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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코스모스

낮보다 밤에 빚어진 몸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병이 비치는 피부를 타고났다

모자 장수와 신발 장수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끔은 갈비뼈가 묘연해졌다
죽더라도 죽지 마라
발끝에서 솟구쳐

사랑은 온몸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는 나의 바지다
나도 죽어서 신이 될 거야
그러나 버릇처럼 나는 살아났다

검은 채소밭에 매달리면
목과 너무나도 멀어진 얼굴
두 마리의 물고기가 그려진 국기처럼 서로 마주 봤다

멀리서부터
몸이 다시 시작되었다

<온갖 것들의 낮>. 유계영
 <온갖 것들의 낮>. 유계영
ⓒ 정대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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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첫 시집을 낸 유계영 시인은 자신의 시집 <온갖 것들의 낮>에서 위의 시 '시작은 코스모스'를 처음으로 실었다. 시작을 이야기 하는 시에서 내가 찾은 것은 처음과 끝 사이에서 다시 시작되는 '몸'이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몸'은 왠지 씩씩해 보였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시의 '죽더라도 죽지 마라'는 구절과 '그러나 버릇처럼 나는 살아났다'는 구절 때문인 듯 했다.

시집의 해설에서 양경언 문학평론가는 "시를 읽는 일이 곧 시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이끌려 언어가 형성하는 다양한 세계로 이행하는 일이라면, 하여 그 목소리의 기운에 우리의 마음을 내어 주는 일이라면, 유계영의 시를 읽는 우리를 이끄는 목소리는 상자에서 막 빠져나와 생각을 시작한 레이디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이 말처럼 나 역시 유계영의 시를 읽는 내내 시의 분위기와 화자의 목소리에서 나오는 기운에 내 마음을 내어주고 그 목소리의 전후를 탐색했다. 누군가 말하는 "전체 책을 다 보면 그런 기운이 온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운'이었다.

시인의 이런 씩씩한 태도는 시집의 마지막까지도 이어졌다. 시집의 마지막 시 '녹는점'에서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 검은 부츠 속의 바지처럼 / 어금니를 꾹 문 채 시간을 보냅니다'고 했는데, 화자의 이 목소리는 쉽게 죽지 않고 오히려 '버릇처럼' '살아'나서 '사랑은 온 몸을 필요로 하지 않(시작은 코스모스)'다고 말하는 화자와 연결되는 듯 했다.

또한 시인은 표제시인 '온갖 것들의 낮'에서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며 '하나의 의문'을 가진다. 이런 의문은 우리들의 '낯'을 '온갖 것들의' 말로 돌려 시선을 주었을 때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양경언 문학평론가도 이 시집의 해설에서 "온갖 것들의 말에 눈을 돌릴 때, 우리는 새삼 그간의 엄숙한 질서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침묵에 빠뜨렸는지 깨닫는다. 계량화 된 쓸모의 기준에서 배제되었다 해서 굳이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 역시도. 강요된 질서를 따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내밀고 소란을 일으키는 '온갖 것들'은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표현을 빌려, 인간은 단순하게 정육점에 걸린 고기가 아니라고 말한다"고 했다.

가끔 예술가들의 작품을 볼 때면,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할 때가 있다. 그런 점에서 시를 읽을 때에도 새로운 표현 때문에 새롭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없는 얘기를 하지 않고 일상에 매몰되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해 줄 때가 많기 때문에 새로운 감정을 느낄 때가 많다.

시집의 제목이 '온갖 것들의 낮'인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시인처럼 우리도 씩씩하게 주위의 '온갖 것들'로 눈길을 돌려보면 어떨까. '늑대'에서 시인은 '자세를 낮추는 것이 사랑의 모양이라 배웠'다고 말하며, 아이를 낳는 것과 '둥근 가계도를 완성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 구절에서는 시인이 시선을 주는 '온갖 것들'과 합일하려는 태도가 느껴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인처럼 얼마나 '온갖 것들'에 시선을 주고 있는가. 시집의 첫 시, '시작은 코스모스'에서 '코스모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가을을 상징하는 코스모스는, 희랍어로 카오스(Chaos, 혼돈)를 대응하는 코스모스(Cosmos)로 쓰이기도 하는데, 이 때 코스모스는 '질서정연함' 또는 '장식'을 의미하고, 현대에 와서는 칼 세이건의 유명한 저서 <코스모스>가 말하는 것처럼 '우주'를 뜻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 시작을 말하는 '코스모스'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아마도 시인의 '온갖 것들'과 합일하려는 태도가 '경계 없음'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경계 없음'은 정해진 것들을 추구하며 드러나 있는 '낮'을 거부하고, 보이는 것을 보이게 해 주는 '낮'을 거부하고, '온갖 것들'을 찾아 나서며 다시 '낮'을 형성한다.

<시인동네> 2014년 가을호에는 '젊은 시인들의 방담'이라는 제목으로 첫 시집을 준비하고 있는 다섯 명의 시인들과 함께 나눈 이야기가 수록 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유계영 시인은 자신의 시 쓰기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했다.

"저는 시를 이렇게 써요. 가만히 있다가, 버스를 타고 가다가, 동네를 산책하다가, 불현듯 무언가 만나는 지점이 있잖아요. 그럴 때 메모해두고 나중에 그 원형을 그대로 이어보려고 노력하면서 완성하는 거죠. 시집 속에도 그 원형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독자들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하더라도 많이 속상해하지 않는 편이에요. 사람들은 어차피 자기 감각으로 세계를 인식하니까요. 내가 만났던 장면이나 내가 느꼈던 정서를, 내 시를 통해 나와 똑같이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다만 모르겠고 어렵더라도 내가 담으려고 했던 그것이 '진짜'일 거라는 교감은 남기고 싶어요."

시인의 말대로 우리는 모두 자기의 감각대로 세계를 인식한다. 시를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의 시인들의 시를 읽는다는 것이 때로는 너무 어렵게도, 고통으로도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산다는 것이 고통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듯이 치열한 고민 끝에 쓴 시를 편안하게만 읽을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가 삶의 방식을 고민하는 것처럼 시인들은 시를 쓰는 방식을 고민한다. 그리고 시를 쓰는 내내 불편한 것과 마주하고, 고통과 마주하고, 보이는 것이 보이는 '낮'이 아니라, 빛이 없으면 보이지 않는 '밤'의 세계로 들어가 다시 '온갖 것들의 낮'의 세계로 향한다.

이번 시집의 '악필 연습'이라는 시를 보고, 양경언 문학평론가는 "유계영은 선혹 자신의 글씨체가 악필이라 할지라도 저 자신의 말로 글씨를 새기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시인이"라고 평했다. 전 세계 인구가 60억 명이라면, 전 세계에는 60억 개의 생각이 있는 것이고, 60억 개의 감각이 살아 숨쉬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각각의 감각들이 각각의 세계를 구축하기도 하고, 서로 만나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기도 할 것이다.

즉 이 세계에는 무한한 가능성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온갖 것들의 낮'에 대해 말하는 유계영의 시에서도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세계를 발견했다. 자신의 시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유계영 시인의 첫 시집, <온갖 것들의 낮>을 씩씩하게 추천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온갖것들의 낮》(유계영 지음 / 민음사 펴냄 / 2015.10.12. / 9000원)



온갖 것들의 낮

유계영 지음, 민음사(2015)


태그:#시집, #온갖 것들의 낮, #시인, #유계영 시인, #유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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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미래학을 기반으로 한 미래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사회는 어떻게 변하는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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