로하셔서 그런지 자꾸 돌아가실 날 받아놓은 분처럼 자신 이름에 오점을 남기지 않는 데만 온힘을 쏟고 계셔서요. 물론 그게 사람 사는 이치이기는 하죠. 하지만 한국에 대해 과거를 진심으로 사죄해야 한다, 우리가 폐를 끼친 것 갚아야 한다는 둥 너무 핀트가 엇나간 말씀을 공식화하려고 해서 궁내청이 아주 애먹고 있습니다. 이번 한일 외교 사태에 대해서도 상당히 언짢아하시고 있고요."

"그래서 이번 일을 진행하게 된 것이죠. 일단 장관님께서 아주 완곡하게 주청을 드리셔야 하고요. 황실 어른 몇 분들께는 미우라 총리님께서 직접 언질을 주신다고 하셨으니까 절차상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해 주시는 것 빼놓고요. 말미는 12월 23일 천황 폐하 탄신일 전까지 잠정적으로 잡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동궁직 쪽에도 일러 황태자님을 은밀하게 준비시키겠습니다."

"진행하시다가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제게 연락 주시면 됩니다."

"잘 알겠습니다. 다케우치 실장님만 믿겠습니다."

일본인들이 모두, 아니 대부분 그야말로 '흠숭(欽崇)'해 마지않는 폐하를, 이런 골방 밀실에서 목을 떼었다가 붙이는 꼴을 일본인 대중들이 안다면 기절초풍을 하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일왕도 하나의 인간에 불과하다. 대개 사람들이 그렇듯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디선가 엮여지고 구부러져 갈지자로 살다가 가는 것이다. 아마 지금 일을 꾸미고 있는 다케우치나 쿠로다도 마찬가지일 게다.

미국의 조야가 시끄러워졌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움직임을 눈감아 준 것이 화근이라는 자체 분석이다. 미국의 금과옥조인 인권이라는 가치를 업신여기는 일이 일본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기사는 충격이었다. 그것도 미국이 아시아에서 대표적인 민주주의 국가이자 맹방으로 꼽는 일본이 그 당사국이다. 그렇다고 뚜렷하게 비난하거나 제재할 수 있는 방법도 없고, 상황도 아니라 더욱 골치다. 일단 그 충격적인 일을 확인하고 여파를 최소화하는 데 힘을 쏟는다.

주미 일본대사관 공보담당 와타나베 세이준 참사관은 기사를 쓴 뉴욕타임즈 기자를 만난다. 참으로 난처하게도 일본계 미국인 패트릭 가와구치다.

와타나베 참사관은 조금 화가난 어조로 말한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기사를 쓴 것인지 심히 유감스럽습니다."

가와구치 기자는 와타나베를 빤히 쳐다보면서 대꾸한다.

"기사를 제대로 읽어보셨나요? 그 정도 근거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일본 정부에도 이에 대해 확인을 요청했지만 몇 번씩이나 거부했고요."

"확인해 줄만한 게 아무 것도 없으니까 당연한 일이죠. 일본에 가 보셨나요? 어떻게 가 보지도 못한 현장에 대해 묘사하고 기사를 쓸 수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참에 한 번 방문해서 현장을 살펴보시죠?"

"확인하는 게 능사는 아닙니다. 후속 기사를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근거 없는 기사를 또 쓰겠다고 하시면, 법적인 대응을 하겠습니다."

"네, 얼마든지요. 일본에서는 비판 기사에 이런 식으로 통제하시나보죠?"

"아닙니다. 근거가 불분명하고 소문에 근거하는 기사에 대해서만 그렇죠."

"루머 또한 기사의 취재원인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확인을 요청했고요. 그리고 명백하게 사진이 있고, 관계자들의 전언도 있는데 더 이상 무엇을 요구하시는 겁니까. 이런 식으로 언론의 손을 비틀지 마세요."

와타나베는 가와구치에게는 얻을 게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공관으로 돌아가서 대사에게 후속 기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한다. 대사는 다시 본국에 상황이 더 심각하다는 내용의 전문을 보낸다. 그 전문의 내용은 최고의사결정연구단에게도 전달된다.

다케우치는 미국의 반응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는다. 일단 국내 언론에서 미국의 기사는 눈을 씻고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 없도록 통제시켰다. 그리고 기사를 번역해서 실린 문건에 대해서는 자체 검열시스템에 의해 즉시 삭제를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다. 의외로 일본에서 반응이 없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다케우치는 미국에 나가 있는 정보요원을 찾는다.

"NYT 기사에 대해 조사해 봤나? 결과 보고는 그때그때 즉각적으로 하라는 지시 못 들었어? 현재 파악된 것만 보고해 봐."

다케우치는 일본 정보관련 모든 기관의 촉각을 곤두세워 자료의 출처에 대해 알아보라고 명령했다. '직보'를 통해 들어오는 대로 즉시 보고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정보요원 보고는 역시 다케우치의 짐작대로였다. 가와구치 기자에게 자료를 제공한 곳은 IP 추적 결과, 일본이다. 그리고 무선인터넷 이메일로 보내졌는데, 그 장소는 도쿄 중심가였다. IP는 확보했으니 나머지 세부 사항은 본국에서 알아봐야 한다는 내용이다.

다케우치는 관련 부서에 바로 IP추적과 보낸 사람을 특정하라고 주문했다. 그리고 도대체 이런 핵심 기밀이 어떻게 빠져나가게 됐는지 되새겨봤다. 오하라가 가장 의심스러웠지만 지금 오하라는 혼수상태다. 그렇다면 그 중간에 개입한 사람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이 모든 소란을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확신했다.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치워버린다는 게 다케우치다. 그가 제거해야 할 인물이 하나 더 늘었다.

악행의 씨앗을 뿌린 다케우치에게 수확의 계절이 찾아왔다. 미나미 겐조 의원이 노트북 동영상을 보면서 음흉한 웃음을 짓는다.

"다케우치, 너는 이제 끝이다."

스텔라로부터 받은 동영상이었다. 스텔라는 교묘하게 자신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했다. 하지만 남자의 얼굴은 또렷하다. 바로 다케우치다. 다케우치가 스텔라를 때리고 강간한 장면이 그대로 담겨진 동영상이다. 스텔라는 미나미와 다케우치가 개와 원숭이 사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를 다케우치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믿을만하다고 여긴다. 모자이크 처리한 여성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미나미에게 다케우치 범행이 담긴 자료를 넘겼다. 모자이크한 여성이 재판이 있게 될 경우 법정에서 반드시 증언을 할 것이라는 얘기도 전했다. 자기 자신이 그럴 생각이다.

영화에서는 대개 성폭행이 일어났을 때 동영상을 찍는 것은 남자들이다. 2004년 대한민국을 부끄럽게 만든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프로 영화화한 '한공주(2013)'에서는 성폭행 가해자인 남자 고교생들이 핸드폰으로 성폭행 장면을 찍는다. 그리고 인터넷에 올리겠다며 피해자 한공주(천우희)를 협박해서 잔인한 성폭행을 이어간다.

이 영화보다 한 해 앞서 개봉된 영화 <돈 크라이 마미>에서도 주인공 은아(남보라)는 짝사랑했던 친구 동호(신동호) 꾐에 빠져 동호를 비롯 동호 친구 둘에게 강간당한다. 그 현장에서 다른 친구에 의해 성폭행 당하는 은아를 동호는 동영상으로 찍는다. 이후에도 그 동영상을 유포하겠다는 협박으로 은아를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끝내 은아는 자살한다.

영화 <돈 크라이 마미>에서 친구의 꾐에 빠져 고교생 3명에게 성폭행 당한 은아(남보라)는 결국 자살하고, 엄마(유선)은 무죄로 방면된 가해자들에게 복수를 한다.
 영화 <돈 크라이 마미>에서 친구의 꾐에 빠져 고교생 3명에게 성폭행 당한 은아(남보라)는 결국 자살하고, 엄마(유선)은 무죄로 방면된 가해자들에게 복수를 한다.
ⓒ 영화 '돈 크라이 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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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가해자 남자들 '전유물'처럼 악용된 성폭행 동영상이 피해자인 여성 스텔라의 무기로 변한 것이다.

이제 다케우치는 스텔라와 미나미의 공동의 적이 됐다. 그를 파멸시키기 위한 공모가 시작된 것이다. 미나미는 이 사실을 다나카에게 전했다. 다나카는 이 동영상 하나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다케우치를 벼랑 끝으로 몰, 쓸모 있는 무기가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아차렸다.

"이제 폐하께서 피날레를 장식할 일만 남았어. 그 늙은 여우와 겉멋만 잔뜩 든 애송이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튼튼하고 정교한 덫이 놓아졌군."


태그:#NYT, #갈라파고스, #영화 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 상사, #영화 한공주, #영화 돈 크라이 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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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ella Vita! 인생은 아름답다며, 글쓰기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세계일보, 머니투데이, 한경비즈니스, 이코노미조선 등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9년 '아산문학' 공모전에서 '그는 제바닷타였을까'라는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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