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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저씨가 뭐라고 씨부렁거리는 거야!"




교육복지 아동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아지 토피어리 만들기' 수업 시간이었다. 학생에게서 '씨부렁거린다'는 말을 들었다. 교직 경력 7년, 키 182cm에 몸무게 80kg. 본인은 애가 무심코 던진 말에 이불 뒤집어쓰고 우는 신규강사도 아니고, 신체가 왜소해서 힘 좀 센 녀석들이 우습게 여기는 스타일도 아니다. '초딩'이라면 어느 정도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학교에서 소문난 말썽쟁이나 까탈쟁이가 반에 꽂혀도 잘 버텨냈다. 그런데 2학년짜리의 말 한마디에 울컥하고 말았다. 내 덩치의 1/3도 안 되는 여학생에게 일순간 적의를 느꼈다.




'참자. 여기에는 외부 강사와 보조 인력도 있다.'



그런데 이 학생이 다시 말을 했다.



"아이고, 이 아저씨가 갑자기 말을 안 하네. 크크크."




인내의 안전벨트가 끊어졌다. 나는 문밖을 가리키며 나가라고 했다. Y양은 대답을 회피하고 딴청을 피웠다. 잠시 당황스러웠다. 저학년들은 보통 선생님을 잘 따르고 좋아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서워서라도 말을 잘 듣는다. 그녀는 새로운 캐릭터였다. 목소리가 커지자 다른 참가자들이 우리 쪽을 흘끔 쳐다보았다. 빨리 말도 안 되는 상황을 해결하고 싶었다.



아직 젊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나이 들었나



"예의 바르게 말해야지. 나쁜 어린이는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도 안 줘."




'피식.'




살짝 올라간 왼쪽 입고리, 들릴락 말락 한 숨소리. 아래로 내리깐 시선. 소녀는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꼰대.'




2학년이라 꼰대라는 말을 모르겠지. 꼰대라는 단어를 알고 있었다면 분명 속으로 떠올렸으리라. 스스로 아직 젊고, 생각도 낡지 않았다고 여기며 살았다. 그런데 꼰대라니...  9살 먹은 어린 친구의 무례함보다 꼰대 취급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잔소리를 좀 더 하려다 그만두었다. 잠시 뒤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살갑게 굴었다. 그런 모습이 귀엽게 느껴져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강아지 토피어리 만들기를 마쳤다. 프로그램이 끝난 후 교실 정리를 하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나이 드는 게 이런 것인가?'




단발머리의 키 작던 그 여자애가 특별히 별나거나 싹퉁머리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나를 '꼰대' 취급한 대상 '1호'였다. 세월이 갈수록 주름살과 꼰대 취급 사례는 더 빈번해지리라. 서글픈 감정이 들었다. 100세 시대에 서른밖에 안 된 새파란 놈이 할 말은 아니지만 정말로 늙고 싶지 않았다.



 
나이 듦에 대하여 큰 깨달음을 준 강아지 토피어리 선생
 나이 듦에 대하여 큰 깨달음을 준 강아지 토피어리 선생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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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왔다. 학교에서 만든 강아지 토피어리에 물을 주었다. 마른 이끼 사이로 수분이 퍼져나가며 밝은 황토색이던 표면이 갈색으로 변했다. 흠뻑 젖은 토피어리는 마른 상태보다 더 늙어 보였다. 어두운 피부빛, 물 무게 때문에 쳐진 귀, 눈가에 고이는 눈물. 강아지 모습은 개에 가깝게 되었다.



낮에 했던 '나이듦에 대한 고민'이 떠올라서 개(?)가 안쓰러워졌다. 무생물이긴 하나 연민이 들어 볼살 부위를 만져보았다. 이끼의 질감이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습기를 머금은 자연물질이 스스로 습도를 조절하며 천연 가습기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더불어 물에 적셔진 토피어리만이 제 몸에 심긴 식물을 살릴 수 있다.




가만히 보니 사람도 별반 다르지 않다. 연륜이 쌓이면 외관은 쇠퇴하지만 경험은 풍부해지고 노련해진다. 또 부모가 되면 자신들에게 의지하여 살아가는 자녀들을 힘껏 키워낸다. 이런 일들은 멋지게 나이 든 어른들만이 가능하다. 이제 새로운 1월이 시작되었다. 글을 쓰는 동안 한 살을 더 먹었다. 꼰대가 되는 건 싫지만 나이 먹는 게 나쁘진 않다.




고마워 강아지 선생!
 

태그:#새해, #교권침해, #나이, #꼰대, #로또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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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산지니 2021>, <선생님의 보글보글, 미래의창 2024> 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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