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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엽은 한국과 현대사회에서 여성과 생명, 공존 문제를 다양한 예술행동으로 펼치고 있는 작가다. 여성노동, 멸종위기 동·식물, 팥을 중심으로 한 곡식 작업 등으로 자신의 삶과 떨어지거나 다르지 않은 예술형식을 고민해 왔다.

왜곡된 여성 현실과 노동문제를 터, 두렁, 여성미술연구회, 입김, 갯꽃 등의 모임을 통해 바로잡기 위해 힘 써왔다. 또한 황해미술제 전시기획과 지역 활동, 한국현대미술선 출판미술 활동도 작업의 연장으로 실천하고 있다. 정 작가는 "예술의 평화적 충돌이 가장 싼 값에 '공존'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2011년 가을, '팥'과 '오색 콩' 작품으로 '날것들의 아름다움'을 갤러리 스케이프에서 보여준 바 있다. 그 사이 5년이 흘렀다. 열다섯 차례 '작업실 변천사'를 겪고 안성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2016년 벽두, '벌레'로 열 번째 개인전을 연다. 싹, 나물과 나방, 열매 등 구질하고 징그러울 수도 있는 미산리 마을의 생명들을 도시의 세련된 중심 무대로 이끌고 나온다.

싹과 벌레 그리고 썩은 과일 그림

정정엽 작. 162x130cm  oil, acrylic on canvas  2015
▲ 싹2 정정엽 작. 162x130cm oil, acrylic on canvas 2015
ⓒ 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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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소재들은 달래, 두릅, 당귀, 냉이, 질경이, 고들빼기, 감자, 고구마 그리고 가지 등이다. 그리고 수십여 종의 벌레들이 꽃비 내리듯 쏟아지는 작품도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시골에서 늘상 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낯설다.

감자, 고구마 같은 경우 싹이 돋았다. 외계 물체 같은 데다가 기괴한 느낌마저 든다. 감자와 고구마를 이렇게 그린 화가가 또 있을까? 고흐도 '감자를 먹는 사람'을 그렸지만, 감자만을 그리진 않았다.

정정엽 작가가 그린 감자싹과 나물 그림은 그들 자체로써 격조와 존재감, 생명의 황홀감을 펼쳐 보인다. 그것도 현대 문명이 추구하는, 티끌 하나 살지 않는 세련되고 럭셔리한, 초대받지 않은 공간에 느닷없이 불쑥 나타나 당혹스럽고 놀라게 한다.

감자들은 세포가 증식되고 거대하게 자라 내장을 드러낸 채 말끔한 현대식 건축 공간에 놓였다. 기묘한 긴장감을 주면서 관객을 압도한다. 이를 지원하는 나방도 날아든다. 이들이 문명과 공존·화해를 하려는 것 같아 엉뚱하면서 순진하고, 애틋하면서도 우직해 보인다.

정정엽 작. 162x130cm  oil, acrylic on canvas  2015
▲ 싹4 정정엽 작. 162x130cm oil, acrylic on canvas 2015
ⓒ 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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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는 엄마의 양수에 담겨 탯줄로 숨 쉬고 밥도 먹고, 똥도 싼다. 인간은 여성의 생리와 양수를 통해 생명의 싹을 틔우지만, 그 모습을 마냥 신비롭게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관념에 젖어있다.

정정엽 작가가 그린 싹을 틔운 감자는 아기를 낳은 엄마나 할머니 배의 모래톱과 같은 숭고한 주름을 닮았다. 씨감자와 싹의 모습은 여성의 배, 자궁, 탯줄, 생리혈을 연상시키기 위해 선택된 소재로 보인다.

정정엽의 '싹' 연작들은 자신의 몸을 자양분으로 생명을 키우는 모성의 힘과 놀라움을 보여준다. 생명이 거세된 현대 생활 공간에 '싹'의 기괴한 모습을 대비시켜 모성이 사라지고, 여성을 섹시함으로만 몰아가는 왜곡된 사회적 통념을 뒤엎으려는 뜻도 담겨있다.

정정엽 작. 162x130cm  oil, acrylic on canvas  2014
▲ 학일리에서 주운 과일 정정엽 작. 162x130cm oil, acrylic on canvas 2014
ⓒ 정정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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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일리에서 주운 과일'은 마치 밀레의 이삭줍기를 연상시키는 감동이 있다. 수확을 끝낸 가을 저녁 들녘, 허리 숙여 벼이삭을 줍는 아낙의 마음이 겹쳐진다. 제3세계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노동이요, 심정일 게다.

과일 그림은 얼마나 흔한가. 마트에 사과도 생명과 동떨어진 코팅 포장된 상품일 뿐. 학일리에서 주운 열매들은 바람이나 병충해로 가지에서 '투두둑' 떨어져 버림받은 과실들이다. 모두 그냥 지나칠 썩어 버려진 과일 앞에 작가는 멈춰 섰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그것들을 담아와 작업실로 돌아와 그림으로 살려냈다.

버림받은 과일이라 상품이나 돈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한 곳도 있고 상처 속에는 농염한 씨앗도 살아있다. 이들도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생명체요, 살림살이의 방편이다. 이런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그림에 담겨있다.

이들의 존재감과 씨를 품고 있는 생명력은 성한 삶 못지 않은 존귀한 아름다움이 있다. 오방색 프레임은 정제되고 가공된 미의식에 대한 반기(反旗)로도 읽힌다. 또한 가공된 미의식에 치우쳐 성형을 부추기는 세태에 대한 일격이기도 하다. 이는 현대 인간 사회의 단면을 품고 있는 중의적 정물화로써 미술교과서에 실리면 좋을 그림이다.

정정엽 작품. oil acrylic on canvas,162x130cm 2014
▲ 지구의 한마을-나방1 정정엽 작품. oil acrylic on canvas,162x130cm 2014
ⓒ 정정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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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된 현대미술과 독점자본에 대한 반기

나방그림은 크기에서 압도한다. 그냥 볼 수 없었던 나방의 눈과 표정, 자세도 카리스마 넘친다. 나비와 달리 야행성인 데다 불빛을 보면 달려드는 성가신 존재로 여겨진다. 비록 가루와 모노톤의 색감이 혐오스러워 인간들은 피하려 하지만, 자연에는 나비뿐 아니라 나방도 생태계의 일원으로 엄연히 존재한다. 작가는 이를 장엄한 모습으로 캐스팅한다.

정정엽의 이번 '벌레'전에는 그동안 뿌린 씨앗들이 발아하듯 온갖 생명의 소리가 들린다. 부스럭거리고, 수런대고, 움트는 소리. 소리의 정체는 나물과 나방 그림이 단순한 풍경이나 정물이 아니라 생명감과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설정임을 알 수 있다.

작가는 가공된 캔버스천이 아닌 생광목천을 전통시장에서 주문해 사용한다. 까슬까슬한 천의 표면에 갈필로 정성들여 그리기도 하고. 재빠르게 문지르기, 흘리기, 뿌리기 등 다양하고 특이한 기법으로 기운을 살려내기도 한다. 일상의 비루한 소품들을 불러내어 지구의 한 마을에 존재하는 생명과 현실감을 절묘한 형식으로 구현해낸다.

정정엽. 마을-고들빼기,162x130cm, oil on canvas, 2013
▲ 마을-고들빼기 정정엽. 마을-고들빼기,162x130cm, oil on canvas, 2013
ⓒ 정정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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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고들빼기' 사이로 유혈목이 '스르륵' 지나고, 계단에서 싹수 터진 감자가 '어기적'거리며 내려온다. 나방 그림에는 오래된 허름한 집에서 나는 비루한 냄새와 선풍기 바람이 '붕붕' 인다.

달래의 이파리와 뿌리들은 경쾌한 율동으로 '획획' 바람을 일으키고 '싹싹싹' 움트는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이전에 보여준 '팥' 작업이 묘사가 아닌 지워 내는 방식으로 그리는 일상의 축적이고 시라면, 이번 벌레전의 '싹' 작업은 생명과 존재의 기운을 더듬 듯 담아 내는 일상의 놀이요, 산책이다.

촌스러움은 일면 현대사회에서 죄악으로 몰린다. 그러나 정제되고 포장된 맛들은 멀지 않아 들통 난다. 날것들은 상상 이상으로 힘이 세다. 거대자본과 문명사회의 부작용을 최소화 할 수 있는 숨통이요, 내릴 수 없는 깃발이다.

현대미술이 안개 속을 헤매며 대중과 불통한다면 더불어 공존하는 삶은 가꾸기 힘들어진다. 정정엽의 최근 작업은 돈과 물질, 경쟁으로 내몰리는 배에 평형수 같은 무게감을 갖고 있다. '벌레' 전에 걸린 28여 점의 생산물은 정제된 현대미술과, 대량으로 생산 소비되는 독점 자본에 대항해 '맞장' 뜨는 그림들이기도 하다.

정정엽 작. 162x130cm,oil on canvas, 2013
▲ 마을-밭두릅 정정엽 작. 162x130cm,oil on canvas, 2013
ⓒ 정정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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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정정엽 개인전
2016.1.21-2.27
갤러리 스케이프 :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58-4
Tel: 02-747-4675 Fax: 02-747-4676
www.skape.co.kr

정정엽
1985년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1995년 이십일세기 화랑에서 첫 개인전 <생명을 아우르는 살림>
1998년 금호미술관과 2009년 대안공간 아트포럼 리 등 지금까지10회의 개인전을 가졌고,
단체전은 2002년 광주, 광주비엔날레을 비롯, 2004년 독일, 지겔란트 박물관 <한-독 여성작가> 전
시카고 해외 순회전시 등 수십차례 참여하였다.



태그:#정정엽, #벌레전, #스케이프, #박건, #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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